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어떡해? 이제 어쩌지?”
“……더 알아봐야지.”
“그래도 괜찮은 거지, 우리?”
기요른이 ‘우리’라는 단어로 새틴과 자신을 엮었다.
하필 한배에 탄 사람이 기요른이라니. 한심스러웠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난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 해. 루브에게 말도 없이 나왔어.”
루블리에가 퇴근하기 전에 집에 도착해 있으려면 갈 길을 서둘러야 했다.
새틴이 떠날 기미를 비추자 기요른이 다급히 마차의 창문께를 손으로 잡았다.
“새틴, 그럼 우린?”
“나중에. 날짜 봐서 다시 연락하자.”
그제야 다소간 마음이 놓였는지 기요른이 손을 뗐다. 새틴은 마부를 보내고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기요른 앞에서는 태연하게 굴었으나 심란한 속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아버지를 비롯한 다섯 파수꾼 가문 가주들이 목격한 신탁의 진위를 어떤 방법으로 판별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려도 소용없을 것이다.
신탁의 조작.
실은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칼데브란카 신성 교국은 신탁에 대한 국민의 맹목적인 믿음이 이백 년을 지탱해 온 나라였다.
당연히 지금 벌어진 사태는 상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사고였다.
설마 법황의 핏줄이 그 신탁을 부정하는 날이 오다니.
……정말일까.
이백 년이 그만큼 긴 시간인 건가.
‘겨우’ 이백 년과 ‘무려’ 이백 년 사이에서 새틴은 한참을 방황했다.
사람의 마음에 불길한 변화가 깃들기에, 이백 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다.
* * *
키리온은 다 읽은 편지에 불을 붙였다.
얇은 종이는 한 자밤도 되지 않는 뽀얀 재를 남기고 사라졌다.
“베르비움 사제를 찾아 신전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더군.”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네요. 유감이에요. 그래도 역시 사람을 붙이길 잘했어요.”
키리온은 여상스러운 어조로 유감을 말하는 딜라일라를 흥미롭게 주시했다.
같은 편에 서기로 마음을 먹은 날부터 두 사람의 유대는 예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딜라일라가 물었다.
“신전엔 누가 왔나요? 기요른님?”
“목격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방문객의 옷차림은 잔잔하나 재질이 아주 고급스러웠고 목에는 화려한 목걸이를 걸었다 하오. 모자 아래로 은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는군. 유난히 창백한 피부와 녹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라 했소.”
“색이 딱 델 마레 가문의 특징이군요. 독특한 머리 색과 하얀 피부 때문에 델 마레 혈족은 눈에 잘 띄어요.”
단순히 저만한 인상착의로 직계와 방계가 줄기줄기 뻗어 있는 유명 가문 사람 중 한 사람을 특정 짓기는 어려웠으나, 키리온과 딜라일라는 베르비움이 신분을 위장하고 찾아갔던 사람의 정체를 이미 뒤쫓아 알고 있었다.
“사제는 기요른과 접촉했는데 신전으로 찾아온 사람은 델 마레 가문의 여자라……. 새틴 부인이겠지.”
기요른과 연관이 있는 델 마레 가문의 사람이라면 정체는 불을 보듯 훤하다. 기요른은 새틴을 만났다. 성향으로 미루어 보아 그럴 만한 남자이기도 했다.
“결론이 너무 뻔하네요.”
“결론은 뻔해도 우리는 머리가 아파지게 되었지. 그녀는 루브의 부인이오. 게다가 기요른 또한 셀 위오 가의 아들이고. 사제와는 달라서 그들에겐 함부로 손을 쓸 순 없소. 두 사람 뒤에는 어마어마한 가문이 버티고 있으니 말이오.”
기요른은 막내아들이라 집안에서 중요도가 낮다 쳐도 새틴은 외동딸이다. 델 마레는 필사적으로 딸을 보호할 터였다.
그리고 든든한 집안을 믿기에 새틴과 기요른도 겁을 잃고 신탁의 뒷조사에 뛰어들었으리라.
키리온은 딱 잘라 말했다.
“루브에게 피해가 가면 안 돼.”
딜라일라는 잠시 입술을 도도록하게 움츠렸다가 금방 이성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하께서는 친우를 무척이나 아끼시지요.”
“유일한 친우이기도 하거니와, 그는 내 검이오. 칼데브란카를 통치하려면 나에겐 반드시 팔라딘이 필요해.”
“네, 알고 있어요. 일단은 팔라딘과 그 부인을 떨어뜨려 놔야 하겠네요.”
키리온이 보일 듯 말 듯 한 묘한 미소를 품었다.
“뭔가 떠오른 게 있나? 어떤 방식이지?”
“저는 저번에 건국 기념일에서 팔라딘과 새틴 부인을 봤어요. 누가 봐도 그 둘의 관계는 팔라딘 쪽으로 기울어 있었죠. 공개적으로 애정 행각을 보일 만큼 팔라딘의 감정은 의심할 구석이 없었는데, 새틴 부인은 묘하게 무덤덤했어요.”
기요른은 딜라일라에게 새틴이 루블리에를 싫어했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딜라일라의 판단으로 당시 그 이야기는 제법 신빙성이 있었다.
“맞소. 루브가 부인을 오랫동안 짝사랑했지. 나는 그래서 걱정이오. 그가 제 부인을 너무 아끼거든.”
