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12)

<61화>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족들 앞에 다른 사람이 무릎 꿇는 일은 많아도, 귀족이 되어 다른 사람 앞에 무릎 꿇는 일은 없었다.

하물며 기요른이 어디 보통 귀족이던가.

새틴은 기겁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파수꾼 가문의 귀족이 전 약혼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호사가들의 눈에 띄면 어떻게 해석될지 모를 장면이었다. 누가 볼까 겁이 더럭 났다.

“너 진짜 미쳤구나. 그나마 루브가 여기 없는 걸 다행으로 알아. 그가 있었으면 널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나까지 추문에 오르내리게 하지 말고 돌아가.”

새틴은 일단 한 번 화를 눌러 참았다.

꼴만 사람 꼴이었으면 진작에 한 대 후려쳤다.

하지만 휘청거리는 몸이며 푸르스름한 안색만 봐도 아직 다 떨쳐내지 못한 병환의 기미가 느껴져서 인내심을 발휘했다.

곤란한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려고 델 마레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새틴을 기요른이 다급히 쫓아왔다.

“새틴, 너는 항상 아주 당연하게 곁에 있었잖아. 사실은 그게 하나도 당연하지 않은 건데 내가 그땐 미처 몰랐어. 너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었나 봐. 네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뒤늦게 알았어. 이 모든 잘못을 바로잡고 싶어. 다시 돌아와 줘…….”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해?”

환장하겠다. 이게 과연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소린가?

딜라일라에게 버려지고 본전 생각에 정신을 놓아 버려서 헛소리가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거 아닌가?

새틴은 잠시 멍해졌다. 하도 기가 막힌 읍소를 들어 귀를 의심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델 마레의 문이 이 기막힌 광경을 가려 주니 훨씬 안심이었다. 새틴은 눈으로 밖을 가리켰다.

“사람 불러 내쫓기 전에 나가.”

“나한테 많이 화난 거 알아. 내가 잘할게. 두 번 다시 널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 마지막으로 기회를 줘.”

“너 머리라도 다쳤어? 나 결혼한 사람이야.”

“네가 바라서 한 결혼이 아니잖아……, 새틴.”

듣자 듣자 하니 점입가경이었다. 새틴은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목걸이가 만져지면서 퉁퉁 울리던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루블리에가 왜 목걸이를 선물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했다.

언제든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을 담아 한 선물이었다.

새틴은 제 옆에 루블리에가 서 있다고 상상했다. 목걸이는 제법 훌륭한 진정제였다.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나 너한테 화 안 났어. 예전에는 그랬었을지 몰라도, 이젠 아냐.”

“……화 안 났어?”

기요른이 일말의 기대가 서린 얼굴로 새틴을 바라보았다. 새틴은 무감정하게 말을 이었다.

“너한테 그럴 감정 품을 시간조차 아깝다는 걸 알았거든. 너한테 줄 감정이 있으면 루블리에에게 쏟겠어. 네가 어떻게 살든, 누구와 살든 나는 관련이 없어. 난 지금 행복하게 살아.”

울 것 같은 얼굴로 기요른이 절박하게 외쳤다.

“새틴. 우리 어릴 적에 얼마나 잘 지냈는지 기억나지 않아? 우리, 제일 친한 친구였잖아.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아카데미에서도, 졸업한 뒤에도 우리만큼 친한 사람은 내내 어디에도 없었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때의 좋은 기억이라도 망가지지 않게 노력했어야지. 네가 내게 좋은 약혼자는 아니었을지언정 잘 지냈던 친구기는 했었다고, 아주 먼 훗날 떠올리게라도 말이야. 너는 내게 좋은 약혼자도, 좋은 친구도 아냐. 너는 자꾸 과거를 얘기하는데 나는 현실을 살아. 너와의 과거는 내게 가치가 없어. 추억도 못 돼.”

기요른과 실랑이를 벌이는 새틴을 발견하고서 델 마레의 사용인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새틴은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너랑 결혼하지 않기를 잘했어.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선택일 거야. 바람피워 줘서 고마워. 덕분에 내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어. 난 루블리에와 아이를 낳고 델 마레 가를 이끌면서, 그의 부인이자 아이의 엄마로 살 거야.”

“……새틴, 친구로라도 날 다시 생각해봐 주면 안 될까? 난 이제 주변에 아무도 없어. 밤마다 내일이 끔찍하게 무서워. 눈을 뜨고 있으면 숨이 막히고 잠들면 악몽을 꿔.”

기요른은 이리 혼자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옛날에는 새틴이 붙어 챙겼고, 새틴이 떠난 뒤로는 딜라일라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가족들과도 근래는 데면데면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가문을 물려받지 못하는 막내인 데다 딜라일라로 인해 부모님과 대립했으니 그 골을 회복하기까지도 시간이 걸릴 터였다.

새틴은 부들부들 떨리는 기요른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네가…… 그리워. 네가 있었던 시절이 그리워.”

