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12)

<60화>

오늘도 루블리에는 새틴을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하여 새틴은 마차를 미리 신혼집으로 돌려보내고 온 참이었다.

“그나저나 제가 듣기로 팔라딘께서 대주교 예하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하셨는데……. 새틴님은 괜찮으세요?”

잠깐 지나간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살롱의 부인 하나가 슬그머니 새틴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새틴의 심중을 떠보려는 어투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수상쩍은 의도를 가진 물음이 반가울 리 없다.

새틴은 까슬까슬하게 되받았다.

“뭐가요?”

남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은 이럴 때 좋았다.

어차피 이런 대화가 보통 상대방의 의도나 기분을 파악하기 위해 그물을 드리우는 식으로 이뤄진다 해도, 새틴은 그 그물에서 보다 자유로운 편이었다.

상대는 지레 찔끔하며 해명했다.

“그 여자가 기요른님을 버리고 법황청으로 들어갔다고 하기에요…….”

딜라일라가 법황청으로 들어갔다고?

일순 새틴은 귀를 의심했다.

둘이 그 난리를 치더니, 서로가 안쓰럽고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르더니, 그래서 결국 결혼식까지 엎게 만들고는 육 개월도 못 채워 헤어졌어?

어쩐지 사람들의 기색이 평소와 다르다 싶었다.

하물며 이별은 만남보다 자극적이다.

너무도 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탓이다.

혼란을 화급히 숨기고 새틴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래서요?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에요?”

새틴의 냉랭한 분위기를 살핀 상대가 급히 사과하며 물러났다.

지켜보고 있던 지인들이 다가와 솔직하게 내심을 털어놓으며 새틴에게 위로를 건넸다.

“저는 새틴님께서 조금 속이 시원하시진 않을까 했어요. 아무래도 그간 마음 상할 일을 겪으셨으니까요.”

에클레 부인이 덧붙였다.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기도 하고요.”

새틴은 듣다 말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요? 저는 사실은 그럴 줄 몰랐는데요.”

기요른쯤 되는 인사가 풍파를 각오하고 시작한 연정이다.

당연히 정말 오래갈 거라 여겼다.

오히려 언젠가 마음이 식더라도 기요른의 성격이라면 딜라일라의 평생을 책임지고도 남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가 셀 위오 가문이 끝내 기요른에게 적절한 신부를 찾아 데려오는 날 그때 또 한 번 파란이 일겠거니 했었다.

하여 그 꼴 보기 전에 탈출해서 다행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지금 들은 소문은 아주 뜻밖이었다.

딜라일라가 먼저 기요른을 버릴 줄이야.

소식을 듣고서야 그렇게 헤어지는 방법도 있었구나, 깨달았을 정도였다.

새삼 신기했다. 진짜 사랑으로 맺어졌다고 생각했던 커플은 이렇게 쉽게 무너지고, 도리어 사랑 같은 건 없이 결혼 생활을 할 줄 알았던 제게는 매일 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남편이 있다.

새틴은 덤덤하게 말을 맺었다.

“근데 둘이 헤어지든지 말든지 저하고는 상관없지요. 어차피 다른 사람 일이잖아요.”

* * *

“마님, 목걸이가 정말 마음에 드시나 봐요.”

새틴은 거울 앞에 앉아 가장 마지막으로 목걸이를 벗었다. 외출하는 날이든, 하지 않는 날이든 새틴은 늘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보석을 닦는 일도 원래대로라면 사용인들에게 맡겨야 하지만 새틴은 직접 했다.

하루가 끝날 무렵에 단순한 잡일을 하고 있으면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매일 쓰시니까 항상 닦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그냥 좀 생각할 일이 있어서.”

목걸이 줄을 따라 자잘하게 박힌 보석들이 빛을 뿌렸다.

새틴은 손가락 사이로 줄을 길게 늘어뜨린 후, 정 가운데 물린 큼직한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움켜쥐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새틴은 루블리에에 기대어 있다가 대뜸 화제를 던졌다.

“루브, 프리마 돈나가 키리온 예하의 정부로 들어갔대.”

의외로 루블리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알고 있었구나, 새틴은 직감했다.

키리온의 측근인 만큼 아마 누구보다도 먼저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루블리에가 씁쓸한 어조로 답했다.

“말려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런 것 같긴 하더라. 의지로 감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아마.”

기요른과 파혼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겠지.

감정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가장 어리석은,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게끔 만들기도 하니까.

새틴은 뒷말을 꿀꺽 삼켰다. 루블리에 앞에서 굳이 할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입안에 감췄다고 해도 루블리에가 멍청이가 아닌 이상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내용이었다.

“새틴, 그거 알아?”

