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112)

<71화>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 해도 설마 키리온이 법황에게 뭔가 수를 쓴 건 아닌가 싶어 새틴은 속으로 애가 탔다.

“내가 성하를 뵈었던 날에 성하께서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고 말씀하셨지. 그 연세가 되면 건강이 하루 사이에도 나빠질 수 있는가 봐.”

그래, 그럴 것이다. 그러기를 바랐다. 키리온이 가족에게까지 악심을 갖는 사람은 아니기를 바랐다.

근래의 하루하루는 꿈 같았다. 현실성이 있는 듯 없는 듯 모호했다.

세상은 여느 날과 같이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살롱에 모여 수다를 떨었고 상점가에서 물건을 사고팔았으며 신전에서 기도를 올렸다.

변하지 않은 일상은 분명 고마워야 할 일인데, 새틴은 도리어 낯설었다. 온 칼데브란카에서 저만 이방인인 듯했다.

신탁이 조작되었다고 해도 천지가 개벽하지는 않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풍전야처럼 느껴져 새틴은 밤마다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틴, 잠이 안 와?”

새틴이 자다 말고 뒤척이자 귀가 밝은 루블리에도 덩달아 잠에서 깼다.

그만 일어나고 싶은데 억지로 누워 있기도 곤혹이고, 같이 잠을 설치는 루블리에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새틴은 슬그머니 제안했다.

“우리 당분간 침실 따로 쓸까?”

새틴을 다독이며 다시 잠을 청하던 루블리에가 곧장 정색했다.

“왜 그런 소리를 해?”

“나 때문에 너까지 방해를 받나 싶어서.”

“쓸데없는 걱정이야. 난 너 없으면 아예 못 자.”

그는 새틴의 우려를 딱 잘라 끊었다. 새틴은 이마를 루블리에의 가슴에 꼭 붙이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느리게 뛰는 그의 심장박동에 따라 호흡을 정돈하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새틴, 걱정이라도 있어?”

“……아니.”

새틴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입은 루블리에를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머리는 계속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칼데브란카가 아직 무탈한 데에는 아마 법황이 명목상으로나마 성좌를 지키고 있는 덕분이겠지.

실무는 키리온에게 넘어갔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법황의 대리일 뿐이다.

그녀는 법황이 오래 버티기를 기도했다.

새틴은 짧은 메모에 날짜와 장소, 시간만 기입해 기요른에게 보냈다.

기요른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가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신탁이 바꿔치기 당했다는 제보를 한 중요한 증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데다 새틴에게서도 만나자는 연락이 통 없으니 홀로 속을 끓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사람 없는 장소를 찾는다고 해도 새틴…….”

기요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공동묘지는 너무하지 않아?”

죽은 사람들의 묘비가 드문드문 세워진 묘지는 한낮이라도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장소였다.

심지어 겨울이라는 계절과도 맞닿아 색마저 희끄무레 바래어 있었다.

“결혼식과 장례식 말고 유일하게 베일을 써도 되는 장소가 달리 없잖아?”

얼굴을 가리기에는 베일이 가장 편하다.

하나 또 신부가 되어 웨딩드레스에 베일을 뒤집어쓸 순 없으니 차선책으로 올 장소는 묘지뿐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기요른은 어깨를 떨었다.

“귀신 나오겠어.”

“귀신이 뭐가 무섭다고.”

“맞아, 내가 잊고 있었네. 넌 원래 별로 겁이 없는 편이었어.”

악령이 나타나자 놈을 잡겠다고 새틴이 방안에서 홀로 대치했던 사건은 한때 유명했다.

기요른의 귀에도 그 이야기가 들어갔다.

악령에도 겁을 안 낸 새틴이 고작 귀신 따위에 겁을 먹을 리 없다.

기요른이 씁쓸하게 인정했다. 법황청 안에서 벌어진 비밀이 더 무겁고 무서우니 새틴이 그를 만나 준 것이다.

