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8. 기만의 계절
키리온은 눈을 내리감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여 몇 번이나 시야를 막았다가 다시 보아도 탁본의 머리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신탁은 다음 대의 법황으로 비탈리스를 지명했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아둔하고 사리에 어두워 아무도 차기 법황이 되리라고는 예상한 적 없던 비탈리스의 이름이 저기에 있다니.
꿈인가?
젊은 사제도 느지막이 사태를 파악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탁본을 법황에게 바치려다 말고 주저했다.
키리온을 흘끗 바라보고서 덤벙덤벙 숨기고는, 끝내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태도로 움츠러들었다.
이름이 적힌 것은 비탈리스인데 마치 그가 죄인인 양 하였다.
실소조차 흐르지 않았다. 키리온은 신탁을 노려보았다.
법황이 기력을 잃어가면서 법황 대리로서 칼데브란카를 온전하게 지탱해 온 사람은 키리온이었다.
그는 나랏일로 잠을 설쳤다. 손바닥 들여다보듯 이 나라를 속속들이 헤아리는 데에 모든 시간을 썼다.
오로지 그의 희생을 딛고 이 나라가 굴러갔다.
비탈리스는 쉽고 간단하며 중요성이 떨어지는 일만 해왔다.
이를테면 사람들의 이혼을 허가해주는 일.
구색으로나마 대주교의 축복이나 위로가 필요한 일.
동생은 국무의 변두리조차도 손댄 적이 없었다.
그런데 비탈리스라고?
법황은 물었다. 왜 네가 아니냐.
그야말로 키리온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왜 내가 아닌가.
자격이 넘치는 사람은 나인데 왜 내가 아닌가. 나의 어디가 동생에 비해 부족했나.
숫제 절망이었다.
사전의 어떤 표현을 가져다 대더라도 이 심정을 감히 풀어낼 수 없을 터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을 갖다 붙이더라도 불가능했다.
키리온은 이 침실이 이대로 봉인되어 저 심연 아래까지 굴러떨어지는 광경을 상상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묻어버리고 싶었다.
키리온은 넋을 놓고 자문했다.
당연히 나여야 하지 않나? 나 아니면 누가 법황이 된단 말인가.
칼데브란카의 귀족들, 사제들, 더불어 이 땅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마땅히 법황으로 여겼던 후계자는 바로 그였다.
모두가 충격에 짓눌려 침묵했다.
“……예하.”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사제였다.
“어서 법황 성하를 돌보심이…….”
“의사를 부르겠소.”
키리온은 일어나려다 말고 비틀거렸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팔걸이를 쥐고 현기증을 식힌 뒤 그는 사제에게 물었다.
“신탁은 바로 공표되오?”
“법황청의 대사(大事)이니 법황 성하께서 공표하셔야 합니다. 건강상의 문제로 성하께서 직접 공표하시지 못한다면 대리인이 공표하기도 합니다. 그때까지 제게는 비밀을 엄수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군.”
키리온은 무감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제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법황은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이 혼란을 가다듬을 때까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듯했다.
신성 기사단을 책임지고 있는 친구의 수려한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훤칠하고 잘생긴 그의 친구는 법황의 검이라고 불리는 팔라딘이 되어, 훗날 법황이 될 그를 보필할 준비를 해왔다.
‘나는 내 검에게 주인보다는 친구가 되고 싶은데, 어때?’
그런데 그 자리가 동생의 것이었다니.
성좌에 앉은 자신과 그 곁을 지키고 있을 기사단장의 모습을 한시도 의심한 적이 없다.
신성 기사단의 무력을 딛고 칼데브란카를 통치하리라 다짐했었다.
비탈리스와 나란히 있으면 키리온은 절로 빛이 났다.
그는 평생을 예비된 후계자로서 자랐다.
바로 오늘까지는, 분명히.
한데 단 몇 분 사이에 운명이 변했다.
분노가 일었다. 한편에는 좌절도 있었다. 하나 그보다 더한 감정은 고독이었다.
