소설리스트

75화 (75/112)

<75화>

키리온에게 사용인들의 단속을 부탁해도 되겠지만, 그러자면 새틴과 기요른을 두고 퍼진 불순한 스캔들을 제 입에 담아야 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뒤에서 키리온이 나직이 웃고 있었는지도 모른 채로 루블리에는 법황청에서 퇴근했다.

항상 오가는 길이 오늘따라 지독하게 길었다.

하루 천 리를 달린다는 한혈마의 속도가 마음이 다그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한풍이 목덜미를 긁었다. 감각이 서걱서걱했다.

저녁이 되면 신혼집은 창문마다 늘 램프를 밝게 켜 두었다.

꼭 어서 오라는 환영의 표시처럼 느껴져 루블리에는 안온하게 반짝이는 샛노란 불빛을 좋아했다.

하나 지금은 저 불빛이 무의미했다.

그는 신혼집을 지나쳤다. 집을 보고 본능적으로 방향을 잡으려는 흑마의 고삐를 감아쥐고서 곁길로 빠졌다. 말은 주인의 재우침에 따라 곧장 근처의 호수로 향했다.

아까 법황청의 사용인들이 기묘한 뒷말을 했었다.

‘조각배 타고 전 약혼자와 뱃놀이도 하셨다던데?’

시가지에서 멀리 벗어난 팔라딘의 신혼집 근처에 호수가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단순하게 ‘두 남녀가 만났다’를 넘어서서 ‘호수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장소가 유난스레 뚜렷하여 미심쩍었다.

호수는 검푸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루블리에는 호숫가에 매인 조각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배는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묶여 위아래로 한들대며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새틴과 타고 내린 모습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무얼 확인하러 온 건가.

다른 사람의 흔적? 아니면 아무 흔적이 없는 데서 느낄 안도?

그렇다면 그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던진 질문에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뱃전에 한 발을 걸치고 앉아 루블리에는 한참을 망설였다.

결과를 감당할 준비……. 그런 게 되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돌아가자.

그는 순식간에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그냥 돌아가면 새틴은 아무 일 없다는 듯한 얼굴로 부드럽게 맞아줄 것이다.

같이 저녁을 먹고, 따뜻한 차나 술을 마시며 대화를 하고, 나란히 잠들어 꿈을 꿀 것이다.

오늘의 안온한 일상을 해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루블리에는 몸을 돌려 뭍으로 나가려 했다. 뱃전을 묶은 밧줄을 잡고 뛰어넘기 직전에 그는 무심코 매듭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침묵했다.

자신이 묶은 매듭이 아니었다. 이런 두꺼운 밧줄로 묶는 매듭은 튼튼하게 묶이면서도 쉽게 풀릴 수 있도록 독특한 매듭법을 쓴다.

그러나 지금 조각배는 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손을 쓴 티가 역력했다. 밧줄을 있는 힘껏 엮어놓기는 했으되 엉성하니 엉망이었다.

여기서 새틴이 뱃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을 목격자는 누가 있을까.

그는 염소를 키우는 축사를 돌아보았다.

* * *

소문은 당사자에게 가장 늦게 도달한다.

특히 소문의 당사자가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다들 뒤로 쉬쉬하면서 떠들기 때문에 더욱 시간이 오래 걸린다.

저를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 어색하게 웃는 사람이 늘어났다, 미묘한 분위기가 감돈다는 느낌을 받을 땐 이미 뒷말이 파다하게 번진 후라 할 것이다.

기요른과 함께 뒤바뀐 신탁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새틴은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살롱의 지인들과도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안부를 묻는 편지가 날아오긴 했어도 단지 글만으로 전해질 수 있는 정보에는 제한이 많았다.

“마님, 본가에서 오셨어요.”

새틴의 부모님은 연락도 없이 들이닥쳤다. 라리를 따라 응접실로 나간 새틴은 미처 인사도 하기 전에 다짜고짜 떨어진 불호령에 기함했다.

“네가 제정신이니? 행실을 대체 어떻게 하고 다니기에 그래?”

“무슨 말씀이세요?”

“너 요새 기요른하고 만났냐?”

