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12)

<58화>

마치 오늘 저녁에는 레몬으로 마리네이드한 연어를 먹을까요, 하는 여상스러운 태도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없는 선고를 터뜨렸다.

잠시간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기요른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들고 있던 찻잔을 툭 떨어뜨렸다.

붉은 찻물이 그의 다리를 적시고 카펫까지 후드득 쏟아졌다.

“도련님!”

펄펄 끓는 물이었다.

경악한 사용인들이 당장 씻어내야 한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법석을 피웠다.

그럼에도 기요른은 온도를 느끼지 못한 것처럼 사람들을 뿌리치며 망연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딜라일라? 방금 뭐라고 했어요?”

딜라일라는 상냥하게 되풀이했다.

“그만 헤어지자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헤어지자고요? 왜……?”

“제가 기요른님을 더는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딜라일라는 매력적으로 미소했다. 이제 사랑이 끝났으니 헤어지자고 요구하면서, 여느 때보다 훨씬 아름답게 웃었다.

“내가 뭔가, 뭐를 잘못했나요?”

“아니요, 기요른님은 잘못하신 거 없답니다.”

“그런데 왜 그래요, 당신?”

기요른의 황황한 물음에 딜라일라는 도리어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사랑하지 않으면 헤어지는 것이지,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얘기 없었잖아요. 분명 나한테 사랑, 사랑한다고…….”

“네, 어제까지는 기요른님을 사랑했고, 오늘부터는 사랑하지 않네요.”

기요른은 넋을 놓고 딜라일라를 올려다보았다. 한 대 세게 후려 맞기라도 한 듯 머리가 다 얼얼했다. 그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딜라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죠? 하루아침에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하루아침에 사랑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래도 우리가 함께 있었던 시간이 있는데……. 딜라일라, 모르는 사람과 한눈에 사랑에 빠질 수는 있다 해도,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정이 들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느닷없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닷없이. 제 입으로 내뱉은 단어에 기요른은 일순 멍해졌다.

정말 딜라일라가 느닷없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나. 그녀에게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부분을 느끼지 못했나.

아마 키리온이 마차를 보내 딜라일라를 부르기 시작했을 즈음일 것이다.

그녀는 꽤 오랜 시간을 법황청에 머무르다 왔다. 대주교와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으면, 행사를 도와줘 고맙다는 치사를 들었다고 했다.

“고마움의 의미로 제게 좋은 무대를 만들어 주실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냈다.

딜라일라가 있으니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님과 충돌을 겪은 후에 기요른은 늘 울적해지곤 했다.

도대체 어디에 더 빠질 살이 있었는지 옷이 자꾸만 헐렁헐렁 늘어났다.

그런 날에 딜라일라는 먼저 와서 그를 달래며 입을 맞췄다. 하지만 점점 그 열기가 예전만큼은 되지 못했다.

그뿐일까. 새로운 무대니, 감사의 의미니 하며 외출하고 돌아온 날에는 잠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부드럽게 기요른을 밀어냈다.

“피곤해요. 몸이 영 좋질 않네요. 다음에 해요.”

정말로 딜라일라의 얼굴이 피로해 보여서 기요른은 긴 외출이 힘들었나 보다, 했었다.

딜라일라는 비척비척 계단을 걸어 올라가 셀 위오의 저택 안에 마련된 손님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돌연 목 뒤가 오싹해졌다.

이 모든 게 마음이 식어가던 딜라일라가 보낸 신호가 아니었을까. 훌륭한 연기력을 가진 그녀가 여태 적당히 응하고 받아주며 숨겨왔던 거라면.

“기요른님.”

딜라일라의 매끄러운 부름이 기요른의 상념을 깨뜨렸다.

“알고 계시잖아요. 어차피 언젠가 올 날이었어요. 그게 오늘일 뿐이죠.”

“언젠가 올 날이라니요?”

“설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거예요? 기요른님, 언젠가는 결혼하셔야 하잖아요. 저는 기요른님이 결혼하고 나면 이 집에서 쫓겨날 테고요. 아니면 저와 결혼하실 자신은 있나요?”

“그건, 저기, 딜라일라.”

딜라일라와 결혼을 한다면 진작 했을 것이다.

심약한 기요른은 부모님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혼만은 반드시 집안과 품격이 맞는 여자와 할 것. 이 조건 아래 딜라일라를 당분간 정부로 두게끔 용인받았다.

하여 그는 딜라일라에게 미래에 대한 무엇도 함부로 약속하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 평화를 유예할 뿐이었다.

“자신 없으시죠? 기요른님은 제게 기다려 달라고 요구하시는 거나 다름없어요. 언제까지냐면, 기요른님의 마음이 식는 날까지. 그래서 마지못한 척 집안에서 정해준 혼사를 치를 날까지요. 전 두 눈 뜨고 그런 굴욕은 당할 마음이 없거든요. 아, 마차가 왔네요.”

딜라일라는 이 집에 들어오면서 제 짐을 별로 챙겨오지 않았다. 옷이며 장신구는 모조리 기요른이 제 재산을 털어 새로 맞춰 주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그 짐조차 거의 챙기지 않았다. 손에는 두어 개의 짐가방이 전부였다.

값비싼 드레스와 보석들에 별반 미련조차 비치지 않고 떠나려는 그 행선지가 도대체 어딘지 의문이었다.

