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어떤 기준으로 따져도 루브는 훌륭한 동반자야. 네가 제멋대로 말할 자격 없어. 게다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딜라일라라며? 그럼 지금 널 이렇게 만든 사람은 내가 아냐. 딜라일라지. 그때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했기에 나도 결혼을 깨뜨린 거고. 너는 그 여자가 곁에 있을 때는 한마디 사과 없이 살다가 그 여자가 사라지니 쪼르르 내 인생에 발을 걸치려 드니?”
새틴은 빨라진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고서 느리지만 선명하게 결론을 지었다.
“우리는 오래전에 파혼했어. 그걸로 끝이야.”
기요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치졸하고 비열한 이유만으로 널 찾아온 건 아냐, 새틴. 물론 내가 저지른 짓이 정당했다고 변명할 자신은 없지만…….”
새틴은 겁에 질린 듯한 기요른을 힐끗 일별했다.
기요른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네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게 되었어. 내 인생에 너처럼 좋은 사람이 또 나타날까? 자문할 때마다 답은 늘 같아. 네가 처음이자 끝일 거야. 이 답에 이르고 나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만 초조해져서…….”
기요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조금씩 벌어진 열 개의 손가락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침묵이 가만히 이어졌다.
새틴은 햇빛이 번쩍번쩍 튀는 호수의 수면에만 눈길을 고정했다.
이윽고 잔뜩 겁에 질린 고백이 들려왔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고개를 푹 숙인 기요른이 고정 줄을 만지작거렸다. 꼼꼼하게 묶인 것처럼 보여도 줄은 고정된 부분을 당기고 몇 번만 두르면 쉬이 풀리게끔 매듭지어져 있었다.
새틴은 눈썹을 추켜세우다 내심 깜짝 놀랐다. 이건 못마땅할 때마다 자주 나타나던 루블리에의 버릇이었다.
대체 언제 옮았지?
의문은 잠시 제쳐두고서 그녀는 툭 핀잔했다.
“너 엄청 한심하다.”
집에서 하라는 대로, 새틴이 챙기는 대로 살다가 처음 배짱 있게 했던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 탓에 기요른은 완전히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나도 알아.”
“누가 들으면 인생 망한 줄 알겠네. 셀 위오 가문이 뒷배로 있으니까 뭘 하든 안 망할 줄 알기에 바람 당당하게 피운 거 아니었니? 난 너한테 듣기 좋은 소린 하기 싫어. 너 스스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나 해. 이제 네가 어떻게 살든 그 또한 내 알 바 아니야. ……어, 라리!”
멀리서 타박타박 걸어오는 라리를 발견한 새틴이 번쩍 손을 들고 흔들었다.
“나 여기 있어, 우리 집에 그냥 돌아가자! 이제, 그만, 좀, 비켜, 기요른.”
새틴은 뭍으로 올라가려면 지나가야 하는 좁은 뱃머리를 딱 지키고 앉은 기요른을 쏘아보았다.
따박따박 날카롭게 쏟아진 음절에 기요른이 허둥거렸다.
“새틴, 잠시…… 어, 어어, 어어어!”
벌떡 일어난 새틴을 말리려다가 기요른은 얼떨결에 매듭을 당겼다.
줄이 휘르르 풀려나가는 기세에 그는 손에서 줄을 놓치고 말았다.
줄을 금방 주워 수습하면 될 일을, 운동신경이 나쁜 데다 배를 다뤄본 경험도 전혀 없었기에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멍하게 지켜보다가 아예 기회를 잃었다.
새틴 역시 지난번에 조각배를 타보기는 했어도 배를 손쉽게 다루는 루블리에에게 모든 걸 맡겼었던 차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자유롭게 풀린 조각배가 바람에 떠밀려 둥실둥실 흘러갔다.
“맙소사, 마님? 뭐예요? 기요른님은 왜 여기 계시고요?”
담요와 간식 바구니를 챙겨 온 라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비명을 울렸다.
새틴은 다급히 바닥에 팽개쳐진 노를 손짓했다.
“노 여기 있잖아!”
기요른이 엉겁결에 노를 잡았다. 하지만 평생을 도련님으로 산 그가 제대로 노을 저을 리 만무했다.
“미쳤어? 왜 반대 방향으로 노를 저어?”
“나 이런 배는 처음 타 봐서…….”
물가 근처에서 라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쩜 좋아, 마님! 사람을 불러올까요?”
“절대 안 돼!”
새틴은 기요른을 흘끗 째려보고서 소리쳤다.
기요른과 있는 장면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근방에 있는 목장도 신경에 거슬리던 참이었다.
“가까이 가기만 해, 라리가 밧줄을 던져 줄 거니까.”
운동치인 기요른은 노를 이리도 저어 보고 저리도 저어 본 끝에서야 배를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동안 새틴은 아무렇게나 동동 떠다니는 조각배 안에 갇혀 있었다.
방향을 지시하고 계속 재촉한 결과 기요른은 라리에게로 배를 간신히 몰아갔다.
라리가 배를 겨냥해 밧줄을 던졌다.
기요른이 날아오는 밧줄의 끝을 붙잡아 가로대에 둘둘 묶었다.
풀리지 않게끔 몇 번이나 당겨 확인하면서 묶은 뒤 기요른은 새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줄게.”
“됐어.”
곧장 거부하고서 새틴은 기요른을 스쳐 좁은 뱃전을 밟고 라리의 부축을 받아 땅에 올라섰다.
새틴을 따라 조각배를 벗어난 기요른은 한동안 멈칫거리며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더니, 갑자기 피식피식 소심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넌 웃음이 나?”
