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12)

<62화>

고리를 한참 더듬거려야 하는 새틴과 달리 루블리에는 맞물린 부분을 손쉽게 찾아 조심스럽게 열었다.

새틴은 목걸이를 신중하게 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항상 목걸이를 걸고 있었군.”

“의미 있는 선물이잖아.”

“그렇게 생각해주니 굉장히 고마운데.”

루블리에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대놓고 이야기는 안 해도, 카 딜론 가에서 대대로 부인에게 청혼하는 데 사용한 보석이라면 집안의 보물일 것이다.

상당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광채를 잃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간 얼마나 귀하게 다뤄졌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루블리에도 어머니에게서 보석을 받아올 때까지 나름대로 이 결혼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을 터.

가끔은 이 때문에 목걸이가 실제보다 더 무겁고 크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서로 도와 옷을 벗었다. 루블리에는 새틴의 드레스 등허리를 조인 끈을 꼼꼼하게 풀어주었다.

외출복만큼 복잡하지는 않아도 실내복 역시 은근히 손이 많이 갔다. 그래도 루블리에에 비하면 새틴의 드레스는 약과였다.

새틴은 루블리에의 제복 단추를 끌렀다.

손을 대어보고서 조금 놀랐다. 뻣뻣한 제복은 상당히 무거웠다.

이런 옷을 입고도 어쩜 그리 가볍고 날래게 움직이는지 경이로울 수준이었다.

루블리에가 욕조의 물에 손을 담그고 수온을 확인했다.

“조금 뜨거워. 새틴, 조심해.”

행동이 꼭 목욕 시중을 들어주는 라리와 똑 닮았다.

루블리에는 수건을 물에 담가 조금씩 몸을 적셔 주었다. 더운물이 피부를 간질이며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보다는 가슴골부터 배를 지나 다리까지 물길을 따라 훑는 젖은 수건이 훨씬 더 간지러웠다.

어쩌면 그의 눈길이, 심장박동이, 연신 나직하게 가라앉히려 애를 써야 하는 호흡이 더 간지러웠는지도 모른다.

질 좋은 비누에서는 부드러운 거품이 풍성하게 올라왔다.

단단한 손이 새틴의 어깨에, 등 언저리에, 팔 위에 거품을 얹고 문질렀다.

“너는 피부가 약해.”

엉뚱한 핑계를 대어 거칠거칠한 수건 대신 맨손으로 팔 안쪽의 뽀얗고 미끄러운 비누 거품을 훑던 루블리에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꼈다.

“정말 피부 때문이야?”

새틴은 가볍게 통박을 놓으면서도 쥔 손을 빼지는 않았다. 루블리에는 제 몸에도 비누칠을 했다.

새틴도 살짝살짝 루블리에를 도왔다. 목욕 시중은 평생 받아만 봤지 누군가에게 해 준 적이 없어 어색할까 봐 긴장했으나, 제법 능숙하게 흉내를 낼 수 있었다.

문득 루블리에가 픽 입매를 당겼다.

“뭐 잘못했어?”

“아니, 비누 향이 네 향이라.”

“그러네. 내 욕실이라서 내가 쓰는 물건밖에 없었나 봐.”

루블리에가 손목을 코 가까이 가져다 대고 향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나한테 네 향이 나니까 기분이 색다르네.”

마찬가지의 기분이었다. 루블리에에게 제 향기가 난다고 생각하니 어색하면서도 설렜다.

깨끗한 물로 비눗기를 뽀득뽀득 씻어냈다.

깔끔하게 닦고 났더니 상쾌하고 시원한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두 사람 분량의 물을 퍼내 쓰고 남은 욕조의 물은 몸을 담그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욕조 안에 먼저 들어가 앉은 새틴이 종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라리를 부를까? 더운물을 좀 더 갖다 달라고.”

“부르지 마. 훨씬 편한 방법이 있어.”

