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12)

<69화>

미처 다는 모르고 왔을 것이다. 유약하기 짝이 없는 성미로 그저 황급히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떠올린다는 게 아마 제가 되었으리라.

전 약혼녀에게 불어닥칠 풍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테다.

“난 루블리에의 부인으로 고작 반년 살았어.”

그마저도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한 시간을 꼽아보면 얼마 안 됐다.

그러나 새틴은 기요른의 앞에서 이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블리에는 키리온 예하와 10년 가까이 절친한 친구로 지냈지. 너도 알잖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우정을 누군가와 나누기 힘들어. 평생을 통틀어 단 한 사람만 만나더라도 성공한 거야. 너와 나조차 성공하지 못한 일이고.”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부터 영원할 줄 알았던 일상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을, 새틴은 여전히 기억했다.

지금 여기가 루블리에의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지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새틴은 오싹해졌다.

이 집, 이 풍경, 이 시간이 칼날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 남편의 유일한 지기야. 그런데 너는 지금 내 남편이 지켜온 오랜 신의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한 거야. 나에게…… 그 일을 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거라고.”

루블리에가 저를 믿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믿고 따르던 누군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경험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새틴이 경험자였다.

부인을 선택할 것인가. 친구를 선택할 것인가.

최종적으로 루블리에는 그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아…….”

그제야 기요른이 먹힌 듯한 신음을 삼켰다.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한 낌새였다. 제 일이 아니었으니 그럴 테지. 새틴은 싸느랗게 표정을 지웠다.

한참 만에 그가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5일 뒤에 내게 처음 이 비밀을 폭로했던 사제를 다시 만나기로 했어. 그날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나도 그냥 묻을게. 이 신탁은 없는 일로 하고 잊어버리자.”

새틴은 야멸치게 쏘아붙였다.

“넌 진짜, 진짜 끝까지 나쁜 놈이야.”

결혼식을 준비하면서도 제 의견 따위는 없더니만, 이번에도 끝까지 선택을 제 몫으로 떠밀어놨다.

5일. 기요른이 말한 유예 기간이었다. 그러나 새틴은 이미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다.

* * *

사람들은 보통 고민할 시간이 며칠 주어지면 그동안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릴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결정은 제안을 듣는 순간 내려진다. 처음 정해진 결정이 뒤집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본능적으로 후회가 적게 남으리라 여겨지는 방향을 택하기 때문이다.

새틴은 모자챙을 가다듬었다. 머리를 둘둘 말아 올리고 모자를 쓴 후 가진 드레스들 중에서 가장 단조로운 옷을 골랐다. 목걸이를 빼고는 장신구도 일체 하지 않았다.

문가를 서성이는 가느다란 그림자가 얼핏 비쳤다.

기요른일 것이다. 새틴은 마차에 앉아 그 그림자를 일별했다.

이쪽을 힐끗대는 기요른의 시선이 느껴졌다. 집 근처를 서성이는 낯선 마차를 보고도 기요른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찾아가겠다고 편지를 보내 약속하지 않았지만, 기요른이라면 아마 그녀가 오리라 짐작하고도 남았을 테다.

그러나 새틴은 마차에서 내려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푹신하고 편안한 가문의 마차만 타다가 평범한 삯마차를 타니 등과 허리가 욱신거렸다.

의자는 딱딱했고 높이도 다소 큰 키에 맞춰져 있어서 오래 앉아 있기가 무척 불편했다.

“시간을 좀 정확히 정할 것이지…….”

기요른은 날짜만 정했을 뿐, 시간은 확실하게 약속해 두지 않았다.

마무리가 항상 엉성하다 싶으면서도 오기로 한 사제가 시간까지 맞추기에는 퍽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새틴은 불평을 꾹 누르고 싸구려 의자 위에서 꿋꿋하게 버텼다.

마차 밖에서 말을 어르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틴은 웃돈을 주고 마부와 그의 마차를 하루 통째로 고용했다.

델 마레에도 마부와 마차가 있었으나 새틴은 이 일을 아직 집안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기요른의 말만 믿고 신탁에 관한 비밀을 터뜨리기에 이 사건은 무척이나 위험부담이 컸다.

무엇보다 저 자신도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두 갈래의 마음이 치열하게 갈등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 평화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가려야만 한다는 마음이 양쪽에서 으르렁거렸다.

루블리에의 부인으로는 반년을 살았다. 하나 파수꾼 가문의 딸로는 이십일 년을 살았다.

델 마레는 장차 새틴이 짊어지고 갈 가문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남들보다 더한 부유와 명예를 누리는 데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배웠다.

그 책임이 새틴의 다리를 움직이게끔 했다.

새틴은 조그만 창을 열고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이 근처를 지나갔지만 석공의 작업복을 입은 남자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요른도 초조한지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서너 시간은 흐른 듯싶었다.

마부는 한자리에 마차를 세워 놓고 꼼짝도 하지 않는 새틴의 목적이 궁금한 눈치였으나 넘치도록 준 품삯 때문에 호기심을 꾹 봉하고 말만 얼러댔다.