“우리가 평범한 친구 사이였으면 남들처럼 카페에서 만나도 의심을 안 살 텐데……. 그렇지?”

도무지 후회를 지울 방법이 없었다.

기요른의 어조에 회한이 어렸다. 새틴과 함부로 이별하는 게 아니었다.

조금 더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제대로 마무리했어야 했다.

파혼을 하더라도 지나간 추억이 퇴색되지는 않게끔.

뜻이 맞지 않아 헤어졌지만 그래도 하나의 인연으로 서로를 간직하게끔.

조용히, 아름답게, 안전하게 잘 헤어지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그랬으면 새틴의 마음에 단 얼마만이라도 돌아갈 여지가 남았을 텐데.

“친구 같은 소리 하네. 내가 너랑 왜 친구를 하겠어? 신탁의 위조를 밝힐 방법만 알아내면 난 너 안 봐. 신탁 얘기나 해.”

친구를 주장하고 싶어도 새틴이 세우는 가시가 날카로워 쉽지 않았다. 기요른은 찔끔해서 가라앉았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묘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새틴과 기요른은 이런저런 상황을 추측했다.

하나 단서가 너무 적어 추측은 번번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다.

베르비움의 종적이 묘연하니 새틴과 기요른에게는 도움을 줄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반면 키리온에게는 편을 드는 사람이 많아 부담감이 컸다.

새틴은 불쑥불쑥 키리온의 얼굴을 되새겼다.

활달한 미소를 품고 루블리에에게 다가오던 대주교는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법한 멋진 사람이었다.

그 얼굴에 이토록 음험한 욕망이 숨어 있으리라고, 과연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원래 그럴 수 있는 사람인 건가.

아니면 자리가 사람을 바꾼 건가.

“증거를 찾을 순 없을까?”

막막함을 이기지 못한 기요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새틴은 미간을 좁히고 같이 궁리를 시작하다가 또 깜짝 놀랐다. 이 역시 루블리에가 마뜩잖은 순간마다 보였던 습관 중 하나였다.

얼굴은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행동은 자꾸 닮아간다. 새틴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꼭꼭 눌러 폈다.

“아직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증거라면 가장 확실한 게 하나 있긴 해.”

“그게 뭔데?”

“진짜 신탁.”

어차피 베일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새틴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예하께서 가짜 신탁을 만들어서 내놓았다면, 그 전에 사제가 신전에서 가져간 진짜 신탁은 어디 있을까?”

기요른이 화들짝 놀라며 감탄했다.

“아…….”

신을 모시는 국가이기에 칼데브란카에서 신탁이 갖는 의미는 크다.

아무리 키리온일지라도 신전에서 나온 진짜 신탁을 그리 쉽게 처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새틴이 던진 화두에 골몰하느라 누군가의 그림자가 묘지 입구에 잠시 어른거렸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 * *

“요즘 그대의 전 애인이 새틴 부인과 신나게 밀회를 하고 있다더군.”

키리온은 비스듬히 시선을 들었다. 입매를 기다랗게 늘이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분은 다른 사람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하거든요.”

딜라일라의 대답은 심상했다. 기요른의 움직임은 일찌감치 예상했던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지만 강단이 없다. 유약한 남자라 늘 기댈 사람을 필요로 했다.

“뭐, 익히 알고 있긴 했지. 아카데미에서도 새틴 부인이 그를 꼼꼼하게 챙겼으니 말이오. 동갑내기인데 한쪽은 까랑까랑하고 한쪽은 조용하니 의외로 그게 어울렸지. 둘 다 까랑까랑했으면 싸움이 잦았을 테고, 둘 다 조용하면 갑갑해서 못 지낼 것인데 희한하게 균형이 맞았거든.”

“기요른님은 태중 정혼을 맺었다고 했었지요. 어릴 때부터 약혼녀가 돌봤으니 한편으로는 심약한 성격으로 자란 게 이해되기도 하네요.”

