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12)

<73화>

극장에는 대부분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대표 공연이 걸려 있다.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공연이니 어쩌다 같은 날 공연을 보러 왔다 해서 의심을 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침 극장가를 뒤져보니 오페라 대극장에 관객들이 몰리는 공연이 하나 있었다.

하필 딜라일라가 프리마 돈나로 있었던 오페라 대극장이라니. 국립 극장이었다면 좀 더 마음에 들었겠지만 일부러 유명한 공연을 찾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새틴과 기요른은 같은 날 같은 시간대의 박스석 입장권을 각각 끊었다. 2층의 박스석이라 중간에 몰래 나가기도 쉬웠다.

공연은 이틀 후였다.

* * *

루블리에는 키리온의 호출을 받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발소리만 듣고도 고개를 든 키리온이 환하게 반색했다.

“루브.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네.”

“부탁? 무슨 부탁인데?”

“법황청에서 오페라 극장에 지원한 예산으로 새 공연을 올렸는데, 결과가 어떤지 직접 검토해야 해서 오늘 가겠다고 연락을 취해 뒀었지. 한데 내가 지금 일이 너무 바빠서 하루가 모자라. 아마 극장에서 귀빈석 준비까지 다 끝내뒀을 거야. 그쪽에 손님맞이를 두 번 시키기도 미안하고, 나는 요즘 정신이 없어서 공연까지 일일이 확인할 겨를이 없군. 자네가 대신 가서 관람하고 보고서 좀 작성해 줘.”

용건을 듣자마자 루블리에는 영 내키지 않는 내색을 비췄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보내지그래?”

“내 대리인데 아무나 보낼 순 없고 팔라딘쯤 되는 인물이 가줘야 서로서로 면이 서지 않겠나.”

“키리온. 난 딱히 공연에 관심이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세상에는 하고 싶지 않아도 꼭 해야 하는 일들이 간혹 있는 법이지. 돈을 많이 들였으니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제법 괜찮을지도 모르지. 가보고 마음에 들면 나중에 자네 부인과 데이트를 해도 좋잖아.”

키리온이 재차 권유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루블리에도 두 번이나 싫다고 반복하지는 못했다. 부탁이라곤 하나 차기 법황의 명령이다. 거부는 불가능했다.

“언제 가면 되나?”

루블리에는 시간을 확인했다. 혼자 보는 공연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으나 새틴과 데이트를 하면서 보는 공연이라면 괜찮았다. 그녀가 곁에 있다면 내용도 딱히 중요치 않았다.

게다가 오페라 극장의 귀빈석이라면 박스석일 터였다.

박스석. 거기서는 제법 즐거운 기억도 있었다. 시간 여유를 보아 새틴을 데려와서 함께 갈 작정이 섰다.

루블리에가 승낙하자 키리온은 지그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출발하면 딱이로군.”

“이런. 이왕 보낼 거였으면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루블리에는 농담과 진담을 섞어 투덜거렸다. 신혼집이 머니 새틴을 데려올 시간이 부족했다.

“자네 부인도 따로 일정이 있을지 모르잖아. 후에 둘이 날짜를 맞춰서 공연을 본다 하면 내가 표를 구해주지.”

“그러지 않아도 돼. 오페라 대극장에도 카 딜론 가 전용 박스석이 있으니까.”

키리온의 호의를 거절하고서 루블리에는 훌쩍 법황청을 떠났다.

오페라 대극장은 오페라를 보러 온 관객들로 바글거렸다. 특히 일반 좌석으로 된 1층은 들어가려는 관객들로 어마어마하게 붐볐다.

그나마 박스석이 있는 2층부터는 인파가 퍽 줄어들어 다행이었다.

극장의 지배인은 키리온의 자리를 대행하여 온 루블리에를 직접 일부 귀빈들만이 사용하는 통로로 안내했다.

“팔라딘께서 친히 내방하시다니 영광입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저를 불러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근처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오신다는 통보를 이틀 전에 받고 저희가 급작스레 준비하느라 모시는 데에 다소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됐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공연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할 일 하십시오.”

그저 법황청의 이름으로 자리 한 번 채워주면 되는 일을 굳이 번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좌석까지만 안내받으면 지배인에게 용건은 끝이다.

막 중앙의 박스석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차였다.

저 안쪽의 박스석 문을 열고 여자 하나가 휙 들어갔다. 어쩐지 낯익은 뒷모습이었다.

본능적으로 이름 하나가 머릿속을 어른거렸다. 루블리에는 고개를 기울이며 가만히 되뇌었다.

“새틴……?”

지배인이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예?”

“아닙니다.”

너무 언뜻이라 기연가미연가했다. 그녀를 본 시간이 채 일 초도 되지 않았다.

새틴의 은회색 머리카락을 봤다면 확실했을 텐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키 큰 루블리에의 내려다보는 시야로는 가려진 부분이 너무 많았다.

다른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자기 자리를 찾고 있어 주변이 산만하기도 했다.

새틴이 여기 있을 리가 없겠지. 오페라를 보러 간다면 밤에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다가 분명 그 이야기도 했을 텐데, 새틴은 어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루블리에는 의구심을 지웠다. 한데 이번에는 아는 사람이 복도를 지나가다가 루블리에를 맞닥뜨리고는 흠칫했다.

“기요른. 자네도 오페라를 보러 왔나?”

오랜만에 마주친 기요른이었다.

“……루, 루브.”

기요른이 허둥지둥 아는 척을 해왔다.

“으…… 응. 오랜만에 문화생활을 할까 해서 말이야.”

“얼굴빛이 영 안 좋은데. 건강은 괜찮아?”

