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12)

<66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는데 악령의 짓인지 신성 기사단이 와서 확인해주기를 바란다는 요청이 들어와서.”

새틴을 떠나고 싶지 않기로는 루블리에의 마음도 똑같았다.

그렇지만 신성 기사단은 법황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위치였다.

“직접 가야 해?”

“내가 발이 빠르니까 직접 다녀와 줬으면 한다고 키리온이 부탁하더군.”

“그럼 혼자 가는 거야?”

한혈마의 속도로 다녀온다면, 신성 기사단은 수도에 두고 루블리에 혼자 떠난다는 의미였다.

루블리에는 새틴을 폭 끌어안았다.

가슴에 얼굴을 묻는 새틴을 느끼며 그는 약속했다.

“금방 올게.”

“당연히 금방 와야지. 내가 기다리는데.”

위로를 나누고도 새틴은 루블리에에게 안겨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고 머리와 뺨을 가슴에 꼭 붙이고서 홀로 생각에 잠겼다.

루블리에는 새틴이 얼마든지 그렇게 있도록 기다렸다.

한참 뒤에 새틴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요즘 수도가 통 어수선하다. 저번에 아버지께서 법황청에 급히 불려갔다가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별일 아니었다고는 하셨지만…….”

법황의 승하와 성위(盛位) 계승은 보통의 사람들이 일생에 단 한 번, 어쩌다 많아야 두 번 겪는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아무래도 이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법황 성하께서 쇠약하시니 다들 긴장하고 있을 뿐이야.”

“너도 성하를 알현했어?”

“했지. 키리온을 잘 보필해달라고 말씀하셨어.”

새틴은 다시금 루블리에와 키리온 사이의 우정을 되새겼다.

법황이 일부러라도 불러 그런 당부를 남길 만한 사람은 루블리에 하나뿐이다.

평생을 법황청에 충성해야 하는 사람. 더불어 기꺼이 충성하고도 남을 남자.

루블리에가 지고 있는 이름의 무게가 그러했다.

“네가 웬만하면 수도를 안 비우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키리온은 효율을 고려한 거겠지.”

새틴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같은 날, 법황도 키리온을 불러 명령했다.

“카 딜론 경을 입성하게 해라.”

의도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차기 법황인 비탈리스를 부탁하려는 것이다.

공개적으로 후계자의 능력을 지녔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키리온이었기에, 비탈리스에겐 그의 부족한 능력에 힘을 보태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키리온은 짐작하지 못한 척 시치미를 뗐다.

“그는 무척 바쁩니다.”

“법황의 검이, 법황의 명령을 받들지 못할 정도로 바쁘냐?”

비위가 확 뒤집혔다. 그는 간신히 표정을 단속했다.

“잠시 일을…… 맡겨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대로 입성을 지시하겠습니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으나 법황이 직접 국무를 처리하고 있다면 즉각 알아차렸을 어설픈 분위기가 있었다.

애초에 구실을 만들어 루블리에를 보낸 사람이 키리온이었다.

법황의 건강이 위험한데 팔라딘이 수도를 비운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소리다.

하지만 키리온은 루블리에를 내보냈다.

신탁의 비밀을 외로이 품고서 친구의 눈을 마주하기 괴로웠던 까닭이었다.

하나 이는 눈앞의 법황에 비하면 작은 이유였다.

며칠 앓아눕긴 하겠으나 법황이 마음을 정리하면 루블리에를 불러들이리라고 키리온은 예상했다.

루블리에의 출장에는 이를 막으려는 목적이 제일 컸다.

“……그러냐.”

하지만 법황은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 보내고 있을 만큼 기력이 쇠해 있었다.

이렇게 사람을 하나 불러 만나고 나면 그 뒤로 한동안은 잠들어 부족한 기력을 보충해야 했다.

법황은 키리온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너도 일을 정리해 비탈리스에게 조금씩 인계하도록 해라. 처음부터 가르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예.”

법황은 잘생기고 잘난 첫째 아들을 흐릿한 시야로 올려다보았다.

그의 아들은 충실하게 그의 빈자리를 채워 왔다.

너무도 아까운 능력이었다.

너무도 아쉬운 인물이었다.

도대체 왜 신탁이 비탈리스를 점지했는지 같은 신탁을 받아 그 자리에 오른 법황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 신탁은 신탁이었다. 법황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키리온에게 하는 말이면서도 또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말이었다.

“신탁은 성별이나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오로지 이 나라를 위한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 그러하기에 신탁이다. 신탁이 곧 기준이다.”

신탁이 곧 기준이다.

그 쓰디쓴 소리를 씹어 삼키며 키리온은 딜라일라를 찾았다.

기요른을 배신하고 온 아름다운 프리마 돈나는 법황청에서 장밋빛 꿈에 부푼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키리온은 거친 걸음걸이 그대로 딜라일라에게 다가갔다.

“예하, 웬일이신가요? 차 한 잔 드릴까요? 아니면 저녁이니 술도 좋겠군요.”

이미 딜라일라는 저녁과 곁들여 마시기에 적당한 도수의 포도주 한 병을 열어 놓았다.

키리온이 매일 그녀를 찾는 건 아니었기에 저녁을 함께하자는 전갈이 오지 않는 이상 딜라일라는 혼자 저녁을 먹었다.

지금 차려진 상도 한사람분이었다. 하지만 부족한 음식은 채우면 그만이다.

딜라일라는 사람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키리온은 그녀를 제지하고서 붉은 입술 자국이 찍힌 술잔을 들어 단숨에 남은 포도주를 털어 넣었다.

그는 빈 잔을 딜라일라 쪽으로 내밀었다.