루블리에가 욕조의 맞은편에 앉았다. 체격이 큰 남자가 몸을 담그니 딱 맞았다. 더운물이 가슴 아래까지 찰랑찰랑 차올랐다. 예상했던 방법이었다.

새틴은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려다가 표정을 바꿨다.

“루브.”

허전한 목을 어루만지던 찰나 충동적으로 입이 열렸다.

“여기 자국 남겨줘.”

새틴의 요청에 루블리에가 일순 의아한 빛을 띠었다.

“남들이 본다고 싫어하지 않았어?”

“그래서 싫어?”

“그럴 리가.”

루블리에가 목덜미에 대고 입술을 꾹 눌렀다.

이 흔적이 남아 있었더라면 기요른의 얼토당토않은 망언을 듣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혹은 건국 기념일 행사에서 조금만 더 자연스럽게 행동했더라면, 행복하게 웃었더라면, 어색하단 투정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기요른의 눈에 이 부부 생활이 그리 쉽게 깨뜨려도 될 만만한 것으로 비치지는 않았을 텐데.

하나 이미 지나가 버린 날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

새틴은 습기로 축축해진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루블리에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는 마주 보고 있던 새틴을 뒤로 돌려 끌어안았다.

어깨에 그의 아랫입술이 내려앉았다. 섬세하게 도드라진 날개뼈와 척추를 따라 점을 찍듯 내려가는 그 감촉을 느끼다, 새틴은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우리 언제 나오나 기다리겠어.”

“침실 정리를 해야 하잖아. 우리가 늦게 나오길 바랄걸.”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도 같았고, 맞는 말이라고 믿고 싶은 것도 같았다.

새틴은 등 뒤를 받쳐 안고 있는 루블리에에게 깊이 몸을 묻었다. 빈틈없이 달라붙는 안온함에 그가 낮은 신음을 울렸다.

* * *

“마님, 편지가 왔어요.”

새틴은 제 앞으로 온 편지들을 팔랑팔랑 넘겼다.

겉봉에는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기요른 셀 위오.

쓸데없는 이름 하나를 발견해 난롯불에 던지고는 나머지를 책상으로 가져갔다. 라리는 보지 못한 척했다.

기요른은 뜨문뜨문 편지를 보냈다.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서 새틴은 봉인조차 뜯지 않고 태워버렸다.

그러자 답장을 받지 못한 기요른은 신혼집까지 찾아왔다.

“새틴.”

루블리에와 호수까지 다녀온 이후로 새틴의 산책 경로는 상당히 넓어진 상태였다.

가끔 새틴은 혼자, 혹은 라리를 대동하고 호숫가에 매어놓은 조각배에 올라타기도 했다. 노를 제대로 저을 자신은 없어서 묶은 끈을 풀지는 않았으나 살랑살랑 호숫가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분전환이 되었다.

“……뭐야? 깜짝이야! 네가 여긴 또 왜 와!”

식겁한 새틴이 배에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중심을 잃을 뻔한 바람에 도로 주저앉았다.

기요른은 끈이 묶인 뱃머리를 선점하고 재빨리 그 자리에 눌러앉았다.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이 퍼석퍼석하게 날렸다. 얼굴에도 윤기가 없어 뺨이 푹 패고 메말랐다.

단기간에 사람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새틴은 기요른을 보고서 깨달았다.

“라리가 담요만 챙겨서 곧 올 거야. 오기 전에 나가.”

“새틴, 나한테 잠깐만 시간을 내줄 순 없어?”

“없어.”

단칼에 내친 순간 기요른이 목책과 배를 잇는 도톰한 끈을 손에 쥐었다.

“뭐 하는 짓이야?”

새틴이 낮아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기요른이 축 기가 죽어 변명했다.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줘.”

“내가 왜?”

“너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왔어.”

“난 초대한 적 없어.”

“시간 오래 뺏지 않을게.”

기요른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시간을 짧게 뺏든, 오래 뺏든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아무래도 수영을 배워둘 걸 그랬다. 배에만 갇히면 도망을 못 치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지, 수영을 배웠더라도 치렁치렁한 외출복에 장신구까지 달랑달랑 잔뜩 매달고 물에 뛰어들긴 힘들겠지.

