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12)

<74화>

얼마 뒤 루블리에가 들어간 바로 옆방의 좌석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는 고요한 복도를 흘끗 일별하고서 빙그레 웃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두 사람의 밀회를 루블리에에게 까발릴 속셈이었는데, 그녀가 수를 내기도 전에 감각이 예민한 루블리에가 먼저 알아차렸다.

수고를 덜어줬으니 고마운 일이지.

딜라일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의자에 편안히 몸을 묻었다.

* * *

새틴은 기요른의 박스석에 들어오자마자 벽에 기대어 섰다. 붉은 커튼이 내려진 방은 어둡고 으슥했다.

“베르비움 사제의 얼굴이 확실하댔지?”

“응. ……욱, 우욱.”

“왜 그래?”

“그날만 기억하면 속이 너무 안 좋아.”

기요른이 헛구역질을 했다.

“목부터 배까지 칼로 전신을 난자해놨어. 검푸른 피부에 칼자국이……. 그걸 고스란히 봤어……. 신분을 추적하지 못하게 옷도 싹 가져가서 사제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길에서 도둑을 만났겠거니 했을 거야. 얼마나 고통에 시달리다가 숨이 끊겼는지, 표정이 아주 끔찍해서…….”

설명만 들어도 오싹한 모습으로 죽었다. 살아 움직이는 사제를 만났던 기요른의 충격은 확실히 더 클 터였다.

소심한 남자가 시체 안치소까지 찾아가 그 광경을 홀로 보고 돌아왔으니 고생이 컸다.

새틴은 기요른에게 미안해졌다. 더불어 키리온의 잔인한 손속에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칼데브란카의 성좌 이양은 늘 평화로웠다. 다소간 잡음이 일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것이 신탁을 신봉하는 국민의 자부심이었다.

“공연한 사람이 죽었어. 무슨 짓을 해서든 조작한 신탁을 지키겠다는 거네. 성좌를 피로 물들여서라도 올라가겠다는 의지야.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이런 사람이 대주교 예하였던 거니? 맙소사. 루블리에는 아마 상상도 못 하겠지.”

“나도 믿기지가 않아.”

심지어 무연고자 시신으로 위장하기 위해 소지품을 비롯해 옷까지 모조리 벗겨가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실로 억울한 개죽음이다. 부패하는 시체를 가져와 몰래 보관할 방법도 없어서 기요른은 얼굴만 보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아쉬워, 새틴은 다시금 캐물었다.

“신분 증명할 게 진짜 아무것도 없었어?”

“정말 없었어.”

“용의주도하다 해야 하는 건지, 수단이 악랄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새틴이 한숨을 쉬었다. 고민에 잠겨 있다가 잠시 머릿속을 환기할 겸 커튼을 걷으려는데, 기요른이 퍼뜩 다가와 새틴의 손을 가로막았다.

“아, 맞다. 새틴, 루브가 여기 와 있는 거 봤어? 너도 아는 일이야? 네가 말했어?”

“뭐? 내가 말할 까닭이 없잖아.”

새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루블리에가 이 극장에 와 있다고? 금시초문인 소리였다.

“오늘? 지금? 어떻게 왔지?”

“글쎄. 아까 들어오면서 마주쳤는데 지배인의 안내를 받고 있더라고.”

갑자기 머리가 하얗게 표백되는 기분이었다. 가슴에 찬바람이 들었다. 새틴은 애써 얼어붙은 입매를 움직였다.

“괜찮아. 너와 나는 각자 표를 끊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오페라를 관람한 거야.”

“……그렇지.”

“우연한 만남 이외에는 연결고리 자체를 만들면 안 되겠어.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누군가의 눈에 띄면 위험할지 모르니까 이제 편지도 보내지 마.”

“그럼 다음 만남은 어떡해?”

“미리 정해. 다음 주 이 시간에 여기서 다시 만나. 오늘은 내가 그냥 먼저 돌아가는 게 좋겠다.”

가능하면 이 오페라 극장 안에서 마주칠 일을 안 만드는 게 나았다.

새틴은 나누던 대화를 화급히 정리하고 기요른의 박스석을 떠났다.

제자리로 돌아가 가지고 온 짐을 챙겨 아예 오페라 극장을 떠날 때까지는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한창 진행 중이던 오페라는 서서히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고 있었다.

“새틴, 아까 오페라 극장에 왔었어?”

집으로 일찍 돌아가 안정을 찾고서 평소처럼 루블리에를 맞으려는데, 루블리에의 첫마디가 하필이면 오페라 극장이었다.

“……어? 왜?”

“널 본 것 같아서. 거기 기요른도 와 있었더군.”

새틴은 심장이 철렁하도록 놀랐지만 이내 표정을 수습했다.

“그랬어? 나는 보다가 중간에 몸이 안 좋아져서 일찍 돌아오느라 몰랐네.”

루블리에가 입가를 슬그머니 틀어 올렸다.

“그다지 볼 만한 공연이 아니었어. 배우가 입은 붉은 드레스는 그 캐릭터의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더군. 그렇지?”

“응. 나도 그렇게 느꼈어.”

새틴이 덤덤하게 동의했다. 루블리에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지켜보다가 가냘픈 어깨를 제 팔로 감쌌다.

“들어가자.”

그가 말한 가수는 공연 내내 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새틴은 공연을 제대로 보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보지 못했을 것이다. 커튼으로 전면을 아예 가리고 있었으니.

왜 둘이 만났지? 파혼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대체 왜?

