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키리온이 동조했다.
“그가 가장 중요한 관객이거든. 한데 그가 과연 믿을까?”
그의 의문에 딜라일라는 자신만만하게 보증했다.
“믿지 않고는 못 배길걸요.”
“둘은 깨가 쏟아지는 신혼이오.”
“그래서 더 믿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원래 가지면 가질수록 더 불안해지는 게 사람이잖아요.”
애초 루블리에의 새틴의 결혼은 필연과 우연이 교묘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기요른의 마음이 제게로 기울게 만든 것은 딜라일라가 관여한 필연이었으되, 그녀의 계획은 단지 거기까지였다.
분개한 새틴이 추기경의 성혼 선언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 있던 루블리에가 즉각 청혼한 것은 상상을 벗어난 전개였다.
적어도 루블리에의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전부 행운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팔라딘이란 지위와는 달리 실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니 그 속이 무한정 평안할 리가 없었다.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이 행복이 없는 만약을 떠올리면 선뜩해지리라.
지금껏 연기했던 무수한 대본들로 인해 딜라일라는 연인의 마음을 파고들어 분석하는 데 능숙했다.
“질투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하죠. 예하의 말씀에 따르면 팔라딘은 몇 년 동안이나 기요른님을 몰래 질투하며 살아왔을 테니까요.”
키리온이 결론을 맺었다.
“좋소. 극본이 나왔으니, 이제 무대에 올릴 시간이로군.”
딜라일라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 흠칫, 다른 걱정이 드는 바람에 미소를 지웠다.
키리온을 제외하면 이 방에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그녀는 괜히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소곤 물었다.
“그런데 그 사제는 뒤탈이 없을까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그리고 소지품도 전부 회수해서 태워버리라고 지시했소. 별문제 없을 거요.”
* * *
기요른은 피로한 기색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기요른을 마중 나와 있던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다가왔다.
“오늘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주신 분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 사람이 바뀌었나 봅니다. 맨 처음 의뢰를 주신 분은 여성분이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그녀는 사정이 있어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기요른은 품에서 새틴의 편지를 꺼내 관리인에게 건넸다. 남자는 새틴의 서명을 보고서야 안심했다.
기요른은 내심 새틴의 조심성에 감탄했다.
그녀는 자신의 서명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신의 대리인이라고 강조해 두었다.
“그러시군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남자가 두어 걸음 앞서 걸으며 기요른을 안내했다.
기요른은 묵직한 피로에 자꾸만 까라지려는 몸을 추스르며 그를 뒤쫓았다.
꼬박 이틀 동안 마차를 탔다.
신분이 들통나지 않게 조심하라는 당부를 들어 일부러 여행용 장거리 마차를 수배했더니 집에서 쓰는 마차와 달라 몇 시간만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아팠다.
심지어 수도를 벗어난 뒤부터는 도로도 엉망이었다. 마치 온몸을 두들겨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루블리에만큼 승마에 자신이 있었다면 차라리 말을 탔을 것이다.
벌써부터 용건을 마치고 돌아갈 길이 걱정이었다.
눈앞에 회색의 건물이 나타났다. 선명한 녹음이 가득한 여름이면 좀 나았겠지만, 지금은 잿빛의 겨울이었다.
이 때문에 건물은 전체적으로 축축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곳입니다.”
건물로 들어가기 직전에 기요른은 유독 또랑또랑한 억양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너 다녀와야 할 데가 생겼어.
그게 그녀가 던진 첫마디였다.
기요른을 여기 보낸 사람은 새틴이었다. 그는 웬일로 저를 급하게 찾는 새틴의 부름에 신이 나서 달려갔다가 무슨 일인지 예민하게 긴장한 새틴과 대면했다.
“기요른. 내가 베르비움 사제를 찾은 것 같아. 그런데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 해. 나는 인상착의까진 알아도 실제로 그를 본 적이 없으니까, 얼굴을 본 네가 갔다 와.”
