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어머니가 기요른의 낯빛을 살피며 조심조심 뜯어말렸다.
“……그건 곤란해요. 예하께서 그 여자를 데려가셨잖아요.”
딜라일라가 법황청의 보호를 받으며 나간 의도가 여기 있었다.
키리온은 세상 무서울 것 없는 파수꾼 가문도 고개를 숙이고 경외를 표하는 거물이었다.
“그년이 일부러…….”
“하여튼 차라리 잘 됐어요. 그 여자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줬으니 이젠 혼사를 거절했던 다른 집안에서도 우리 기요른을 재고하게 될 거예요.”
미동도 없이 누워 있던 기요른이 이불자락을 끌어내렸다.
“결혼은…….”
이 상황에서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결혼이라니.
거부하고 싶었으나 목소리에 워낙 힘이 없어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하고 모깃소리처럼 기어들었다.
아버지가 쯧쯧 혀를 찼다.
“……누구를 갖다 댄들 델 마레만 하겠소. 정말 두고두고 아까워서 원.”
“이미 놓친 집안을 이제 와서 어쩌겠어요.”
그러면서도 어머니 역시 은근슬쩍 새틴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참…… 새틴이 어릴 때부터 기요른을 잘 챙겨서 다녔잖아요. 애가 새침데기 같긴 했어도 성격이 딱 부러져서 좋게 봤는데. 게다가 델 마레를 이어받을 거였고요. 근데 애가 어쩜 그리 매몰찬지, 이십 년을 넘게 단짝 친구로 지냈으면서 한순간에 돌아서는 게 무섭더라니까요.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에 조금만 기다려 줬으면 기요른이 마음 정리하고 금방 돌아갔을 텐데요. 그렇지 않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그래도 이십 년 세월을 두고 켜켜이 쌓인 기억은 어제 일인 양 선명해서, 기요른은 도도하게 생긴 옛 정혼녀의 얼굴을 손쉽게 떠올려냈다.
“……새틴.”
“그러게 말이오. 기요른이 맘을 못 잡고 방황한 데엔 그 결혼식 탓도 컸어. 약혼녀가 떠났으니 헛헛한 기분에 그놈의 프리마 돈나한테만 더 집착한 거 아니겠소.”
새틴은 언제나 야무지고 맹랑하다는 평판을 들었다.
어느 하나 만만한 구석이 없으니 어려워하는 또래들도 많았지만, 기요른은 그런 새틴이 든든해서 좋았다.
그녀는 루블리에에게는 몇 년을 까칠하게 굴었어도 오랜 단짝인 기요른에게는 늘 편이 되어준 친구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먼저 달려오는 사람도 새틴이었다.
생각해 보니 다리를 다쳤던 날에도 그녀는 결혼식 준비를 뒤로 미루고 찾아왔었다.
“너흰 정말 잘 어울렸을 텐데. 마음 잘 맞는 이십 년 지기 인연이 어디 흔하니?”
“둘 다 집안 빠질 데 없고 인물 빠질 데 없고 성격 빠질 데 없으니, 너 때문에 일이 어그러지지만 않았더라면 칼데브란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을 했을 거다. 다들 너희를 부러워했겠지.”
“수십 년 시간 들여 밥상 다 차려서 난데없이 카 딜론 가에다 떠먹여 주기나 했으니…….”
델 마레 가와 관계가 어긋나고도 기요른의 부모님은 분하고 섭섭해 지금껏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기요른의 새 결혼을 밀어붙이면서도 새틴 대신 언급되는 상대들 집안이 죄 성에 안 차 발을 굴렀다.
결혼을 파기한 새틴은 루블리에를 만나 승승장구하며 사는데 기요른은 딜라일라 때문에 혼삿길이 막혔다.
그럼에도 감수할 수 있다 믿었으나 딜라일라가 다 내던지고 떠난 지금, 기요른은 홀로 남겨져 망가졌다.
딜라일라의 말이 맞았다. 그녀와의 미래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기요른은 새틴과 결혼한 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새틴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기요른 역시 새틴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서로를 오래 파악해 온 만큼 싸울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친구에서 부부로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부터 상대의 성향에 잘 맞춰가면서 조용히, 아기자기하게 지냈을 테다.