좁은 마차 안에 갇혀 기우는 그림자로 시간을 하염없이 헤아리던 새틴은 견디고 견디다 끝내 기요른에게 눈짓을 보냈다.

기요른이 슬금슬금 마차 근처로 다가왔다. 새틴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기요른의 얼굴에도 곤란이 가득했다.

“글쎄……. 사정이 생겨서 늦어지는 거 아닐까?”

“아무 소식 못 받았어?”

“못 받았어.”

기약도 없이 하루 종일을 여기 묶여 있을 순 없는 일이다. 새틴은 눈빛으로 기요른을 밀어냈다.

“너 여기서 기다려.”

“어디 가게?”

“신전. 여기서 신전으로 가는 길을 돌아봐야겠어.”

“그럼 나도 같이 가.”

“안 돼. 길이 어긋나면 어떡할 건데? 넌 그냥 여기서 기다려. 신전은 나 혼자 다녀올 테니.”

길이 어긋나도 문제지만 좁고 밀폐된 장소에 둘이 있기도 싫었다.

어차피 이름과 인상착의는 대충 들어두었다.

“대신전으로 가죠.”

새틴은 마부에게 새로운 목적지를 알리고 마차의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기요른은 새틴의 강경한 태도에 마차에 오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출발 알림은 새틴보다는 쭈뼛거리는 기요른을 위해서였다.

조바심에 가득 차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는 기요른을 뒤에 남겨 두고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틴의 지시에 따라 마부는 말을 천천히 몰았다. 그녀는 작은 창문 너머로 사람들의 얼굴을 꼼꼼하게 훑었다. 그러나 사제로 보이는 사람은 지나가지 않았다.

아무런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마차는 신전에 도착했다. 새틴은 잠시 고민하다 마차에서 내렸다.

신전의 입구는 사제나, 신전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사람만 통과할 수 있었다. 당연히 새틴은 경비를 서고 있는 사제들에게 제지당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베르비움 사제님을 좀 뵐 수 있나요?”

신전의 사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베르비움 형제님이요?”

“네. 안에 계신가요?”

“누구신데, 무슨 일로 형제님을 찾으십니까?”

“평범한 사람이 신의 자식을 찾는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어요. 그분께서 내려주시는 기도가 필요해서죠.”

“이곳은 대신전입니다. 그런 용무라면 소신전을 방문해도 충분하실 텐데요.”

“결혼을 앞두고 성사(聖事)를 보고 싶어요. 인생의 대사잖아요? 베르비움 사제님께서는 진심으로 사람들을 축원해 주시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런 분께 받아야 제 결혼도 오래오래 행복할 것 같아서요.”

새틴은 적당한 구실을 둘러댔다. 탄생과 결혼, 죽음은 인생의 손꼽히는 대사들이다.

중대사를 앞둔 사람들은 웃돈을 얹거나 신전에 기부를 해서라도 대신전의 사제들에게서 성사를 받길 바랐다.

종종 있는 경우라 사제도 새틴의 핑계에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신전에 소속된 모든 사제들은 진심으로 신을 모시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르비움 형제님은 현재 성사가 불가능하니,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다면 다른 형제님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왜 불가능해요? 지금 안 계신가요?”

다른 사제를 권하는 품새가 수상했다. 새틴이 재우쳐 묻자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향에 뭔가 일이 생겼다고 했나. 하여간 어제부터 부재중입니다.”

“그렇군요. 하면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귀환 날짜까지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알겠어요. 다음에 올게요.”

기분이 몹시 싸했다.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우면서도 만나기로 약속했던 기요른에게는 한 줄의 연락조차 보내지 않았다……? 평범한 약속이 아닌데도?

더구나 기요른은 사제에게 사람을 하나 더 데리고 오겠다고도 했다.

혼자만의 약속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걸까.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은 고요했다.

새틴은 창문을 닫고 마차의 벽면에 옆머리를 기댔다. 바퀴가 퉁퉁 흔들리는 구간마다 머리가 같이 울려 어지러웠다.

아무리 다른 가능성을 점치려 해도 결론은 단둘이었다. 사제가 기요른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거나, 혹은 입막음을 당했거나.

이 사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기요른이 대체 제게 무슨 사고를 몰고 왔는지 새삼 오싹해졌다.

기요른은 여전히 셀 위오 가문의 저택 근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새틴의 마차를 맞닥뜨린 기요른의 표정에 반가움이 스몄다. 새틴은 기요른의 옆에 마차를 세웠다.

“베르비움 사제가 사라졌어.”

새틴이 가져온 첫 소식에 기요른이 경악성을 냈다.

“뭐?”

“쉿.”

새틴은 재빨리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자리를 비웠고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데, 진짜일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

새틴이 느낀 대로 미묘하게 후자에 강세가 실렸다. 베르비움의 부재는 여러모로 꺼림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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