“네?”

“너 그놈이랑 바람났다는 소문이 짜하다. 듣기는 했어?”

새틴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라리를 쳐다보자, 라리도 아연실색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예? 마님이요? 말도 안 돼요, 그러실 분 아니에요. 마님이 왜 그러시겠어요? 요즘 두 분이 얼마나 잘 지내셨는데요.”

라리가 열성적으로 새틴을 비호했다.

“그런데 너와 기요른을 봤다는 얘기가 왜 그리 많더냐? 호수, 마차, 집 앞까지 한둘이 아니더구나.”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요른을 만났던 장소가 부모님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어머니의 질책이 이어졌다.

“기요른이야 그 여자도 떠나고 이런 소문이 돈들 이미 깎인 평판 더 나빠질 데도 없겠지. 하지만 너는 안 돼! 너는 카 딜론 경과 결혼한 사람이야. 너만 망가진다고. 생각이 있긴 하니?”

“기요른님이 마님을 찾아온 적이 있긴 해요. 하지만 그분이 억지로 뵈어야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마님께서도 마지못해 나가신 거예요. 저희 중에도 증언할 사람이 많아요.”

“마지못해 나간 게 맞긴 하냐? 마지못한 만남이 도대체 몇 번이야?”

새틴은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만난 게 맞았다.

기요른이 기다리고 있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의 만남은 서로 시간과 약속을 정하고 이루어졌다.

신탁이라는 이유가 있긴 했어도 자의에 의해 나갔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바람이 났다느니 따위의 지저분한 소문은 너무도 억울했다.

기요른과는 신탁에 대한 계획만 나눴다. 베르비움 사제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몰두하고, 진짜 신탁을 지킬 방법을 논의했는데 이따위 스캔들이라니.

“기요른은 저한텐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이에요. 전 그를 좋아하지 않아요, 절대로요.”

“네 감정이 여기서 무슨 의미가 있냐? 세상 사람들이 벌써 네 행실이 부정하다고 믿고 있단 말이다.”

신탁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증거도 없이 성좌를 뒤엎을 폭로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진짜 신탁이 어디 있는지 알아낼 방도도 아직 찾지 못했는데, 공식적으로 입에 올리기에는 너무도 위험천만한 소리였다.

“카 딜론 경이 너에겐 아무 말이 없었니?”

“……네, 없었어요.”

“여태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너야 교외로 나와 살아서 세상 물정에 점점 귀가 어두워졌다 쳐도 카 딜론 경은 매일 법황청을 들락거리는 사람 아니니? 말이 우리 집까지 들어왔으면 카 딜론 가에서도 분명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루블리에는 새틴에게 불륜의 소문이 돈다며 추궁하지 않았다.

“네가 아니라고 하니 우리야 믿겠다만,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 가족처럼 생각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말아라.”

“카 딜론 경이 아무 내색을 안 했다는 게 더 신경이 쓰이는구나. 카 딜론 가에서 항의가 들어오지도 않았어. 어쩌면 자기 선에서 다 묻고 가겠다는 뜻 같은데…….”

“묻고 가다니요? 기요른과는 정말 그런 일이 없어서 제가 다 억울해요. 루브하고 얘기해 볼게요.”

“얘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입 다물고 몸 사려. 성하께서도 건강이 나쁘셔서 나라가 안팎으로 혼란해. 기사단 일만으로도 힘들 거다. 이렇게 수선스러운 시기에 사람 속 들쑤시는 거 아니야. 자칫 탈이라도 날라.”

대화의 끝은 꾸중으로 돌아왔다.

한바탕 폭풍이 가시고 나서 새틴은 침실에 틀어박혔다. 라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 들어왔다.

새틴은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너무 진을 뺀 탓인가. 어지럽고 기운이 없었다.

“라리, 너도 처음 들었어?”

“그럼요. 제가 알았다면 마님께 말씀드렸을 거예요.”