숨 막히게 외로워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루블리에는 신성 기사단의 훈련 때문에 이 시각 법황청에 없었다.
대신 그의 아버지가 카 딜론 가문의 가주로서 와 있을 것이다.
키리온은 주먹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넓은 보폭으로 저벅저벅 침실을 빠져나가, 가주들이 대기하고 있는 곁방으로 들어섰다.
덜컥. 노크도 건너뛰고 문을 열었다. 다섯 가문의 가주들이 키리온을 발견하고는 황황히 몸을 일으켰다.
“예하, 법황 성하께서는 건강이 좀 어떠십니까?”
델 마레의 가주가 물었다.
“신탁이 내렸습니까?”
콴 테온의 가주가 물었다.
“성하께서는 오지 않으십니까? 신탁의 공표도 예하께서 대리하시는 것입니까?”
“탁본은 어디 있습니까?”
“성하께서는…….”
“신전이…….”
“신탁…….”
묻는 말들이 온전히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다섯 사람이 한마디씩만 거들어도 다섯 마디였다. 평소라면 하나하나 잘 듣고 대답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키리온은 지금 모든 게 흐릿했다. 저를 보고 있는 저 얼굴들도, 이 방의 풍경도, 심지어 저 자신마저.
키리온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는 동생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는 광경을 그려보았다.
어리석은 동생은 무어라 말할까.
비웃을까? 아니면 늘 그렇듯 벙벙한 얼굴로 “어어…… 그, 그러니까 형님은…….” 맥락 없는 헛소리나 쏟아낼까.
루블리에의 반응은 더욱 아득했다.
너는 내 검이라 당당하게 선언했던 키리온이 갑자기 주인이 아니라 하면, 그 훤한 얼굴이 어떤 식으로 변할지 예측마저 불가했다.
“혀, 형님의 검이 아니고…… 제, 저의, 아니, 나의 검이었군요.”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실제로 비탈리스가 저런 조롱을 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루블리에는 성좌에 오른 비탈리스에게 예속될 것이다.
자리를 잃은 키리온은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그저.
숨이 조여왔다.
“신탁은…….”
입술이 충동적으로 열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직 때가 아니었습니다.”
* * *
법황청에 오밀조밀 모여 있던 다섯 대의 마차가 출발했다. 각 파수꾼 가문의 휘장들이 휘날렸다.
루블리에는 마차들과 엇갈려 법황청으로 들어왔다.
언뜻 옆을 지나친 마차들 중 카 딜론 가문의 휘장을 발견하고서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카 딜론만이 아니고 새틴의 가문인 델 마레의 휘장도 본 듯했다.
그럼 나머지 세 마차도 필시 파수꾼 가문일 터였다.
파수꾼 가문들이 동시에 소집되었다?
행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면 이건 드문 경우였다.
그러나 이미 달려가고 있는 마차를 제지하기에는 그들을 지나와버린 제 흑마의 속력이 너무도 빨랐다.
무슨 일이지, 궁리하다가 루블리에는 법황청의 성안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키리온을 만나러 왔다. 파수꾼 가문을 불러들인 이유도 키리온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다.
그는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러 집무실에 도달했다. 문을 지키고 선 시종이 재빨리 루블리에의 방문을 알렸다.
“예하, 팔라딘께서 오셨습니다.”
보통 한 번만 불러도 재깍 들어오라 답하던 키리온이 웬일인지 말이 없었다.
루블리에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무안한 기색으로 루블리에를 살핀 시종이 얼른 반복했다.
“예하, 팔라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와.”
잔뜩 잠긴 음성이었다. 루블리에는 직접 문을 열고 걸음을 들였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키리온이 몹시 지친 표정으로 루블리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답이 안 들려서 자리를 비운 줄 알았군.”
“깜빡 졸았어.”
쾌활하고 자신만만하던 평소의 키리온은 어디 가고, 피로에 찌든 키리온이 여기 앉아 있었다.