“그냥 갑자기 옛날 있잖아, 아주 옛날. 우리가 한 일고여덟 살쯤 됐던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어.”
한창 이성이라는 의식 없이 단짝 친구로 어울려 다니며 자잘한 사고를 치던 나이대였다.
새틴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서 라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날이 추워지면서 창문을 꼭 닫고 생활하기 시작한 까닭에 집안의 공기가 혼탁했다. 답답한 실내를 환기하느라 사용인들이 큰 창들을 모조리 열어젖혔다.
덩그러니 세워진 외딴집은 창을 열면 사방에서 바람이 들이쳐 소란스러웠다. 커튼이 들썩이고 메아리가 벽에 부딪혀 웅웅 울렸다.
“마님, 죄송해요. 침실이 조용하니 거기 계세요.”
창문을 활짝 연 채로 바닥을 쓸고 닦고, 새로 보충한 그림을 내려 먼지를 청소하느라 사용인들은 종일 분주했다.
새틴은 읽을거리를 챙겨 부부 침실에 머무르다가, 불쑥 눈을 들어 방을 요모조모 살폈다.
분명 처음에는 루블리에 혼자 쓰면서 최소한의 가구와 짐만 있는 기사의 방이었는데, 새틴이 들어오고 그녀의 소지품이 공간을 점령하면서 느낌이 사뭇 바뀌었다.
훨씬 부드러워지고 오밀조밀해졌다. 자잘한 집기도 늘어났다.
화장대에는 두 사람의 화장품이 나란히 놓이고 침대에는 색과 모양이 다른 두 개의 베개가 포개졌다.
베개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자리에 새틴이 가져온 쿠션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묵직한 직선으로 만들어진 책상과 의자는 루블리에가 원래부터 쓰던 가구였다.
가끔 신성 기사단 소속의 부하가 급히 처리해야 할 서류를 가져오면 루블리에는 그 책상에 앉아 바로 검토하고 인장을 찍었다.
새틴은 의자에 앉아 보았다. 그의 키에 맞춰진 책상이라 새틴이 편히 앉으려면 쿠션이 필요했다. 발끝도 바닥에 닿지 않아 까치발을 선 채 앉아야 했다.
뭔가 발을 받칠 만한 건 없을까.
새틴은 서랍을 하나하나 열었다. 대부분 그렇듯이 필기도구나 어디서 딸려왔는지 모를 잡동사니 따위가 들어 있었다.
그러다 새틴은 높이가 제법 괜찮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이런 게 있었……. 어?”
무심코 상자를 연 새틴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커다란 상자 안에 덜렁 든 건 얇은 묶음의 종이였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새로운 기분이 들어 새틴은 종이를 팔락팔락 넘겨보았다.
종이 안에 빼곡히 적힌 글자는 제 글씨였다.
이 종이가 여태 남아 있을 줄이야.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새록새록 기억이 살아났다. 그건 새틴이 직접 작성했던 이혼장이었다.
‘우리 약속했던 대로 이혼해요.’
생각났다.
석 달 만에 재회한 주인 부부를 침실로 밀어 넣으려던 라리의 시도가 무참하게 실패하고서, 얼굴이 불타오르는 민망함에 이불자락을 걷어차고 쥐어뜯다 다음날 아등바등 이혼장을 작성해 내밀었던 어떤 하루가 있었다.
루블리에는 이혼장을 휙휙 읽어보고서 그대로 제 앞에 밀어놨었다.
‘이런 이혼에는 동의 못 하지.’
‘아니, 우리 이혼하기로 했잖아요?’
‘내가 언제?’
뻔뻔하리만치 당당하게 잡아떼던 루블리에의 태도도 언제 잊었냐는 듯 선명했다.
‘반반으로 작성했어요. 딱히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처럼요. 성격 차이가 그렇잖아요? 안 맞아서 못 살겠다는데…….’
‘그러니까 내가 인정을 못 하지.’
‘아니, 그러면 제가 유책 배우자예요?’
이혼장에 적힌 대목들을 재차 읽어보니 부끄럽기도 하고 너무 웃기기도 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새틴은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꼭 어린 시절의 일기를 다시 발견한 느낌이었다.
“와, 나 진짜 절박했구나…….”
그땐 못 살 줄 알았다.
날치기도 그런 날치기가 없이 결혼해서,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나 날짜만 헤아렸으니.
‘잠깐만요. 우리, 이혼 사유가 있는데요?’
‘뭔데?’
‘……그거, 스킨십이 안 되잖아요?’
한데 사람은 변화한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만 딱 그랬다.
옷이 언제 다 젖었는지도 모른 채로 홀딱 비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안 되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루블리에의 말이 맞았다. 이젠 지나쳐서 문제였다.
때마침 침실을 정리하러 들어온 사용인이 이혼장을 넘겨 읽고 있는 새틴을 발견하고서 기함했다.
“아이고, 세상에! 마님, 그걸 왜 읽고 계셔요?”
“어쩌다 찾았어. 그런데 이게 왜 아직도 집에 있어?”
물어봐야 할 대상은 루블리에였으나 그는 아직 퇴근 전이었다.
사용인이 루블리에를 대신해서 변명했다.
“주인님께서 마님이 직접 쓰신 거니까 아깝다고, 버리지 말라고 하셔서요.”
참 별걸 다 간직하려 그랬다, 그는.
이혼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으면서도 그녀가 직접 썼다는 이유만으로 이혼장도 내버리지 못했다.
“알았어. 걱정 마. 그냥 읽어본 거야. 루브에게도 말할 생각 없어.”
마지막으로 상자에 넣어 되돌려놓기 직전에 새틴은 이혼장에 적힌 날짜를 읽었다.
공교롭게도 삼 개월 전 오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