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그런데 진실이 감춰지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키리온 예하를 상대로 제가 감히 무얼 어쩔 수 있겠습니까? 다만 키리온 예하께서 법황의 성좌에 오르시더라도, 그저 누군가 원래 그 자리가 그분의 자리가 아니었다는 진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기요른은 잠시간 주저하다 되물었다.
“조작된 신탁이…… 칼데브란카에 나쁘겠습니까? 이게 더…… 낫지는 않겠습니까? 오히려 비탈리스 예하께서 신탁에 올랐다면 모두가 의문을 제기했을 겁니다.”
“모르겠습니다. 기요른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신다면 그 판단이 아마 옳지 않을까 합니다.”
“제 판단이 아닙니다. 저도 정말 모르겠어서 여쭤보았습니다. ……잠시만요, 잠시만. 성함이 베르…….”
“제 이름은 베르비움입니다.”
“예, 베르비움 사제님. 제가 이 이야기를 같이 논의해도 될 만한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오 일 뒤 이 시간에 여기로 다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베르비움은 불안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둘은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모자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린 사제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기요른은 그제야 멈추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마차를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신탁이 중간에서 바뀌었다고?
원래 신탁을 받은 사람이 비탈리스였다고?
왜?
이 중대한 사안을 함께 의논할 만한 사람은 지금으로선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새틴.
아카데미에서 어려운 문제를 받으면 그는 늘 새틴과 머리를 맞대고 답을 풀었다.
카 딜론, 얀 실럿, 콴 테온. 세 가문이 키리온을 지지한다고 해도 델 마레는 아직 입장이 확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델 마레야말로 충성의 델 마레 아니던가.
델 마레는 적법한 법황에게 가장 깊은 충성을 바친다는 자부심이 있는 곳이다.
“도련님?”
마부가 기요른을 걱정스레 돌아보았다.
“새틴에게로…… 가자.”
반드시 새틴을 봐야만 했다. 오랜 친구이자 약혼녀에 대한 그리움과, 베르비움이 전달한 진실의 공포까지 합쳐진 탓에 기요른은 새틴의 이름만 되뇌었다.
오직 새틴만이 절실했다.
* * *
새틴은 사용인의 부름을 듣고서 어이가 없어 눈만 커다랗게 떴다.
“누구라고?”
“셀 위오 가문에서 오셨습니다. 기요른님이요.”
사용인이 손님이 왔다는 용건을 전달했을 때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사람 사는 집에 손님의 방문은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
한데 만나자는 약속을 한 사람이 없어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통 반갑지 않은 인물의 이름이 등장하고야 말았다.
새틴은 냉랭하게 대꾸했다.
“만날 마음 없어. 돌아가라고 해.”
기요른 때문에 본가의 방문도 최대한 줄이고 있는 마당이다.
느닷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니 만나기 싫은 쪽에서 피해야 일상이 평화로웠다.
그러나 사용인은 난색을 표했다.
“급한 일이라고 마님을 꼭 뵈어야 한다고 그러셔서요.”
“무슨 급한 일?”
“글쎄요. 남의 입을 통할 순 없고 직접 말씀드려야 한다고……, 나오실 때까지 집 앞에서 기다리시겠답니다.”
새틴은 입을 딱 벌렸다.
사용인들도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한낱 사용인 신분으로 셀 위오의 도련님 상대로 취할 수 있는 행동에는 제약이 많았다.
새틴이 명한 ‘돌아가’도 에두르고 포장해 전하느라 머리가 아팠다.
결국은 동등한 신분인 새틴이나 루블리에가 직접 나서야 해결이 될 터였다.
“알겠어.”
새틴은 사용인들을 물리고 타박타박 걸어 나갔다.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말 그대로 기요른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러다 루블리에라도 마주쳤으면 가관이었겠다.
“……기.”
얼마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새틴은 그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기요른이 먼저 새틴을 발견했다.
“새틴!”
새틴을 주시하는 갈색 눈에 절박함이 그득 차올랐다.
성큼 다가선 그가 다짜고짜 새틴의 팔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중심이 휘청, 흔들리면서 새틴은 기요른에게 안긴 꼴이 됐다.
기함한 그녀는 곧장 기요른의 가슴을 밀치며 등을 곧추세웠다.
“미쳤니?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래?”
이쯤 되면 전 약혼녀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네 인생도 같이 망하자는 억하심정인가 싶었다.
새틴은 왈칵 성을 냈다.
“얻다가 손을 대!”
“……미안해, 내가 지금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기요른은 본능적으로 사과했다. 새틴은 기요른의 손을 확 뿌리치며 사태를 대강 짐작했다.
아마도 셀 위오 가에서 골칫덩이 막내아들에게 혼처라도 찾아왔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기요른에게 급한 사정이 생길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상황이 급박한데 날 찾아올 여유는 또 있나 봐?”
“그게, 새틴. ……큰일 났어.”
새틴은 눈도 깜짝 않고 받아쳤다.
“나에게 큰일은 네가 내고 있거든?”
기요른만 아니면 더없이 평안한 나날이었다.
최근 들어 그녀의 하루를 흐트러뜨리는 사람은 기요른뿐이었다.
그러나 기요른의 낯빛이 여느 때와 너무도 달랐다.
환자처럼 깡마르고 희푸른 혈색이야 이젠 익숙했지만, 얼굴 곳곳에 짙게 감돌고 있는 이질적인 긴장감은 낯설었다.
