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12)

<67화>

기요른은 외출할 채비를 마치고 셀 위오 본가를 나섰다.

일부러 시종을 딸리진 않았다.

마차를 끌고 오라 지시한 뒤 잠시 혼자 서서 마부를 기다리고 있는데, 낡은 작업복에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이 기요른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전형적인 석공의 차림새였다.

“기요른님.”

안개처럼 낮은 속삭임이 기요른을 건드렸다.

기요른은 그 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를 뻔했다.

“누, 누구십니까?”

남자는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제 얼굴을 완전히 내보였다.

얼굴을 보고 나서 기요른은 더 당황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는.

기요른의 경계심을 읽었는지 남자가 다급하게 소곤거렸다.

“무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중요한 문제로 긴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기요른은 남자가 연신 주위를 살피고 있다는 점을 눈치챘다.

잔뜩 긴장한 모양새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일단 되물었다. 하나 암만 돌이켜보아도 석공이 굳이 저를 찾아와 속닥거릴 까닭이 없었다.

집에서는 종종 큰돈을 들여 여러 종류의 사업을 벌이곤 했으나 기요른은 막내인 까닭에 가문의 자금 사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제 가문에서 뭔가 의뢰라도 했습니까?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만.”

일을 의뢰하고 대금 지불을 제대로 하지 않았나?

그런 용건이라면 남자는 기요른에게 와서 개인적으로 부탁할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그의 부모님을 만나야 했다.

“아닙니다.”

아니라 하니 더더욱 수상했다.

남자는 기요른이 제 옷차림을 유별나게 의식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서 옷깃을 어설프게 여몄다.

“이건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겁니다.”

다시금 보니 옷이 남자의 체격과는 영 맞지 않긴 했다.

남자는 중키의 평범한 체격인데 옷은 하도 커서, 전체적으로 품이 너덜거렸다.

상대는 진짜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째서죠?”

“기요른님. 혹시 이번에 내린 신탁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남자는 이런저런 예의를 차릴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왔다.

기요른은 남자를 흘끔흘끔 경계하면서도 아는 대로 대답했다.

“키리온 예하께서 신탁을 받으신 일 말입니까?”

때마침 셀 위오 가문의 마차가 준비되었다. 기요른은 남자에게 얼른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런 수상쩍은 만남은 기요른이 가장 불편해하는 종류 중 하나였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더구나 중요한 일이라면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셔야 할 듯합니다.”

“그 신탁은 거짓입니다.”

남자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기요른은 마차에 오르려다 말고 얼어붙었다.

남자는 커다란 마차의 옆면에 바짝 붙어 서서 자신의 모습을 숨긴 채로 다급히 용건을 이어갔다.

“신탁은 그 전에 내려졌습니다. 진짜 신탁을 받고도 키리온 예하께서는 입을 다무셨습니다. 저는 법황 성하께서 충격을 수습하시느라 공표에 시일이 걸린 줄 알았습니다만…… 얼마 전 신전으로 새로운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법황 성하께서 편찮으시니 신탁을 재확인하려 한다는. 그리고 지금의 신탁이 공표되었습니다.”

기요른은 저도 모르게 남자처럼 마차를 이용하여 제 모습을 가렸다.

다소 어중된 시간이라 셀 위오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이 없음에도 절로 그렇게 하게 되었다.

“대체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그런 말도 안 되는, 혹여나 말이 된다 하더라도 왜 제게 이런 위험천만한 비밀을 말씀하십니까?”

“제가 맨 처음 진짜 신탁을 가지고 법황청에 방문한 사제입니다.”

“증거는요? 증거가 있습니까?”

“제 이름은 베르비움입니다. 사제의 인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품 안에서 사제의 신분을 증명하는 인장을 꺼내 기요른에게 보여주었다.

기요른은 인장을 확인하고 돌려주었다.

베르비움의 신분은 확실했다.

베르비움은 인장을 받아 다시 목에 걸며 몸을 움찔 움츠렸다.

아무도 그의 몸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그는 시시때때로 바늘이 등을 쿡 찔러오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떨었다.

“가짜 신탁이 공표된 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많은 고민을 하다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떴더니 제 머리맡에는 촛농이 잔뜩 떨어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제 방에 들어와 절 밤새도록 지켜본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제 신전의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효과적이다.

의미는 뚜렷했다. 누군가 베르비움에게 입을 다물라고 협박한 셈이다.

“누가 그런 짓을…….”

반사적으로 반문하다 말고 기요른은 입을 다물었다.

사제의 이야기가 전부 진실이라는 전제하에 그런 짓을 꾸밀 사람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키리온. 신탁을 바꾸어 법황에 오르려는 남자.

기요른도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하도 작아 제 귀에도 들릴락 말락 할 정도였다.

“……지금은 안전하신 겁니까?”