추적이 지지부진하던 중 새틴이 알아낸 뜻밖의 희소식이었다. 기요른이 반짝 반색했다.
“찾았어? 어떻게? 지금 어디 있는데?”
새틴은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그녀는 품에서 얇은 편지 한 통을 꺼내 기요른에게 건넸다.
기요른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얼른 편지를 펼쳤다.
‘시신 안치소에 들어온 무연고자 시신들 가운데 부인께서 의뢰하신 인상착의를 가진 남자가 있습니다.’
막상 짐작만 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나자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시신 안치소.”
기요른의 얼굴에도 경악이 서렸다.
사제는 칼데브란카 내에서 존경을 한몸에 받는 사람들이었다. 하물며 베르비움은 대신전 소속의 사제였다.
하여 새틴은 만약 키리온이 베르비움에게 손을 쓰고자 한다면 최소한 수도를 벗어나 신원을 알아볼 사람이 전혀 없는 곳에서 처리했으리라 예상했다.
그녀는 베르비움의 고향으로 가는 곳곳에 위치한 시신 안치소에 사람을 보내 그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고 무연고자 시신이 들어오면 알려달라고 연락을 남겨 두었다.
그 회신이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다만 결혼한 몸으로 루블리에에게 행선지를 속이고 나흘에 이르는 길을 다녀오기는 어려웠다.
새틴은 이 일을 기요른에게 맡겼다.
기요른은 머리를 식히러 잠시 휴식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떠났다.
“건물이…… 용도가 그래선가요? 겨울이라도 이 안이 유난히 춥군요.”
건물 안과 밖의 온도가 비슷했다. 심지어 기분 탓인지 안이 더 싸늘한 듯도 싶었다.
기요른은 두꺼운 겨울 코트의 옷깃을 여몄다. 냉기가 모여들어 잇새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시신 안치소의 지하로 내려가는 복도는 몇 개의 램프만이 불을 밝히고 있어 침침했다. 두꺼운 약품 냄새와 송장에서 나는 냄새가 뒤섞여 역했다.
보통 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진작에 돌아나갔을 곳이다. 하나 관리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겨울에 오셔서 다행인 겁니다. 안치소는 추울수록 좋거든요. 여름이 되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어요. 시신이 금방 부패해서요. 고약한 냄새가 아주 진동을 하죠. 그 냄새가 몸에 배면 쉽게 빠지지도 않습니다.”
으으. 기요른은 몸서리를 쳤다.
관리인이 창살 문을 열었다. 냉기가 도는 땅바닥 위에 죽은 사람들이 저마다 천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광경이 보였다.
본래는 하얀 천이었을 터이나, 추깃물이 스며 얼룩덜룩했다.
“욱…….”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안치소에서는 신원 미상의 시신들을 모아 보관하고 있다가 가족이 나타나지 않으면 한꺼번에 태웠다.
그날이면 근방의 사제가 안치소에 들러 죽은 사람들의 안식을 빌며 기도를 올렸다. 그것만이 유일한 장례절차였다.
본디 온갖 사정을 가진 시신들이 마지막으로 모여드는 장소가 이곳이었다.
제대로 된 가족을 가진 사람이면 죽어서 안치소로 흘러들어오지 않는다. 당연히 관리인의 입장에선 공들여 시신을 수습할 까닭이 없었다.
“사실 남자분이 오셔서 안심했습니다. 여성분께서 보시기에는 적절한 광경이 아니어서요.”
관리인이 구석 자리에 버려진 시신으로 기요른을 인도했다.
“마, 많이 끔찍한가요?”
기요른은 살짝 겁을 집어먹고 물었다.
사실 저보다는 새틴이 훨씬 대담하게 이 장면을 지켜봤으리라.
짐작을 넘어선 확신이었다. 시신을 본 경험이 없기로는 둘 다 마찬가지였지만, 똑같이 낯선 상황에 직면했을 때 늘 침착한 사람은 새틴이었다.