딜라일라와 헤어졌다는 소문을 듣기만 했을 뿐 기요른을 따로 만난 적은 없었다.

기요른 본인에게는 슬픈 일이겠지만 셀 위오 가문에게는 축하할 일이다. 더구나 위로하기에는 지극히 한심스러운 이유이기도 하지 않던가.

어차피 암암리에 서로 거리를 두게 된 관계라 루블리에는 딱히 기요른을 의식하지 않고 지냈다.

그런 반갑지 않은 사이가 되었음에도 일순 어디 아픈가 싶을 만큼 그는 얼굴이 엄청나게 상해 있었다.

기요른이 뻣뻣하게 머리를 주억였다.

“문제없어. 아주 건강해.”

“그래,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어쨌든 반갑군.”

“요즘 가장 유명한 오페라라기에 한번 보러 왔을 뿐이야.”

“마음에 드는 공연이기를 바라지.”

적당한 체면치레가 오갔다.

“고마워. 자네도 즐거운 시간 보내게.”

기요른이 창백하게 대답하곤 몇 칸 건너의 박스석으로 들어갔다.

서로 모르고 왔나. 루블리에는 무심결에 새틴이라 추정했던 여자가 들어간 박스석을 응시했다.

이 둘은 루블리에의 좌석을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려 있었다.

잠시 비딱하게 몸을 기울이고 섰던 루블리에는 이내 생각을 비우고서 제 자리에 들어섰다.

루블리에가 귀빈석으로 초대받은 자리는 무대를 두고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세워진 객석의 한가운데 위치했다.

따라서 난간 가까이 다가가 상체를 내밀면 양옆으로 펼쳐진 주변 박스석들의 일부가 보이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그는 먼저 여자가 들어간 박스석 부근을 살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있는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기요른이 입장한 반대편을 쳐다보니 기요른의 좌석 앞에는 붉은 커튼이 쳐져 있었다.

공연은 솔직하게 재미없었다.

딜라일라 이후 극장들은 그녀만큼 스타성이 높은 배우를 보유하지 못했다.

법황청이 지원했다는 홍보 효과로 관객 유치에는 성공했으나, 정작 무대를 까놓고 보니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다만 투자금이 법황청에서 나왔기에 다들 듣기 좋은 소리만 쥐어짰을 뿐이었다.

루블리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집중력을 잃었다. 푸른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가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렀으나, 가사는 귓가를 힘없이 스치고 사그라졌다.

아무래도 새틴처럼 느껴지던 여자의 뒷모습이 눈앞에 줄곧 아른거린 탓이었다.

자꾸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새틴은 기요른이 오는 자리를 피하고 싶어 했다. 루블리에도 달갑지 않았다.

심지어 하필이면 좌석마저 같은 층이었다. 입장할 땐 운이 좋아 마주치지 않았다 해도 도중의 인터미션에, 또는 퇴장하는 복도에서 만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어쩌다 둘의 일정이 겹쳤는진 몰라도 새틴이 불편해지는 상황은 생기지 말아야겠지.

이따 지배인을 불러 박스석의 주인이 새틴이 맞는지부터 알아봐야겠다, 결정을 내렸을 무렵이었다.

복도의 돌바닥을 또각또각 밟아가는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평범한 사람들은 인간의 발소리가 대체로 거기서 거기라고 여기나, 루블리에는 발소리로 상대를 분간했다.

키가 큰 사람, 키가 작은 사람, 몸집이 큰 사람, 마른 사람, 남자와 여자, 심지어 나이에 따라서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발소리를 지녔다.

개나 고양이가 키우는 주인의 발소리만 듣고도 현관에 앉아 기다리는 감각과 비슷했다.

“……새틴?”

심지어 새틴이라면 그가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 사람이다. 루블리에는 벌떡 일어났다.

혹시 누군가 새틴에게 팔라딘이 와 있다고 알려준 건가?

기대감에 문을 열려는데 새틴의 발소리는 엉뚱하게도 루블리에의 문 앞을 지나 반대편으로 길게 이어졌다. 루블리에는 거리를 헤아리다 서서히 눈매를 굳혔다.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니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완전히 어긋나지도 않을 것이다.

육감이 경종을 울렸다. 새틴에 관련해서, 그는 항상 예민해졌다.

부인의 일인데 당연하다. 간혹 지나치게 과도하게 구나 싶을 정도였다.

혹시 육감이 잘못 짚었을 수도 있을까. ……그럼 육안으로 봐야겠지.

루블리에는 소리 없이 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텅 빈 복도 저편에서 기요른의 박스석으로 막 들어가는 여자의 옷자락이 선명히 시각에 박혀왔다.

같은 옷이 분명했다.

기요른의 박스석 문이 닫혔다.

루블리에는 한참을 우뚝하게 서서 그 방을 지켜보았다.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열기가 올라와 어지럼증으로 변했다.

그 시기를 간신히 지나고 나니 이후로는 소름 돋는 한기가 찾아왔다.

네가 아니어야 해.

너는 아니어야 해.

당장 저 방으로 들어가 문을 열고 싶었다. 뛰어 들어가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나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살면서 겁을 내 본 일이 거의 없는데, 새틴이 악령과 단둘이 대치하고 있었던 밤 이후로 이토록 떨린 날은 처음이었다.

충동을 이성으로 간신히 억제했다. 대신 루블리에는 난간을 짚고 기요른의 박스석을 주시했다.

붉은 커튼은 내내 내려져 있었다. 공연 중 단 한 번도 치워지지 않았다.

오페라를 즐기러 온 목적이 아닌 것이다. 기요른은 루블리에에게 거짓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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