꼭 사고를 저지르기 직전의 사람 같았다.
“……새틴.”
기요른이 이름을 불렀다. 새틴은 괜히 불안해졌다.
“뭔데.”
묻자마자 후회했다. 들으면 안 될 말을 듣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신탁이…….”
“신탁?”
기요른의 입에서 뜬금없이 신탁이 튀어나왔다.
신탁이 내려졌고, 차기의 법황으로 키리온이 지목되었다는 결과는 새틴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법황청에서의 공표도 있었지만 델 마레에서도 신탁의 탁본을 확인했다는 전갈을 미리 받았다.
그런데 지금 신탁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굳이 찾아와 신탁을 첫 화제로 꺼내는지 의아했다.
“신탁이 왜?”
“신탁이 조작됐어.”
망설였다가는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할 것만 같아서 기요른은 단숨에 말을 쏟아냈다.
새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서지도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서 있던 그 자리에 못 박힌 그대로 멈춰 있을 뿐이었다.
새틴을 둘러싸고 있던 시간이 완전히 멎어버린 듯했다.
기요른은 차가운 공기를 오랫동안 마셨다. 냉기로 가슴을 식히고 싶었다.
그러나 숨을 쉬면 쉴수록 목이 더 깔깔해지기만 했다. 그는 어렵게 부연했다.
“어떻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도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냥 내가 들은 대로 전달한 거야. 신탁의 주인이…… 바뀌었어.”
멈추어 있던 시간의 마법이 풀렸다. 새틴은 휙 돌아섰다.
“무슨 헛소리를 하니?”
기요른이 새틴의 팔을 붙잡았다. 몸이 뒤로 휙 젖혀졌다.
손목을 죄는 체온의 불쾌감도 불쾌감이지만, 제 행동이 다른 사람에 의해 억제되는 감각은 그보다 훨씬 소름 돋았다.
새틴은 기요른을 쏘아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제발 좀 진지하게 들어줘! 내가 아무리…… 아무리 너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이런 문제로 너에게 거짓말을 하진 않아!”
알고 있다. 그래서 문제였다.
파리하게 질린 기요른의 안색, 바들바들 떨리는 동요만 봐도 기요른은 지금 솔직했다.
더구나 누가 신탁을 함부로 입에 담아가며 전 약혼자를 회유한단 말인가.
새틴은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다행히 나오면서 사용인들을 전부 물려두었다.
기요른도 마차를 저 멀리 세워 놓았다.
이 대화의 내용을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귀를 가릴 순 없어도 사람들의 눈마저 가릴 순 없다.
빨리 기요른을 내치고 헤어질 작정이었는데 기요른이 어디선가 가져온 소식이 하도 경천동지할 사안이라 새틴은 제 이성을 잡기 급급했다.
“신탁이 조작됐다고? 너는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래, 우선은 소문의 출처부터 알아야 했다.
“신전의 사제가 찾아와서 말했어.”
“너한테 왜?”
“진실을…… 차마 숨기고 살 수가 없다고. 누군가는 알아야만 한다면서. 얀 실럿 가와 콴 테온 가는 이미 키리온 예하의 편에 섰고 카 딜론 가와 너희도 유명한 우방 가문이니까 남은 곳은 중립인 우리 셀 위오밖에 없었다나 봐.”
“남들 보기엔 델 마레가 그렇게 느껴질 법도 하겠지. 틀린 소린 아니네.”
새틴이 루블리에와 결혼하기 전까지 델 마레는 오히려 셀 위오와 우호 노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결혼 이후로 과거는 싹 잊혔다.
새틴은 다섯 가문 중 진실을 믿어줄 만한 집안을 가려내느라 사제가 고민을 거듭한 흔적을 알아차렸다.
그 사람 입장에서 셀 위오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널 만나러 오는 내내 머리가 아파서 미치는 줄 알았어. 왜 하필 내가 선택됐는지, 너무나도 억울해. 나도 듣고 싶지 않았어. 대체 이게 뭐야? 진짜라면 이제 어떡해야 해? 새틴.”
기요른이 물었다. 새틴이 대답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다음 대의 법황은 키리온이야. 다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잖아. 새틴, 몰랐어?’
법황청에서 주최하는 행사의 호스트는 늘 키리온이었다.
새틴이 비탈리스의 지나친 배제를 두고 지적하자 루블리에는 저와 같이 말했다.
그는 키리온의 즉위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기에 새틴은 매우 교과서적인 반응을 했었다.
‘몰랐던 게 아니라, 신탁이 확실하게 내려오지 않은 이상 후계자가 정해졌다고 속단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두 분께 기회는 동등하게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정말 비탈리스가 신탁의 주인이 되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모두가 지나치게 키리온에게만 친화적인 태도를 보이고 비탈리스를 경원시하니 그녀 한 사람만이라도 둘째 대주교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새틴, 난 무서워…….”
기요른이 등을 떨었다. 당연히 무서울 일이다.
새틴은 법황청이 있을 방향을 아득하게 응시했다.
홀로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기에 사제가 기요른을 찾았고, 기요른은 저를 찾아왔을 터.
“네 말만 듣고 널 곧장 신뢰할 순 없어.”
“새틴.”
새틴은 무표정하게 기요른을 돌아보았다.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