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12)

<64화>

“어쩌면…….”

어쩌면 우리는 오늘 이혼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이혼이 가능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사람은 저 혼자였을 뿐,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결혼이 계속 지속되리란 사실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시계를 돌려 반년 전, 억지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끌려 들어가던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의 저는 절실하게 위안이 필요했었다.

늦었지만 새틴은 제 등을 이제라도 다독여 주고 싶어졌다. 잘 될 거라고. 그리고 실제로 다 잘 되었다고.

루블리에는 퇴근하면서 장미를 한 아름 안고 왔다.

온실에서 재배한 꽃은 값도 값이지만 수량도 적어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선명한 붉은 장미 다발을 덥석 안겨 오니 새틴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 계절에 장미를 어디서 구했어?

“꽃 상인한테 오늘은 좋은 날이라 반드시 구해야 된다고 부탁했지.”

“응? 오늘이 무슨 날이었나?”

새틴은 짐짓 시치미를 뗐다. 이를 알 리 없는 루블리에가 눙쳤다.

“아무것도 아닌, 보통 날.”

특별하지 않은 날. 훨씬 더 많이 살아가야 하는, 아무것도 아닌 날.

대답이 마음에 쏙 들었다.

새틴은 환하게 맞장구쳤다.

“그러게, 평범하게 멋진 날이네.”

계절을 넘어선 장미 향기가 진하게 풍겨왔다. 설레는 꽃향기 속에서 새틴은 사늘한 바람 냄새를 맡았다.

시리고 맑은 계절 냄새.

완연한 겨울이었다.

* * *

노인의 하루는 젊은이의 하루와 사뭇 달랐다.

나이가 들수록 시계의 태엽은 빠르게 돌아가는 법이다.

법황의 건강은 하루하루 도무지 가늠키 어려워졌다.

어떤 날은 그럭저럭 괜찮다가도 어떤 날은 갑자기 나빠졌다. 그러다 의사의 진료와 처방을 받으면 조금 나아지는 식이었다.

의식은 여전히 명료했으나 신체가 그에 따라주지 않았다.

법황청에 소속된 사람들은 법황의 건강에 대해 쉬쉬했으나, 팔라딘으로서 매일 법황의 집무실을 들락거리는 루블리에는 파수꾼 가문의 가주들이 듣지 못하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법황의 노환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소식에 그는 법황을 독대했다.

법황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루블리에가 들어서자 몸을 일으켰다.

루블리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법황은 시종의 부축을 받아 침대 아래에 비틀비틀 내려서기까지 했다.

시종이 안절부절못하며 안락의자에 편히 기대시라, 말렸으나 법황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루블리에는 얼핏 짐작했다. 주군으로서 신하에게, 아버지로서 아들의 친구에게 허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루블리에는 시종에게 눈짓해 성마른 조바심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법황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시오. 갑자기 왜 무릎을 꿇는가, 카 딜론 경.”

루블리에는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신하가 주군과 같은 눈높이를 취하면 불경이라 배웠습니다. 성하께서 앉아 계시면 제가 서서 뵐 수 있지만, 성하께서 서 계시니 저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의 대답에 법황은 무리를 해서라도 서 있겠다는 고집을 버리고 안락의자에 반쯤 누워 눈을 감았다.

루블리에와 시종은 조용히 안도했다.

이윽고 법황이 눈을 떴다.

늙고 병든 남자는 꼿꼿한 자세의 신성 기사단 단장을 응시했다.

“나이가 드니 눈이 어둡긴 어두워졌군. 경의 훤칠한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니 말이야.”

“아닙니다. 아직 정정하십니다, 성하. 앞으로 십 년은 충분히 건강하게 사실 것 같습니다.”

“그런 위로는 되었다. 내 상태는 내가 잘 알지. 옛날에는 몸이 늘 작년만큼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멍청한 생각이었지. 실은 그때도 젊었던 거야. 이젠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아침과 저녁이 다르군. 이러다 갑자기 어느 날 훅 고꾸라진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졌어.”

법황이 클클, 쇳소리 섞인 웃음을 지었다.

루블리에는 무거운 마음으로 법황이 이야기를 잇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내 기억력만은 아직 뚜렷하거든. 몇 년 전 키리온이 아직 어린 경을 법황청으로 데리고 왔던 날이 떠오르는군. 친우라 하였지. 키리온이 친우라면서 데려온 사람은 경이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야. 한데 그 녀석, 보는 눈이 제법 좋단 말이야. 유일한 친우가 팔라딘의 서품을 받지 않았나.”

법황이 회상하는 시절은 그들의 학창시절이었다.

키리온은 종종 친구가 된 루블리에를 법황청으로 끌어들였다. 둘은 고즈넉한 법황청을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놀았다.

카 딜론 가에는 그보다 더 자주 방문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키리온은 루블리에의 어머니를 제 어머니처럼 따랐다.

“경이 있어 마음을 놓고 있네. 내 부탁 하나만 하지.”

루블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카 딜론 경. 키리온을 잘 보필하게. 그의 발이 되어주고, 검이 되어주게.”

법황의 당부에 루블리에는 깊이 약속했다.

“물론입니다. 제힘을 다해 예하를 돕겠습니다.”

“좋아. 그런 각오면 충분하네.”

루블리에를 만나면서 잠시 기운을 차렸던 법황은 이후의 사나흘 사이에 다시 상태가 악화되었다.

법황의 직무대리로서 집무실에 앉아 꼬박 일에만 몰두하던 키리온에게 아버지의 전갈이 날아든 날도 이 무렵이었다.