“발견한 과정이 과정인 만큼 훼손 상태가 끔찍하기도 하고요, 어떤 도적놈들인지 마음을 못되게 먹고 옷까지 홀딱 털어가서 완전한 나신으로 발견되었거든요.”
맙소사. 기요른은 재빨리 생각을 고쳐먹었다.
전라의 남자라니, 새틴이 보지 않아 다행이었다.
“선생님. 찾으신 사람이 이 남자가 맞습니까?”
관리인이 하얀 천을 휙 걷어 올렸다.
그 아래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서 기요른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베르비움이 죽어 있었다.
시신을 확인하러 온 남자는 한참을 토했다. 속을 다 게워낸 그가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을 때에는, 얼마나 지쳤는지 혈색이 시신만큼이나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갈색 머리의 남자를 배웅하고서 관리인은 지하실로 돌아왔다. 시신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그 자리에서 기절하거나, 토하거나, 역겨워 몸부림을 치거나.
그러나 관리인은 늘 무덤덤했다. 여기 누운 사람들도 한때는 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시체가 딱히 무섭지 않았다.
그는 손님이 보고 간 죽은 남자의 천을 바로잡아 주었다.
죽기 직전까지 공포와 아픔에 신음했을 남자는 고통을 참느라 턱이 일그러져 있었다.
막 보관소로 실려 왔던 날에는 사후 일어나는 근육의 경직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시일이 지난 지금은 비교적 유연해졌다.
관리인은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맞춰주려 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부자연스럽게 벌어진 남자의 입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입을 벌리고 안을 들여다본 관리인은 손가락을 넣어 목 안을 헤집었다.
“이게 뭐야?”
조그만 인장이 입안에 들어 있었다.
* * *
“그들이 사제의 시신을 찾아냈나 보오. 내가 아직 일이 서툴러서 흔적을 남겼군. 이후에는 더 신중해야겠소.”
다음을 궁리하는 키리온의 어조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딜라일라가 그를 위로했다.
“걱정 마세요. 소지품을 전부 태웠다고 하셨잖아요. 시체를 수도로 옮겨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럼 죽은 사람이 누군지 밝혀낼 방법은 없어요. 저들은 증거를 못 잡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장소도 멀어서 수도로 그 이야기가 들어오지도 않을 테고요.”
하지만 키리온의 짜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의외로 보기보다 더 끈질겨. 기요른은 혼자 시체까지 찾아낼 정도로 담이 큰 인물이 못 되니, 아무래도 새틴 부인의 성격이 꽤나 집요한 모양이지. 하여간 골이 다 지끈거리는군. 우리 계획을 빨리 실행해야겠소.”
* * *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날 만한 장소엔 여러 제약이 따랐다.
서로의 집은 제일 먼저 논외가 되었다.
찻집도 당연히 불가능했다. 새틴이 자주 다니는 살롱 또한 기요른이 출입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새틴은 다음 약속을 두고 고민했다.
시신 안치소에 다녀온 기요른은 죽은 남자가 베르비움 사제가 맞다며 신원을 보증했다.
글씨가 엉망진창이라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고 돌아왔는지 충분히 가늠케 했다.
‘그는 끔찍하게 살해당했어. 제발 빨리 만나서 얘기해.’
만나긴 만나야 하는데 어디서 만나야 하지. 한참 골몰하던 도중에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찾을 수 없다면, 사람들의 틈에 숨어야겠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눈에 띄지 않는 곳.
대극장.
오페라 극장이 있었다. 누가 가도 의심을 사지 않는 곳, 하루에도 수백수천의 사람들이 공연을 즐기러 몰려드는 곳.
아주 적당했다. 새틴은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다음에는 대극장의 박스석에서 만나자. 들어갈 때는 각자 표를 끊어서 따로 입장해. 공연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무대에 집중하느라 주변에는 관심이 없고, 박스석이 있는 복도도 텅텅 비니까. 그때 내가 네 좌석으로 옮기든 네가 내 좌석으로 오든, 만났다가 공연이 끝나기 전에 각자의 좌석으로 돌아가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