“한 잔 더.”

“목이 마르셨나 보네요.”

딜라일라는 태연하게 잔을 채웠다. 키리온은 그 술도 한 번에 들이켰다.

“더.”

그녀는 잠자코 키리온이 원하는 만큼 술을 따랐다.

처음에는 나랏일에 머리가 아프거나 갈증이 지독하게 심했구나, 했었다.

그러나 연거푸 마시던 키리온이 급기야 한 병을 모조리 비우자 딜라일라도 침착하게 대응하겠다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예하, 왜 그러세요?”

급하게 쏟아부은 술기운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맨정신이었다면 자존심에 꿀꺽꿀꺽 삼켰을 비밀이었으나, 술은 모든 일을 가능케 했다.

그는 술의 힘을 빌려 딜라일라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대는 그대 살길 찾으려면 빨리 짐을 싸는 편이 나을 거요.”

“……네?”

키리온은 조소했다.

“비탈리스에게 신탁이 내렸소.”

“뭐라고요?”

그는 법황의 침실에서 벌어졌던 일과 파수꾼 가문의 가주들을 만나 했던 행동들을 의외로 침착하게 설명했다.

반면 듣는 딜라일라의 얼굴에는 서서히 경악이 차올랐다.

키리온이 다짜고짜 술부터 들이켠 이유를 이제야 알아차렸다.

맙소사. 신탁이 모든 계획을 망쳐버렸다.

그녀는 법황의 정부가 되기 위해 기요른을 버리고 이 자리에 온 사람이었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반드시 법황의 정부가 될 것이다.

한데 예상했던 남자가 법황의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한다. 제 목표를 실행하려면 상대를 바꾸어야만 했다.

그녀는 키리온의 동생을 떠올렸다. 지저분한 금발 머리의, 대충 쥐어 붙인 듯 생긴, 옷의 단추가 당장이라도 터져나가려고 하던 몸집의, 심지어 말투마저 아둔한 남자.

그런 남자의 정부가 된다고?

키스하고 몸을 섞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라고?

기요른은 소심한 성격이 답답하긴 했어도 선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키리온은 시원스러운 인상의 미남이었다.

부족한 데 없는 이런 남자들을 만나다가 비탈리스로 뚝 떨어지려니 속이 울렁거렸다.

목구멍까지 욕이 차올랐다.

딜라일라는 간신히 분을 삭이다 번쩍 눈빛을 돋웠다.

잠시만. 아직 되돌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간혹 예상을 벗어난 사고가 벌어지지요.”

딜라일라는 지금까지의 사태를 사고로 치부했다.

“사고는 그냥 수습하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과정을 기억하지 않아요. 결과를 기억하죠.”

실마리를 잡으니 안정은 빠르게 돌아왔다.

딜라일라는 은밀한 어투로 소곤거렸다.

“아직 신탁을 본 사람은 예하까지 포함해 단 세 사람뿐이잖아요?”

키리온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녀의 말 안에 내포된 의미를 금방 알아차렸다.

어쩌면 조금쯤 속내에 품고 있던 작정이었기에 금세 통한 부분도 있었다.

“딜라일라. 그대 제안은…… 신탁의 내용을 조작하라?”

“칼데브란카에는 예하가 필요해요. 지금까지 국무를 대신해 온 사람이 예하인데 당연히 법황의 자리에는 예하께서 앉으셔야지요. 그 자리를 대체 누가 오르나요? 여태 열심히 공을 쌓고선 아무 기여도 안 한 동생에게 고스란히 빼앗기실 작정이셔요?”

딜라일라의 지적은 그의 뼈아픈 부분을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왔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비단 저 하나만은 아닐 거예요.”

딜라일라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낮아졌다.

“……오래전부터 우리 같은 사람들은 줄곧 예하께서 법황이 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요.”

술이 깼다.

“그렇지. 나 역시 믿어 의심치 않았소.”

키리온은 내내 자신이 딜라일라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다고 믿었다.

그는 나라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좌지우지하는 남자였다.

힘없는 프리마 돈나 따위는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패였다.

딜라일라 역시 남자는 다룰 만큼 다뤄봤다고 믿었다.

키리온이 저를 하찮게 보고 있어도 미래는 늘 닥쳐봐야만 아는 법이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체스 말로 여겼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키리온이 법황이 된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된다.

이 전제가 어그러지면 딜라일라에게는 키리온을 선택한 의미가 퇴색된다.

법황이 되리라는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자와, 법황의 정부로서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려고 했던 여자.

같은 목표를 가진 남자와 여자는 이 순간 한마음 한뜻으로 의기투합했다.

얼마 뒤 키리온은 파수꾼 가문의 가주들을 조용히 소집해 신탁과 탁본을 공개했다.

차기 성위를 이을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키리온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기에,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 * *

‘새틴, 너에게 많이 미안한 짓을 했어. 할 말이 있으니 제발…….’

한참 편지를 쓰다 말고 기요른은 종이를 주욱 찢어 버렸다.

이렇게 버린 편지가 벌써 다섯 장째였다.

도대체 뭐라고 써야 새틴이 저를 만나줄까.

궁리할수록 고민만 깊어졌다.

역시 직접 찾아가는 쪽이 나을까.

새틴은 편지에 전혀 답장을 안 했다.

그녀를 만난 두 번이 다 델 마레 본가나 신혼집으로 찾아갔을 때에서야 가능했다.

그러나 요즘 날이 부쩍 추워져서 그런지, 새틴은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본가에 발걸음을 끊었다.

집과는 편지로 왕래하고 있다고 들었으나 그 틈에 기요른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결국 아쉬운 쪽에서 찾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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