혀를 차던 키리온이 얼굴을 찡그렸다.

“차라리 그 둘이 결혼했으면 지금쯤 골머리 앓을 일이 하나는 줄었겠지.”

‘골머리 앓을 일’이라고 냉정하게 표현한 키리온의 속내는, 정확하게 루블리에를 겨냥해 있었다. 새틴과 기요른을 처리할 방법도 마땅치 않은 와중에 루블리에를 새틴과 찢어놓아야 하니 골치가 지끈거렸다.

“중간에 끼어들었던 제가 나빴군요.”

딜라일라의 태도에는 한때 정부로 지냈던 남자에 대한 한 조각의 연민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땐 저도 나름대로 살길이 급했거든요. 그나저나 신기하지 않나요? 예하께서 말씀하시다시피 새틴 부인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고 팔라딘 또한 제가 보기론 절대 누구에게 밀릴 사람이 아니던데, 은근히 잡음 없이 살고 있잖아요?”

“루브가 다 지고 들어갈 거요. 그 난리를 치르고 결혼했으니 과연 그가 어디 부인 앞에서 고집이나 세워볼까.”

딜라일라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언뜻 부러운 듯했으나 한숨 속에는 은근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참 복 많은 여자가 다 있어요.”

“그 복이 우리에겐 걸림돌이지.”

키리온도 어깨를 으쓱하며 동의했다. 친구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그에게는 불행으로 작용했다.

“여자는 하나에 남자는 둘이라…….”

새틴, 루블리에, 기요른.

셋 다 나무랄 데 없는 명문가 출신의 선남선녀들이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그들을 헤아리던 딜라일라가 불현듯 탄성을 질렀다.

“어머나, 이거 괜찮은 소재 아닌가요?”

교활한 빛을 품은 눈이 독기를 띠고 반짝거렸다.

“여기 남자가 하나 있어요. 약혼녀가 있었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생겨 파혼을 했죠. 전 약혼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요. 그러나 그가 사랑했던 정부는 남자를 버렸어요.”

“그건 모두가 아는 스캔들 내용이지 않나.”

“그렇죠. 하지만 극본은 이제부터 시작해요. 남자는 전 약혼녀를 그리워해요. 사람은 보통 자신이 놓친 기회를 두고두고 아쉬워하며 되돌리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요. 전 약혼녀는 다른 남자와 홧김에 결혼을 했지만, 그 여자의 모든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은 이 남자였죠. 화는 났어도 남자가 진심으로 빌며 사과하자 그녀는 오랫동안 추억을 함께했던 전 약혼자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딱 좋지 않나요?”

타고난 배우의 몸짓과 대사, 표정을 섞은 극본이 열띠게 뻗어 나갔다. 키리온은 짝짝짝 천천히 박수를 울렸다.

“현실과 상상이 적절히 섞여 있으니 믿기도 쉽군.”

“어때요?”

“그대는 배우 말고 작가를 해야겠어. 아주 환상적이야. 그리하여 기요른이 새틴 부인과 정을 통했다.”

“완전한 거짓말이 아닐지도 몰라요. 실제로 기요른님은 결혼을 물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으실걸요. 제가 거기서 지낼 적에도, 셀 위오 가문은 기요른님에게 네 실수를 만회하라고 계속 강압해 왔어요. 전 약혼녀와의 재결합은 셀 위오 가문에서 바라는 최선의 결말이었을 거고요. 기요른님이 매달리고 있겠죠.”

“이왕 스캔들로 시작했으니 스캔들로 끝나는 것도 훌륭하지. 다만 델 마레 가문은 이 소문을 부정할 거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믿어요. 가십에 목이 마르니까요. 제 스캔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를 보세요. 그리고 우리 목적은 델 마레 가문이 아니죠.”

“루브지. 루브만 이 스캔들을 믿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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