루블리에는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냐. 그저 오늘따라 좀 피곤하군.”
“피곤하면 일찍 일을 마무리하고 쉬는 게 어때?”
별 의미 없이 루블리에는 휴식을 권유했다.
신성 기사단 단장에게는 부관이 있고, 배우에게는 커버 배우가 있지만 법황의 직무 대리에 임하고 있는 키리온은 그야말로 휴일도 없이 집무실을 지켜왔다.
법황을 돌보고 나랏일을 하는데 지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니 체력 안배를 위해서라도 유독 피로한 날에는 쉬어도 좋다는 뜻이었는데, 웬일로 키리온이 버럭 화를 냈다.
“난 아직 이 자리에 더 앉아 있을 수 있어! 루브, 주제넘은 참견이야.”
루블리에는 멈칫, 입을 다물었다.
어떤 변명이나 해명도 하지 않고 그는 묵묵하게 키리온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키리온이 이마를 짚더니 머리를 툭 떨어뜨렸다.
“미안.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가 봐. 자네 말대로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어.”
“신경 쓰지 마. 피로는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지.”
“……그런가. 뭐, 기사단은 오늘도 별일 없었지? 자네가 잘 맡아서 이끌어주니 탈이 없어 안심이군.”
화제는 일상으로 넘어왔다. 루블리에는 조금 전 키리온의 짜증을 자연스럽게 지워버렸다.
“별일 없었어. 참, 들어오면서 보니 파수꾼 가문들이 소집된 모양이던데.”
“성하께서 명령하셨네. 아마 근래 건강이 쇠약해졌다고 느끼신 모양이야.”
“……벌써?”
“물론 아니지. 괜한 걱정을 하셨어. 원래 그 연세쯤 되시면 감기도 중병처럼 여겨지지 않나. 더 오래 버티실 거네.”
“그거 다행이군.”
키리온은 루블리에의 반응에서 아까 소집되었던 파수꾼 가문 가주들의 위로를 연상했다.
신탁은 아직 때가 아니었다는 키리온의 단언에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기색을 조금씩 지워가며 수긍했다.
“아, 그렇습니까.”
“성하께서 좀 더 버텨주시려나 봅니다.”
잠시 일었던 의구심은 삽시간에 안도로 바뀌었다.
그들은 키리온에게 몇 마디 격려와 응원의 말을 전하고서 법황청을 빠져나갔다.
방에는 키리온만 남았다.
그는 텅 빈 곁방에 우두커니 서서 하루를 곱씹었다.
선득한 기분은 집무실로 돌아와서도 그대로였다.
기이하리만치 조금 전의 감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제멋대로 쏟아지던 말, 차갑던 손끝, 커튼이 드리운 그늘, 그 사느랗던 색채, 분주하게 오가던 가주들의 눈길, 어리둥절한 눈빛들, ‘그렇습니까?’ 반문하느라 옆으로 찢어지던 입매…….
간략한 보고를 끝마친 루블리에가 저녁 인사를 남기고 곧은 걸음으로 집무실을 돌아나갔다.
키리온은 푸르게 얼어붙어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주시했다.
어깨를 넓게 펴고 등을 바르게 세운 자세가 마치 세상을 우러러 자신은 한 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듯하여 키리온은 문득 미치도록 거친 시새움을 느꼈다.
루블리에의 잔영이 망막에 짙게 남아 쉬이 잊지 못할 것 같았다.
* * *
“새틴, 한 사나흘 정도 자리를 비우게 됐어.”
루블리에에게 또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새틴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사나흘씩이나? 어디 가?”
루블리에가 석 달간의 장기 출장을 떠날 때 쾌재를 부르던 과거의 새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요즘 새틴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루블리에가 그 출장을 안 갔다면, 어쩜 지금처럼 행복한 생활은 석 달 전 일찌감치 시작됐을지도 몰랐다.
삼 일, 늦으면 사 일이나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부재가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