“기회를 보아서 다른 이들의 눈을 따돌리고 나왔습니다. 제가 여기 와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장을 꺼냈다가 넣는 그 눈 깜짝할 찰나에 기요른은 베르비움의 작업복 안에 숨겨진 사제복을 발견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에는 모종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신분을 감출 옷을 구하고 신전을 빠져나오기까지 그는 나름대로 여러 준비를 했을 터였다.

워낙 예상 밖의 비밀이라 말문이 막혔다.

기요른은 초조하게 입술을 씹다가 재차 물었다.

“진짜로 신탁의 내용이 바꿔치기 되었습니까? 그럼 처음 신탁이 지시한 후계자가 설마?”

“예, 비탈리스 예하십니다.”

“대체 왜 그런…….”

“알 수가 없습니다.”

베르비움도 고개를 저었다.

“키리온 예하께서는 본디 신전 안에서도 인망이 두텁습니다. 반면 비탈리스 예하는 인망이 없습니다. 직위만 대주교셨을 뿐, 저희는 지금까지 모든 소통을 키리온 예하와만 해왔습니다. 하여 저 또한 당연히 키리온 예하께서 다음 대의 법황으로 즉위하실 줄 믿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비탈리스 예하께서 즉위하시면 지금까지의 체계가 무너지기 때문에 다들 반기지 않을 겁니다.”

비단 신전만 그럴까.

다섯 개의 파수꾼 가문을 포함해 칼데브란카 국민 전부가 같은 심정일 터였다.

기요른은 건국 기념일 행사 내내 이어졌던 장면을 기억 속에서 끌어냈다.

그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다들 키리온과 친분을 쌓으려 안달을 했다.

얀 실럿과 콴 테온의 가주도 키리온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기를 썼다.

반면 비탈리스에게는 접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새틴과 루블리에가 그와 대화를 나눈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보니 비탈리스와 몇 마디 사담을 하긴 했어도 기요른은 그에 대해 그리 호의적인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

베르비움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보탰다.

나름대로 침착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와중에도 애써 누르고 있는 공포와 한숨이 느껴졌다.

“아마 키리온 예하께서 신전 내에 협력할 사람을 찾는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셨을 겁니다. 그만큼 그분의 즉위가 당연하게 여겨져 왔으니까요. 저도 믿었습니다. 누군가 저를 밤새도록 지켜보았다는 공포 속에서도, 더하여 이런 사태가 벌어진 지금도 어째서 비탈리스 예하의 존함이 신탁에 올랐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원망스러운 상황이었다. 키리온이 사람들의 예상대로 신탁의 주인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누군가 겁에 질릴 일도 없이, 막중한 비밀에 짓눌릴 일도 없이, 모두들 익숙한 관계 속에서 편안하게 칼데브란카를 꾸려갔을 테니까.

기요른은 무의식중에 뒷걸음치려는 제 다리를 억지로 붙들었다.

“왜, 왜 하필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파수꾼 가문은 저 말고도 네 곳이나 더 있습니다. 저는 이만큼 큰 비밀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입니다.”

“얀 실럿 가과 콴 테온 가는 이미 키리온 예하의 편에 섰습니다. 두 가문은 신탁이 발표되던 날 가장 빠르게 축하 선물과 인사를 전달했습니다. 카 딜론 가는 오래전부터 키리온 예하의 최측근으로 유명합니다. 델 마레 가도 카 딜론 가와 결혼으로 맺어졌으니 아마 카 딜론 가와 뜻을 같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머리로는 중립의 셀 위오 가문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베르비움은 오늘 셀 위오 가문의 누군가가 집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고, 마침 새틴을 만나려던 기요른이 운 나쁘게 선택된 셈이었다.

차마 어떤 말도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기요른은 아찔함에 입술만 깨물었다.

베르비움이 죄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기요른님의 곤혹을 압니다. 저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신탁을 가지고 심부름한 일개 사제에 불과합니다. 하필 그날 선발된 사람이 어째서 저였는지, 내내 아뜩하기만 했습니다. 이 일을 어디에 털어놓고 싶어도 과연 신전의 누구를 믿어야 할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칼데브란카는 키리온에게 호의적이었다.

기요른은 베르비움이 굳이 신전 바깥의 사람을 선택한 이유를 머리로는 납득했다.

그저 머리로만 납득했다. 심장은 터져나가기 직전이었다. 이토록 무서울 수가 없었다.

“압니다. 저만 입을 다물면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사람들은 신탁이 순리대로 진행되었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더구나 제게는 신분 외의 증거가 없기에 이 사실을 평생 숨겨야 하는지 갈등했습니다만 그래도 이 세상의 누군가는 신탁이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실을 아는 것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는데도 말입니까? 도리어 사제님께서는 진실을 혼자만 알고 계시는 게…… 두렵지 않으십니까?”

“예, 두렵습니다.”

베르비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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