“저는 오히려 그게 약점이라 생각해요. 분명 불안한 지점이 있을 거예요. 저는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아요. 좀 지켜봐요. 반드시 빈틈이 나올 테니까요. 게다가 예하께서 팔라딘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팔라딘도 예하를 받들잖아요.”
“그렇지. 그와 내가 알고 지낸 지도 거의 십 년이오. 부인에 비해 넘치면 넘쳤지 결코 부족하지 않아.”
여유만만하게 단언한 키리온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동작과 표정에 자신감이 넘치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짜증이 어려 있었다.
“하나 틀어막으니 다른 데서 터지기 시작하는군. 과연 어디까지 막아야 하고 또 어디까지 터져나갈지 궁금한걸. 그대는 각오가 되었소?”
“물론이에요. 예하의 곁에 남기로 결정한 그날부터 저는 마음을 굳게 먹었답니다.”
사람의 손으로 신탁을 조작한 이상 물러날 장소는 사라졌다.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치워야 했다. 이젠 어떻게든 끝까지 갈 뿐이다.
* * *
“루브. 네 주변 사람 중 하나가 엄청나게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거나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떡할래?”
루블리에는 그를 등지고 누워 있는 아내의 하얀 어깨를 바라보았다. 머리맡에 둔 은은한 등불이 새틴의 뒷모습을 발그스름히 밝히고 있었다.
“새틴?”
숨소리가 점차 고요히 가라앉기에 잠든 줄 알았더니 느닷없이 엉뚱한 질문을 던져왔다. 루블리에는 상체를 일으켜 새틴의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침대가 오르내리는 기척에 잠이 달아났는지 새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루블리에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건 왜 물어봐?”
“그냥 궁금해서.”
“예를 들면 누가?”
새틴은 한참 침묵에 잠겨 있다가 입을 뗐다.
“글쎄. 아주 소중한 사람 누군가가?”
이름이 알려진 까닭에 이럭저럭 알고 지내는 사람이야 많지만 아주 소중한 사람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직계 가족과 친구, 아내뿐이다. 명수로 세고자 한다면 열 손가락 안에 전부 세고도 남을 정도였다.
루블리에는 제 사람들의 면면을 헤아려보고선 편안해졌다. 이 중에선 말썽을 부릴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래왔었다.
“얼마나 큰 잘못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어떤 잘못인데?”
“……음.”
새틴은 베갯잇에 뺨을 깊이 눌렀다. 진담과 농담의 애매한 줄다리기는 역시 쉽지 않았다.
키리온이 저지른 짓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이 길어졌다. 신탁의 조작은 칼데브란카의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태였다.
“인륜을 거슬렀다 할 정도의 일?”
루블리에는 가볍게 웃으면서 부정했다.
“내 소중한 사람들 중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은 없어.”
“혹시 모르잖아. 네가 그럴 리 없다고 믿는 사람 중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나올지도.”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엔 못 믿겠는데.”
역시 증거가 필요하겠구나.
새틴도 루블리에가 아무 증거 없이 저를 믿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루블리에는 키리온의 친구이자 신하였다. 심지어 인연이 이어진 시기를 고려하면 키리온 쪽이 훨씬 더 오래되었다.
쌓인 세월에서 오는 신뢰가 있을 터였다. 키리온은 물증 하나 없이 말 한마디로 건드릴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키리온의 정당성을 믿을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남자인 까닭이다.
법황까지 루블리에를 불러 일부러 키리온을 부탁했다 하지 않았던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신중해야 했다. 루블리에는 눈으로 보아야만 믿는 기사였다.
기사는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직하게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다.
그 대상이 주군이든, 가족이든, 사랑하는 부인이든 간에.
“루브. 너는 참 좋은 사람이야.”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은 다 믿음직한 사람들이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신뢰해주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너도 좋은 사람이야, 새틴.”
건넨 칭찬이 같은 칭찬으로 돌아왔다.
하나 이 올곧은 믿음이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그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키리온을 떠올리면 루블리에에게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새틴은 대답 대신 루블리에의 팔에 머리를 뉘고 곧 잠이 드는 척 눈을 감아버렸다.
별 소득을 얻지 못한 채로 시간은 냉담하게 지나가기만 했다.
베르비움 사제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넌지시 신전 사제들에게 말을 걸어 베르비움의 고향이 어디인지 알아낸 새틴은 베르비움을 찾아보라고 심부름꾼을 보내기도 했지만 별로 큰 기대는 없었다.
상상 속에서 베르비움은 매우 높은 확률로 이미 죽었거나, 죽음에 준하는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가 무사하다면 기요른에게 진작 연락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새틴은 남몰래 다른 조치도 취해 두었다.
그러느라 새틴은 예전과 같은 빈도로 본가를 들락거렸다. 사람 쓰는 일은 아무래도 신혼집보다는 본가가 편했다.
루블리에에게는 가끔 지나가는 말로 법황의 안부를 물었다.
법황의 이야기가 나오면 루블리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직 좋은 소식은 없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쁜 소식 또한 없었다.
법황은 하루의 대부분을 약 기운으로 잠든 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건국 기념일 때만 해도 부축을 받으면 거동은 가능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상황이 나빠지기도 하는 걸까?”
의혹의 불씨가 피어나기 시작하니, 자연스레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