저를 위로하기 위함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새틴은 가만히 라리를 지켜보았다. 라리가 손을 내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아무래도 저희가 교외로 이사 온 게 독이 되었나 봐요. 더구나 저는 마님을 오랫동안 지척에서 모셔온 하녀예요. 저한테 직접적으로 그런 스캔들을 어떻게 전달하겠어요. 이 집에 고용된 사람들은 다들 충실한 사람으로만 가려 뽑았는데요 ……하지만 이제야 이해가 되는 일도 있네요. 우유를 받으러 갈 때 눈치가 좀 미묘하긴 하더라고요.”

“알았어. 나 좀 혼자 있을게.”

“괜찮으세요?”

“그냥 좀 피곤한 거 빼곤 괜찮아.”

청천벽력같은 소동에 지칠 대로 지쳤나 보다. 몸이 까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라리를 내보내고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새틴은 정신을 차리고 새 편지지를 꺼냈다.

‘기요른, 너와 내가 이상한 소문에 휩싸인 건 알고 있어?’

급한 필체로 몇 줄을 적어 내려가다가 죽죽 긋고는 난로에 구겨 던졌다. 편지도 겁이 나서 보낼 수가 없었다. 셀 위오 가로 심부름을 보내면 또 의심을 살 터였다.

어쩌다 사람들 눈에 띈 걸까. 아니면…… 우릴 감시하는 눈이 있었나?

오싹했다.

그래, 사제도 난데없이 죽었지.

사제는 머리맡에 촛농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고 밝혔더랬다. 사제의 죽음에는 그의 입을 영원히 틀어막으려는 의도와 더불어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을 노린 무언의 압박인지도 모른다.

새틴은 벌떡 일어나 침실을 한 바퀴 돌았다.

천만다행으로 오페라 대극장에서의 만남은 알려지지 않은 듯했다. 다음 장소로 그곳을 미리 잡아두기를 잘했다.

델 마레는 새틴이 알고 셀 위오는 기요른이 안다. 각자 가문에 신탁의 비밀을 터뜨리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터뜨리는 게 나을지 말지를 마지막으로 의논하고서 이런 위험한 밀회는 마무리할 것이다.

이후로 두 번 다시 기요른과 만나는 날은 없어야 했다.

* * *

“새틴님, 오늘도 저희 오페라 대극장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오셨습니까?”

막 대극장의 입구를 지나치려던 참이었다. 지배인이 새틴의 얼굴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새틴의 곁을 훑는 눈초리에 새틴은 정색하며 대답했다.

“네, 혼자예요.”

“좌석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녜요.”

굳이 필요치 않은 친절이다. 지배인의 안내를 거절했으나 그는 꿋꿋하게 새틴의 좌석 문을 열어주고서 돌아갔다.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 입장하자마자 새틴은 입구에 걸린 거울 앞에 잠시 멈추어 서서 제 차림새를 점검했다.

옷은 지난번과 비슷하게 입고 왔다. 머리는 말아 올리고 목에는 목걸이를 걸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어 벌써부터 종아리가 살짝 피로했다.

“집에만 있어서 그러나? 좀만 걸어도 힘드네.”

새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체력이 떨어질 만도 했다. 걱정이 많아 잠도 제대로 못 잤고, 겨울이라 으슬으슬 춥기도 했다. 실내에 있어도 자꾸만 오한이 일어 새틴은 도톰한 숄로 등과 어깨를 감쌌다.

의자에 앉아 새틴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갓 막이 오른 무대를 멍하니 응시했다. 노래와 대사가 한 귀로 흘러들어왔다가 한 귀로 빠져나갔다.

두 번째 방문했지만 이 공연의 내용은 영원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새틴은 지난번과 엇비슷한 시각에 좌석을 떠났다.

기요른의 좌석도 저번과 같았다. 그는 오늘도 커튼을 치렁치렁 걸어두고 있었다. 새틴이 아무 때나 찾아올 수 있게끔 문을 잠가두지 않은 것도 똑같았다.

새틴이 들어오는 기척에 기요른이 반색하며 벌떡 일어섰다. 새틴은 얼마간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기요른과 마주 섰다.

“……소문 도는 거 알아?”

예상외의 질문이었는지 기요른이 멈칫 놀랐다.

“무슨 소문?”

“너하고 날 두고 더러운 스캔들이 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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