기요른은 바깥을 내다보자마자 경악했다. 법황청의 문양이 걸린 마차가 딜라일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퍼즐의 조각들이 한순간에 맞춰졌다. 불안의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호흡이 턱 막혔다.

속에 얹힌 돌덩어리가 숨골을 묵직하게 눌러 와, 그는 크게 헐떡였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 같았다.

“키리온 예하인가요?”

딜라일라는 그다지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이 긍정했다.

“네.”

“딜라일라, 당신 설마 예하께서 당신과 결혼해 줄 거라고 믿는 거예요? 내가 못한 일을 예하라고 하실 리가요! 우리 가문에서도 인정하지 않은 당신을 법황청에서 인정할 거라고 생각해요?”

기요른의 말끝은 딜라일라의 약점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었다.

“어머나. 말씀이 비겁하시네요, 기요른님. 제 신분은 죄가 아니라고 강조하시던 분이, 오늘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물론 이쪽이 기요른님의 진심이겠지만요. 놀랍지는 않네요. 사실 모두들 그렇답니다.”

실수를 자각한 기요른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성급한 마음에 딜라일라의 신분을 건드렸다.

딜라일라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리고 아까의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아니요. 당연히 제가 법황 성하의 후가 될 일은 없어요. 저는 이곳에서 제가 머무를 수 있는 위치를 자각했거든요. 정부는 암만 올라가 봤자 더 높은 남자의 정부일 뿐이지요. 그래서예요. 어차피 누군가의 정부로 산다면, 최고의 남자가 낫지 않겠어요?”

기요른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래서는 안 됐다. 이건 아니었다.

새틴과 헤어지고 부모님과도 대립하면서 딜라일라를 지켜왔다.

당장 그의 곁에 남은 제 사람이라고는 딜라일라 하나뿐이다. 이리 쉽게 놓아줄 수 있을 리가 없다.

“딜라일라, 제발! 가지 말아요. 내가 실수했어요.”

딜라일라가 냉소했다.

“그럼 예하보다 더한 이득을 제게 제시하셔야지요. 저와 결혼하실 건가요?”

다시 물어봐도 흔쾌히 그러겠다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에게 부모님을 거역하고 집을 뛰쳐나올 배짱이 있었다면 진작에 청혼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무엇보다 셀 위오 가문의 막내아들이 아닌 기요른은 딜라일라도 원치 않았다.

머리가 멎어버렸다.

기요른은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어떤 말을 해야 딜라일라가 결정을 되돌릴까.

암만 궁리해도 답은 오리무중이었다.

조바심이 달아오른 나머지 생각과 말의 속도가 어긋났다. 그는 급기야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딜라일라. 예하께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어요?”

“저를 너무 멍청하게 여기시네요, 기요른님.”

딜라일라가 으쓱였다.

“그만두세요. 질척거리는 남자는 매력 없어요.”

“딜라일라!”

찻물을 쏟은 다리가 끔찍하게 욱신거려 그는 일어나려다 말고 주저앉았다.

딜라일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구경꾼들을 잔뜩 후미에 매달고 딜라일라는 보란 듯이 법황청에 입성했다.

아름다운 프리마 돈나는 급작스레 기요른의 인생에 나타나 그의 일상을 휘젓더니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딜라일라가 그냥 나갔다면 기요른에게 쫓겨났다고 보였을 테지만, 그녀는 제 뒤를 누가 보아주고 있는지 은근하게 암시했다.

여론은 처음부터 한결같았다. 버려진 쪽은 누가 봐도 기요른이었다.

그날로 기요른은 방에 틀어박혔다. 딜라일라로 인해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부모님까지 기요른을 불렀으나 그는 모든 만남을 거부했다.

사용인들은 방문 앞에 덩그러니 버려진 식기들을 치우고 또 치웠다.

“도련님. 식사만이라도 하세요.”

“……나중에.”

다섯 번쯤 부르면 간신히 한 번의 대답이 돌아왔다.

서걱서걱하게 마른 목소리였다.

들려오는 답으로 약간이나마 그의 무사를 확인할 순 있었으나 언제까지고 이런 꼴을 지켜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끝내 부모님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어서 망치를 가져와! 저놈의 문을 부숴버려라.”

명령을 받은 사용인들이 망치로 문고리를 퍽퍽 내리찍었다.

망치질 몇 번 만에 굳게 잠겨 있던 문짝이 벌어졌다.

부모님은 망가진 문을 거칠게 걷어차 부수고 기요른의 침실로 들어갔다.

멍청한 짓을 하는 아들을 야단칠 작정으로 기세가 등등했던 부모님은, 기력을 잃고 침대에 맥없이 누워 있는 기요른의 초췌한 몰골을 목도하고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맙소사. 웬 오페라 가수한테 눈이 멀어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응?”

“우리가 뭐라 그랬냐? 그 여자가 주제 모르고 설칠 줄 우린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게, 네가 그때 갑자기 정부를 들이지만 않았더라면 너는 지금쯤 새틴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었을 거 아니냐?”

아버지가 이를 갈아붙였다.

“내 두 번 다시 그 여자가 오페라 무댄지 뭔지 하는 델 절대 못 올라가게 해주마. 노래? 평생 동안 노래는커녕 입도 뻥긋 못하게 만들어놔야겠어. 셀 위오를 건드린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야지. 이 칼데브란카 안에서 그 잘난 낯짝 뻔뻔하게 들고 살아가지는 못할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