그 밀실 안에서 대체 무얼 했을까. 새틴은 기요른과 함께 한참을 머물렀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습도 보이지 않는 그 좁은 공간 속에서.

속이 시끄러웠다. 추측만으로도 머리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하나 오늘따라 왠지 새틴이 힘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루블리에는 제게 이끌려 느릿느릿 걸어오는 새틴의 뺨을 손으로 훑었다.

“몸은 많이 안 좋아? 어디가 아픈데?”

“이젠 괜찮아. 쉬니까 나아졌어.”

새틴의 어조는 잔잔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차마 물을 용기가 사라졌다. 루블리에는 억지로 제 안의 태풍을 씹어 삼켰다.

“새틴, 널 사랑해. 알지?”

새틴은 여상스레 대답했다.

“알아.”

* * *

신성 기사단 내부라고 하여 딱히 말이 나오지 않는 집단은 아니다.

부관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얼굴로 루블리에의 근처를 맴돌며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수년을 동고동락한 부관이 저토록 난처해하는 기색도 드물어서, 루블리에가 먼저 서두를 열었다.

“무슨 일이지?”

“저, 수장님. 댁에 별일은 없으십니까?”

“별일?”

별일이라 되묻자마자 예감이 싸해졌다. 겉보기로 집안은 멀쩡하게 굴러갔다.

사용인들은 언제나와 같이 충직하게 두 주인의 시중을 들었고 새틴도 오페라 극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새틴의 태도만 보아선 그날 기요른이 같은 장소에 있었는지 몰랐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내가 입을 다무니 루블리에도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잊어야겠지. 잊는 게 좋겠지.

그리 마음먹었다가도 기요른의 방으로 들어가던 새틴의 옷자락이 불쑥불쑥 가슴을 치는 바람에 괴로웠다. 하루하루가 유리 위를 걷는 듯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앞에선 내색할 수 없는 일이다. 루블리에는 자못 태연하게 반문했다.

“아무 일도 없는데?”

“다행입니다만, 누군가 수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듯합니다. 한번 알아보시고 조치를 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상한 소문? 어떤 내용이지?”

루블리에의 말꼬리가 단박에 날카로워졌다. 심기 불편한 상관의 반응에 부관이 얼버무렸다.

“그게…… 자칫 명예가 훼손될 소문인데 저도 자세하게는 모릅니다.”

“말을 할 거면 끝까지 제대로 하지. 말을 하다 말면 내가 오해를 하지 않겠나.”

루블리에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부관이 끙끙 앓고 있던 소문을 고했다.

새틴이 기요른과 여러 차례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막상 제 귀로 듣고 나니 그 스스로가 기이하리만치 아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심장이 치솟는다면 끝없이 치솟을 터고, 내려앉는다면 하염없이 내려앉을 터라 도리어 그 중간 어딘가에 얌전히 머무르는 듯했다.

은밀한 만남. 그랬을 터다.

제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으면 증거를 가져오라 화를 냈겠지만, 새틴은 분명 기요른을 찾아갔다.

그걸 직접 본 사람이 루블리에였다.

“부인을 못 믿어서 드린 말씀이 아니라 제 귀에까지 들려왔단 게 너무도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평소 소문에 밝지 않은 편인데도 여기저기서 그 이야기를 합니다. 수군거리는 사람도 많아서 그런지 소문이 퍼진 속도가 아주 빠릅니다.”

부관은 이상하다고 표현했으나 루블리에의 판단으로는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실제라면 아주 흥미로울 가십거리 아닌가.

새틴과 기요른은 이미 한 번씩 커다란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오른 사람들이다.

이들을 소재로 한 공연까지 만들어져 대중적인 성공도 거뒀다. 그 둘이 비밀리에 만났다는데 파급력을 과연 어디에 비할까.

보고를 위해 법황청으로 들어가던 루블리에가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마음이 복잡하니 걸음이 자꾸만 흐트러지려 한 탓이었다. 잠깐 머리를 식힌다는 게, 끝이 없어 한참을 머물렀다.

그때 법황청 내의 사용인들이 소곤소곤 속닥이는 수다가 들려왔다.

“……델 마레 가의 새틴님 말이야?”

“조각배 타고 전 약혼자와 뱃놀이도 하셨다던데?”

“설마. 그분이 진짜 그러셨으려고.”

“나도 깜짝 놀랐는데 목격자들이 있나 봐. 아까 밍구스가 와서 말하더라고.”

루블리에는 벌떡 몸을 세웠다. 빠른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다가가자 루블리에를 발견한 사용인들이 귀신을 본 낯빛이 되어 주르르 무릎을 꿇었다.

“법황청 내라 해도 외부의 듣는 귀가 아예 없지는 않을 텐데 요즘 궁성 내 기강이 아주 엉망인 모양이야. 이만하면 법황청이 소문의 온상지라 해도 믿겠군. 그 입들 조심하지. 카 딜론이 무섭지 않은가?”

사용인들은 얼굴이 하얗게 떴다.

“죄송합니다.”

눈 있고 귀 있고 입 있는 사람들을 권위로 틀어막아 보았자 미봉책에 불과하다.

소문이란 늘 그렇듯 알아서 사그라지기를 기다리거나 뒤엎을 증거를 찾아 받아쳐야 했다.

“루브, 오늘따라 여기가 아주 굳었는데?”

집무실에 있던 키리온이 루블리에를 본 순간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었다.

“그런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긴 했으나 냉담한 기는 다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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