“목걸이 되게 잘 어울린다, 새틴.”

시시각각 바뀌는 새틴의 안색을 살피며 기요른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려 칭찬을 건넸다.

새틴은 실소했다.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날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결혼식 당일에도 제가 뭘 입었을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전 약혼자가 이제 와서 차림새를 칭찬하는데 곧이곧대로 듣는 건 불가능했다.

새틴이 싸늘하게 받아쳤다.

“결혼 예물이야.”

“아.”

멋쩍어진 기요른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너랑 같이 있기 싫은 이유를 이젠 알겠니?”

“저기…… 말이야.”

기요른은 한동안 우물거렸다. 새틴은 라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연신 멀리 떨어진 신혼집 방향을 곁눈질했다.

그런 까닭에 기요른의 질문은 안중에도 없었다.

“루블리에를 사랑해?”

“왜 안 오는 거야…….”

“새틴, 루블리에를 사랑해?”

“뭐?”

새틴은 눈을 새치름하게 치떴다. 질문이 참으로 주제넘었다.

어이가 없는 반면에도 그녀는 그렇다, 아니다, 섣불리 결론을 내지 못했다.

사랑이란 감정이 뭔지 내내 궁금해하던 차에 기요른의 물음은 찰나의 동요를 가져왔다.

기요른도 그 세월 새틴을 허투루 보진 않았다.

그는 새틴이 내비친 순간의 망설임을 알아차렸다.

기요른은 확연하게 안심한 기색이었다.

“너는 항상 그런 소릴 했었잖아. 결혼에선 감정이 가장 무쓸모하다고. 내가 너에게 잘 어울리는 신랑감인 이유도 그거였잖아. 감정 소모하는 일 없이 우정과 믿음으로 함께 갈 수 있으니까.”

사랑으로 눈이 멀어 결혼식을 그르쳤던 경험자였기에, 기요른은 감정의 무서움을 알았다.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었다.

과거의 어느 대귀족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 신분과 재산, 가족을 다 내려놓고 도망치기도 했다 들었다.

새틴의 마음이 루블리에에게 그만큼 도달하지 않았다면 아직 자신이 끼어들 일말의 여지가 남아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관계를 결혼식 전으로만 되돌려 놓고 싶었다.

아직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았던, 그래서 새틴의 미래가 제게 머물러 있었던 그때로.

“루블리에는 너에 대해 나만큼 잘 알지 못해.”

“그렇겠지.”

의외로 새틴은 순순히 동의했다.

“더불어 나도 루브를 잘 몰라. 그래서 그에게 새로운 면을 발견하면 신기해. 재밌기도 하고 새삼스럽기도 하고. 가끔은 왜 진작 몰랐을까, 하는 후회도 들어. 아마도 태중 정혼이 내 눈을 가리고 있었나 봐.”

덤덤한 어조와는 달리 돌아오는 눈빛이 냉랭했다. 기요른은 머뭇거렸다.

“그리고 뭐 넌 얼마나 나를 안다고 그러니? 나 역시 널 잘 몰라. 평생을 봤어도 그게 가능하더라. 너는 그렇게 쉽게 한눈을 팔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왜 당하고서야 깨달았는지, 오래 봐 왔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날 얼마나 만만하게 여기고 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된 점이 참 많네.”

“오해야! 내가 널 만만하게 여기다니…….”

“그러니까 여기까지 나타났잖아? 너는 내가 만만한 거야. 딜라일라는 법황청 안에서 기요른 예하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까 무서운 거고. 안 그래? 차기 법황 상대로는 힘들어도 카 딜론 가 상대로는 해 볼만하다고 생각했겠지.”

생각하는 속도보다 말로 튀어나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다소 두서없이 터져 나오더라도 괜찮았다. 전부 제 안에 쌓여 있던 이야기였으니까. 새틴은 마음껏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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