목소리가 부슬부슬 흩어졌다.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새틴은 기요른이 저를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용기를 발휘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

새틴은 황망해하는 기요른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네 기억은 참 편리하다. 네가 좋은 것만 기억하게. 근데 나는 아냐. 난 너랑 지냈던 기억을 도려내고 싶어. 게다가 네가 정말 내 입장을 고려했으면 델 마레로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너는 진짜 끝까지 이기적이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새틴!”

저택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새틴은 눈치만 살피고 선 사용인들에게 지시했다.

“손님 배웅해드리도록 해.”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가 씁쓸하게 저물었다.

사랑이 뭔지, 사랑의 기한이 짧은 것인지, 아니면 사랑이 아니었던 건지 기요른을 보니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 * *

“새틴. 왜 집에 혼자 먼저 돌아왔어?”

낮이 짧아지면서 루블리에의 흑마는 야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땅을 걷어차는 말발굽 소리는 여전히 우렁찼다. 새틴은 루블리에가 마구간지기에게 말을 인도하고 들어오기를 기다려 마중을 나갔다.

루블리에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새틴을 찾았다.

사소하다면 사소하겠지만 일상의 타이밍이 딱딱 맞게 된 지 꽤 되었다.

새틴은 적당히 에둘렀다.

“집에서 일찍 쉬고 싶어서. 나 이제 본가가 남의 집 같아. 거기서 스물한 해를 살았는데 우리 집보다 불편해. 신기하지?”

“기분이 별로야? 오늘따라 우울해 보이는데.”

얼굴을 슥 훑고 던지는 첫마디에 새틴은 내심 찔끔했다.

“있잖아, 루브.”

델 마레의 사용인들에게는 모두 입단속을 시켰다.

루블리에는 새틴이 먼저 신혼집으로 돌아갔다는 말만 듣고 돌아왔을 게 뻔했다.

기요른이 왔었다고 말을 할까, 하다가 새틴은 불현듯 지나간 어느 밤을 되새겼다.

‘새틴, 나는 네 입에서 기요른이든 프리마 돈나든 그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자체가 싫어.’

기요른은 확실하게 내쳤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선언했고, 루블리에와 잘 살아갈 거라고도 확언했다.

루블리에가 그를 불쾌하게 여기는데 괜히 언급해서 둘 다 찝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고 싶었어.”

새틴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실제로 기요른을 내보내고 났더니 루블리에가 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일까 스스로도 의아했다. 더불어 유독 시간이 느리게 흘러 초조했다.

그가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 루블리에를 대면하고서 새틴은 원인을 찾아냈다.

옆을 지켜주는 존재 하나로 안정의 깊이가 달라졌다.

가장 의지했던 ‘제 편’을 잃자 예전의 ‘제 편’을 그리워하며 찾아왔던 기요른의 심정이 얼마간은 납득될 정도로.

“응?”

루블리에가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새틴, 무슨 일 있었어?”

걱정스러운 기색이 되어 그가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새틴은 가만히 멈추어 있다가 루블리에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높은 키에 몸이 절로 딸려 올라갔다.

“보고 싶었다는데 대답이 어째서 그래?”

“아니면 오늘이 내 생일인가?”

씩 웃으며 덧붙인 루블리에가 새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새틴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가볍게 닿아 간지럽게 시작하지만, 감각은 늘 깊어진다.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끔 그는 목 뒤쪽과 뒷머리를 큰 손으로 받쳐주었다.

혀를 쓸어내리고 숨을 얽는다. 말단의 신경들이 짜릿하게 튀어 오르는 바람에 새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닥을 제대로 딛고 있긴 한지 모르겠다.

“……깐만, 잠깐만. 다른 사람들…….”

입술이 살짝 떨어진 틈을 타 이성을 되돌린 새틴이 곁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없어. 다들 눈치가 빨라서 금방 자리를 피해주잖아.”

사용인들은 시시때때로 눈빛이 달라지는 주인들에게 적응했다.

오가는 표현이나 무드가 야릇하다 싶으면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개미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현관 복도와 기사단 제복 차림의 루블리에를 번갈아 본 새틴은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라리가 욕조에 씻을 물 준비해 주겠다고 했었는데 깜빡 까먹었네.”

“같이 씻지.”

루블리에가 욕실로 따라 들어왔다. 물이 식지 않게 온수를 계속 갖다 부으면서 새틴을 기다리고 있던 라리는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선 생글생글 물러났다.

“비누와 입욕제는 전부 안에 꺼내 놓았어요. 갈아입으실 옷도 금방 가져다 둘게요. 두 분 다요. 그러실 것 같진 않지만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종을 울려주세요. 목욕을 끝내고 나오셨을 땐 침실 정리도 다 끝나있을 거예요. 그럼 내일 아침에 깨워드릴게요, 마님. 팔라딘께서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완벽하게 인사를 마친 라리가 급한 걸음으로 달려갔다. 새틴은 더는 할 말도 없어 입을 다물고 몸에 단 장신구부터 풀었다.

머리를 고정한 핀, 옷에 단 브로치, 귀걸이, 마지막으로 목걸이를 벗어 내려놓으려던 때였다.

“이리 와. 풀어줄게.”

불편한 자세로 목 뒤쪽을 더듬는 새틴의 손 위에 루블리에의 손이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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