키리온은 사용인에게 이야기를 듣자마자 보던 서류를 접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하러 가는데도 그 저녁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집무 시간에 일부러 부른다면 그만큼 중요한 용건이리라고 예측한 까닭이었다.

그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법황은 노쇠한 얼굴로 아들에게 명령했다.

“신전에 서한을 넣어 보아라. 신탁이 내려왔냐고. 만약 신탁이 새겨졌다면…… 내가 자리를 물려주고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겠지.”

신탁은 법황의 건강이 눈에 띄게 기울어갈 즈음 신전의 신석(神石) 위에 새겨진다.

정확한 시기는 알지 못하고, 단지 죽음을 앞둔 법황이 그 시기에 신탁을 확인했기에 절차로 정해져 내려왔다.

하여 신탁이 정해졌다는 사실은 법황의 서거가 가까워졌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마땅히 치러야 할 절차였으나, 기꺼운 절차는 아니었다. 키리온은 한 발짝 물러섰다.

“법황 성하. 아직 시기가 이릅니다. 더 오래 사실 겁니다.”

법황은 태연한 낯빛을 꾸며내며 대꾸했다.

“물론이지. 누가 벌써 죽는다더냐? 원래 성좌를 물려주는 과정에는 준비하는 시간이 상당히 필요하다. 신탁은 그 시간을 예비해 줄 뿐이고, 나도 당장은 죽지 않는다.”

법황의 명을 전달받은 신전에서 곧 신탁이 새겨진 돌판을 봉인해 가져왔다.

대표로 온 사제는 키리온보다 몇 살 더 나이를 먹은 듯한 젊은 남자였다.

“이게 신탁이오?”

키리온은 무심코 상자의 봉인에 손을 대려 했다. 사제가 급히 제지했다.

“예, 그렇습니다. 대주교 예하, 아직 그 봉인에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신전의 사제들도 신탁의 여부는 알지 못한 채 법황 성하의 명령을 실행했을 뿐입니다. 신탁은 현 법황 성하께서 제일 먼저 확인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신석에 새겨진 이름은 신석 자체가 가진 얼룩덜룩한 무늬에 가려져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사제들은 법황의 건강이 위험 수위에 이르면 그 신석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법황청으로 보냈다.

신탁은 탁본을 뜬 뒤에 볼 수 있었다.

돌의 표면에 물에 적신 종이를 붙이고 염료를 먹인 천으로 토닥토닥 두드리면 하얗게 머리글자가 남겨지는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내려왔던 모든 신석과 탁본은 법황청에서 칼데브란카의 역사로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아아, 그렇군. 실수했소.”

성좌를 물려받을 때에 첫 번, 그리고 물려줄 때에 마지막 번.

인생이 뒤바뀌는 절차인 데다 일생 중 처음 겪는 순간인 탓에 잠시 혼란이 일었다.

키리온은 법전을 열어 절차를 되짚은 후 시종을 불러 명령했다.

“신탁의 탁본은 파수꾼 가문의 가주들이 함께 확인해야만 한다. 다섯 가문에 사람을 보내어 법황청으로 급히 입성해 달라고 요청하라.”

“예, 알겠습니다. 예하.”

카 딜론, 델 마레, 셀 위오, 콴 테온, 얀 실럿.

법황청에서 출발한 다섯 명의 심부름꾼이 각 파수꾼 가문의 본가로 달려갔다.

용건을 들은 가주들은 두말하지 않고 즉각 출발했다.

그들은 법황의 침실과 가까운 곁방에 대기하면서 결과를 기다렸다.

사제가 봉인함을 안고 법황의 침실로 들어갔다. 시종조차 물린 밀실이었다.

대신 키리온이 법황의 곁에 배석해 거동을 도왔다.

대체로 신탁의 지명자가 누구인지 짐작 가능했기에 절차의 편리를 위해서라도 예비 후계자가 한자리에 동석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사제는 법황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봉인을 뜯고 석판을 꺼냈다.

키리온은 그가 적절하게 젖은 종이를 올리고 본을 뜨는 과정을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종이가 제법 마르자 사제가 두 손으로 탁본을 들어 올렸다. 법황이 키리온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서 나를 일으켜주고 허리 뒤에 베개를 받쳐주거라. 나이가 들어 시야가 명확지 않아 걱정이다.”

시력을 돋우기 위해 법황이 있는 힘껏 인상을 썼다. 키리온도 눈을 가늘게 떴다.

신탁은 친절하지 않았다. 나뭇가지처럼 뾰족뾰족한 선들이 가늘게 뻗어 있어, 자세하게 들여다봐야만 했다.

“가까이.”

법황이 한쪽 팔을 들고 손짓했다. 사제가 한 걸음 다가왔다.

“더 가까이 와라.”

다가오는 거리만큼 글자가 선명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했다. 법황은 손을 뻗었다.

탁본의 아래를 붙들고 팽팽하게 당겨 머리글자를 헤어린 법황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사라졌다. 노인은 크게 비틀거렸다.

“성하!”

사제가 다급히 법황을 부축하며 키리온을 돌아보았다.

“당장 의사를 불러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키리온 역시 법황을 돌볼 처지가 아니었다. 키리온의 얼굴도 당장 죽음이 코앞까지 닥쳐온 사람인 양 푸르게 창백했다.

법황의 나직한 음성이, 벼락처럼 귓전에 내리꽂혔다.

“……왜 네가 아니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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