새틴은 기요른에게 좋아하는 책을 잔뜩 읽으며 살라고 서재를 멋지게 꾸며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신혼집은 결국 하루도 살아보지 못하고서 처분됐다.
기요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침대에 누워 있었어도 그는 완전히 잠들지도, 완전히 깨어나지도 않은 채로 지나간 추억을 헤맸다.
실로 지옥이었다.
행복이 보장된 미래까지 팽개치고 딜라일라를 보호했다.
그 호의의 결말로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다. 분노와 미움이 사무쳐 가슴에 천불이 일었다.
숨이 쉬어지지를 않았다.
한바탕 대가를 치르고서야 깨달았다. 애초부터 선택이 잘못되었다. 새틴을 놓는 게 아니었다.
이런 날이 올 줄 짐작했어야 했다. 이토록 어리석었던 저 자신을 어찌 되돌려야 할지 까마득했다.
“새틴은…….”
기요른은 갈라진 목소리를 겨우 수습했다.
“이 소식을 알까요?”
“이제야 너도 그 아이가 아쉽니?”
“아쉬워도 어쩔 거야. 결혼해서 못 산다는 소식이라도 들려야 그 결혼 무르고 돌아오라고 하지, 사람들 하는 얘기 들어보면 평탄하게 잘 지내는가 본데 말이다.”
“새틴을 만나고 싶어요. 할 말이 있어요. ……미안하다고 해야 돼요.”
무심코 나오는 대로 입 밖에 내고서 기요른은 화들짝 놀랐다.
새틴을 만나고 싶은 소망이 제 안 어딘가에 숨어 있었나 보다.
언어로 표현하니 그리움이 더욱 거세게 밀려왔다.
오랜 우정은 알게 모르게 습관을 남긴다.
불안하고 부담스럽고 막막한 순간마다 오랫동안 곁에 있어 줬던 사람은 새틴이었다.
‘괜찮아,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니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지. 단지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않으면 돼.’
새틴의 또랑또랑하고 시원한 목소리가 그렇게 위안을 해 주면 이 지옥이 조금은 나아질 것도 같았다.
“그 애가 널 만나려고 하겠어?”
“……만나 줄 거예요.”
기요른은 홧홧하게 뜨끔거리는 제 가슴을 다독였다.
“새틴은 분명 루블리에보다 저를 더 좋아했어요. 차가워 보여도 끝없이 냉정한 애는 아니에요. 저는 새틴을 제일 잘 알아요……. 루브보다 더 먼저, 더 오래 알았어요.”
“그러려면 일어나서 건강부터 챙겨라. 난 너 산송장인 줄 알았다.”
기요른은 억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표정이 일그러졌다. 부모님을 의식해 감추려고 했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낀 기요른의 부모님이 이불을 단숨에 걷어냈다.
“다리…… 네 다리가?”
부모님의 비명이 허공을 찢었다.
“당장 의사를 불러와!”
다급히 불려온 의사는 기요른의 다리에 새겨진 화상을 진료하고서 한숨을 흘렸다.
바로 치료했으면 몇 주 안에 나았을 상처가, 며칠을 방치한 탓에 영영 흉터로 남아 버렸다면서.
“도련님께서는 다리를 좀 조심하셔야 합니다. 남들보다 많이 약해졌으니 평생을 주의해서 쓰세요.”
의사를 대면하니 한참 전에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기요른은 딜라일라와 처음 마주쳤던 날, 그녀를 구하느라 말발굽에 밟혔다.
그리고 헤어지던 날에는 차를 엎질러 화상을 입었다. 딜라일라는 그의 다리에 두 번의 상처를 입혔다.
만남과 헤어짐이 아찔하게 아팠다.
딜라일라는 그에게 있어 본연의 의미 그대로 흉터가 되었다.
* * *
쉬잔 부인의 살롱은 찻주전자의 찻물처럼 수시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사람이 하나만 보태져도 새로운 스캔들의 첫 소절은 돌림노래처럼 반복해서 퍼져나갔다.