잠자코 말을 몰던 루블리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를?”

“나는 보기보다 아주 욕심이 많아.”

“그래?”

“예전에는 우리가 계약으로 매인 생활을 했지. 나는 네 마음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너에게 나는 약점이었지. 그래서 어떻게든 잘 지내고 있다고 남들에게 더 과시하고 싶었어. 그렇게라도 위안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난 지금 행복해. 하루하루가 즐거워서 이제 이 생활을 절대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일상이 무너진다면 그때 얼마나 화가 날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나직이 가라앉은 음성 안에 폭풍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왜 그래? 걱정이 너무 많은 거 아냐?”

“우리가 평범하게 결혼했다면 하지 않았을 걱정이겠지.”

“평범하지 않은 일을 겪었기에 우리가 결혼해서 지금처럼 살 수 있었던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알아. 하지만 새틴, 나는 네 입에서 기요른이든 프리마 돈나든 그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자체가 싫어.”

부드럽게 말하는데도 묵직하게 새겨진 단호함이 느껴졌다. 새틴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흑마는 타박타박 마른 땅을 걸었다.

속도는 내지 않았다. 천천히, 저 멀리에 신혼집이 보였다. 창문 문턱에 걸린 램프가 노랗게 발광하고 있었다.

“새틴, 사랑해.”

“……응. 알아.”

새틴은 평소와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기요른과 딜라일라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았고, 집안으로 들어와서는 평범하게 하루를 정리했다.

“마님, 기분 안 좋으세요?”

“아니. 괜찮은데? 왜?”

“왠지 심각해 보이셔서요.”

“내가? 아니라니까.”

화제를 돌릴 겸 새틴은 얼른 보석함에 목걸이를 담아 라리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넣어줘.”

“네. 팔라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얼른 가보세요.”

새틴은 실내복의 매무시를 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저와 달리 항상 느긋하고 여유롭다 느꼈던 루블리에의 안에 그런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니, 왠지 뜻밖이었다.

“라리, 있지. 나랑 루브가 위태로워 보여?”

잠시 고민에 빠져 있다가 새틴은 나가려는 라리를 불러 세워 물었다. 라리가 토끼 눈을 뜨고 반문했다.

“아니요?”

“그렇지?”

“뭔 그런 섬뜩한 말씀을 하세요? 예전에야 마님께서 곁을 안 주셨으니 이러다 진짜 이혼하는 거 아닌가 싶긴 했어도…… 요즘은 평범하게 잘 사시는데요. 혹시 싸우셨어요?”

“안 싸웠어. 그냥 루브가 의외로 잔걱정이 있어 보여서.”

“행복하셔서 그러시겠죠. 원래 행복하면 할수록 불안도 커지는 법이라잖아요. 두 분은 얼른 아이를 키우셔야 돼요. 그래야 정말 현실적인 걱정을 하게 되실걸요.”

새틴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라리가 하는 제안은 늘 엉뚱해서 어이가 없었다.

아이는 뭐 아무 때나 생기나.

그러면서도 아이를 키우면 하게 된다는 현실적인 걱정이 뭘지 또 궁금해져서, 새틴은 괜히 우묵한 배를 한번 쓸어보았다.

* * *

키리온과 딜라일라, 기요른에 관련된 스캔들을 유독 불편해하는 루블리에 때문에 새틴도 덩달아 세간의 일에는 귀를 닫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본가에 들락거리는 이상, 완전히 멀어져 살기는 불가능했다.

마차에서 내려 델 마레 본가로 들어가려는 새틴의 앞에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새틴은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소스라쳤다.

기요른이 해쓱하게 서 있었다.

처음에는 유령인가 했다.

혈색이 푸른 기요른은 병을 앓고 갓 일어난 환자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기요른을 우두커니 쳐다본 새틴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났다.

“……새틴.”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뭐야?”

“오랜만이다……. 그렇지?”

“네가 여길 어떻게 왔어?”

“알아보니까 네가 최근 일이 주에 한 번씩은 본가에 오고 있다기에.”

일부러 기다려서 찾아왔다는 투였다. 새틴은 숨을 들이켰다.

“네가 왜, 아니지, 이렇게 물어보면 안 되지.”

그가 왜 저를 찾아왔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새틴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쏘아붙였다.

“너 돌았니? 왜 여길 와?”

“너한테 내가 큰 잘못을 저질러서…… 사과하고 싶었어.”

“새삼스럽게 지금 와서 그럴 필요 없어.”

새틴은 그를 무시하고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기요른이 빨랐다.

기요른이 새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새틴은 멈칫, 멈춰 섰다.

“미안해, 새틴. 나를 용서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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