곱씹어도 마르지 않는 단물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기요른님과 그 프리마 돈나는 기질이 완전히 정반대였잖아요. 여자 쪽에서 금방 질려버릴 것 같았다고요.”
“제가 뭐랬어요. 얼굴에 분칠한 배우는 믿으면 안 된다니까요. 기요른님은 공부만 한 사람이라 어리숙해서 모르셨던 거지요.”
“뭐 어때요? 인생 공부한 셈 치면 되죠. 어차피 그쪽에서도 정부로 뒀잖아요. 언젠간 헤어질 관계였고, 그 한계가 생각보단 빨리 왔을 뿐이에요.”
“그런데 키리온 예하와 프리마 돈나는 어디서 접점이 생긴 거래요?”
“기념일 행사가 엉망으로 진행될 때 그 무대를 수습해 준 사람이 프리마 돈나였거든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요. 솔직히 키리온 예하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했어요. 예하도, 음, 다들 아시잖아요?”
“셀 위오 가문으로 법황청의 마차가 들어온 적도 있었대요. 저는 기요른님을 불렀나 했는데 지금 보니 그건 프리마 돈나를 부른 마차였나 봐요.”
“결과가 궁금하다 하면 저 불경죄로 잡혀갈까요?”
“궁금하긴 하죠. 예하께서 보이셨던 지난 행적에 대해서야 뭐 저도 들을 만큼은 들었거든요.”
“하여간 대단한 여자네요. 셀 위오 가도 어마어마한데 그다음은 법황청이라니…….”
“어머나, 새틴님! 어서 오세요.”
살롱에 들어선 순간 새틴은 묘한 기류를 느꼈다.
낯익은 분위기였다. 두 번의 대형 스캔들을 겪었던 경험이 경종을 울렸다.
또 한바탕 사람들의 입에 떠들썩하니 오르내릴 사건이 터졌구나.
“새틴님, 그 목걸이 너무 예뻐요.”
“그러게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
이 와중에도 목걸이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새틴은 무심결에 펜던트를 감싸 쥐었다.
“고마워요.”
쇄골 아래로 걸쳐지는 목걸이는 부피와 무게감이 상당해 끊임없이 의식하게 됐다.
그러나 루블리에에게 적응했듯이, 이 목걸이의 감촉에도 곧 적응하게 될 것이다.
익숙해지는 과정은 늘 똑같다. 매일 걸고 다니다 보면 언제부턴가는 목걸이를 걸지 않은 목이 허전해진다.
이른 아침 비몽사몽 중에도 루블리에가 어쩌다 입맞춤을 빼먹으면 허전해서 눈을 뜨는 것처럼.
새틴은 그날을 돌이켰다.
항상 다정하게 인사를 남기고 출근하던 루블리에가 새틴을 재워 두고 그냥 나가버렸다.
까무룩 잠들어 있다가 어쩐지 휑한 기분에 눈을 뜬 새틴은 휑뎅그렁 남아 있던 제 모습에 당혹했다.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데, 하루 종일 기분이 참 이상했었다.
항상 출근하면서 다녀올게, 꼬박꼬박 인사를 하고 나가던 사람이 오늘은 왜 그냥 나갔을까.
기분 상할 일이 있었나? 결혼해줘서 고맙다더니 갑자기 마음이 식었나?
불쑥불쑥 떠오른 고민이 일을 방해했다.
속이 눅눅해 새틴은 몇 번이나 쥐고 있던 펜을 놓았다.
서운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한 제 마음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새틴은 루블리에가 퇴근하자마자 그를 붙잡고 물었다.
“오늘 왜 인사도 없이 나갔어?”
루블리에는 잠깐 의아해하다가 이내 크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신경 쓰였어? 별 것 아니었는데. 오늘 네가 유난히 푹 잘 자고 있기에 깨우기가 좀 미안하더라고.”
사람이 들고 나는 길은 사소한 부분에서 외로워진다. 이를 새틴은 처음 경험했다.
그 뒤로 그녀는 꼬박꼬박 눈을 뜨고 루블리에를 배웅했다.
잘 다녀와, 이따 보자,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 거야?
고작 몇 마디의 인사일 뿐인데도 서로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무척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