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12)

<57화>

7. 왜 내가 아닌가, 왜 네가 아닌가

검푸른 수면에 별이 떴다. 노가 물살을 가르는 곳곳마다 달빛이 산란하게 부서졌다.

새틴은 차가운 호숫물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물결이 찰랑찰랑 일었다.

“여기 보기보다 깊은가 봐. 밑에 뭐가 있어도 모르겠다.”

어느 늦은 저녁, 루블리에가 밤 산책을 권유했다.

새틴은 냉큼 그를 따라나섰다.

가을이 제법 무르익어, 풀 눕는 소리가 버석버석 들려왔다.

겨울이 멀지 않았다. 냉기를 염려한 라리가 겉옷을 준비해서 걸쳐주었다.

함께 손을 잡고 한참 걸었다.

요즘 이런 날들이 퍽 늘었다. 엊그제는 새로 데려온 말 위에 새틴을 앉히고 고삐를 잡은 루블리에가 목장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목장 사람들은 갑자기 집 근처까지 산책을 나온 귀족 부부를 발견하고 굉장히 황송해하며 그날 짠 신선한 우유를 대접했다.

새틴은 아주 오랜만에 우유를 마셨다. 우유는 달고 고소했다.

오늘은 목장에서 방향을 살짝 틀어 호수로 향했다.

낮이면 들판을 뛰어다니던 염소들도 축사로 모두 들어가, 기척 없는 밤은 고즈넉했다.

“이거 봐. 발자국이 찍힌다.”

물가와 접한 땅은 눅눅했다. 두 쌍의 발자국이 호숫가를 따라 빙그르르 돌았다.

사람의 키만 한 조각배 한 척이 목책에 묶여 있었다.

이왕 온 김에 배까지 띄워보자는 제안에 새틴은 루블리에의 손을 잡고 흔들리는 배에 올랐다.

휘청거리는 배를 꽉 붙들어 새틴을 태운 루블리에가 훌쩍 모퉁이에 뛰어오르며 목책에 감긴 줄을 풀고 노를 잡았다.

호수는 잔잔했다.

노로 몇 번 크게 휘젓자 조각배는 호수의 가운데까지 거침없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난간에 앉은 새틴은 무수한 별이 고스란히 비치는 호수에 저 자신을 비추어보았다.

“뭐가 보여?”

“하나도 안 보여. 물밑이 정말 깜깜해. 근데 여기 원래 배가 있었나? 라리하고 종종 돌아다니긴 했는데 배는 처음 봐.”

“너무 작아서 눈에 안 보였겠지.”

“그런가? 하긴.”

오늘 배를 먼저 발견한 사람도 루블리에였다.

넓적한 노가 수면을 가를 때마다 물방울이 옅게 튀었다. 폭이 좁고 사람 두엇이 겨우 앉을 크기라 피할 공간이 없었다.

“수건을 하나 가져왔으면 좋았을걸.”

차디찬 물방울이 얼굴로 튀니 조금 으슬으슬했다.

옷소매를 접어 얼굴을 닦으려다 새틴은 별 뜻 없이 중얼거렸다.

“수건?”

뱃전에서 훌쩍 내려선 루블리에가 노를 바닥에 대충 던져 놓고선 있는 줄도 몰랐던 공간을 뒤적거리더니 마른 수건을 꺼내 새틴의 무릎에 덮어주었다.

“여기 있네.”

새틴은 배의 출처를 직감했다.

“……네가 매어놨지, 이 배?”

“응.”

루블리에가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배는 호수의 정중앙을 한가로이 떠다녔다.

“어쩐지. 하필 오늘 딱 준비되어 있더라. 일부러 탄 거야?”

“물론이지.”

새틴은 수건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려 닦았다.

새틴도 새틴이지만, 뱃전 가까이에서 노를 저었던 루블리에의 얼굴과 손에도 도록도록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팔을 뻗어 물기를 훔쳐 주는 동안, 루블리에도 새틴의 옷섶을 여며주었다.

이제는 다 친숙했다.

대화가 늘었다. 공유하는 시간이 늘었다. 감정의 폭이 늘었다.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가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는 일이 이토록 많은 변화를 가져오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아침이 되면 새틴은 루블리에를 침대에서 배웅했다.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반쯤 감긴 눈을 한 새틴이 부스럭부스럭 몸을 일으키려 하면 루블리에는 이마에 키스하며 새틴을 도로 뉘고 이불을 올려주었다.

매일 오후가 지나 땅거미가 낄 무렵, 새틴은 델 마레에서 온 서류를 보고 있다가도 종종 시간을 확인했다.

루블리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대부분 일정한 시각에 귀가하는 편이었다.

길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소일거리를 하다가 불쑥 묘한 예감이 스쳐 고개를 들면 루블리에를 태우고 달려오는 흑마가 보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반가웠다.

가끔 귀가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가 늦는 날에는 왜 늦었을까, 이유가 궁금해지게 되었다.

남편이 장기 출장을 가도 뭘 하러 갔는지 관심조차 없었던 과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델 마레의 사용인들은 간혹 델 마레 본가에 들렀다 루블리에의 퇴근을 기다려 함께 돌아가는 새틴을 목격하고서 놀라워했다.

루블리에가 널빤지 밑에서 사용인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바구니를 꺼냈다.

간식과 와인, 성냥과 초 따위의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지시를 받은 사용인들의 상상력이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 나간 것인지, 루블리에와 새틴은 바구니 안에서 새로 갈아입을 옷과 속옷 일습마저 발견했다.

“이거 기대에 부응해줘야 하는 거 아냐?”

“여기 밖이거든? 심지어 물 위라고.”

농담임을 알면서도 새틴은 기겁했다. 사실 백 퍼센트 농담이 맞기는 맞는지 확신이 서지도 않았다.

“음, 물 위는 어떨지 모르겠군. 물속은 새롭고 좋았는데 말이야.”

언젠가는 목욕 시중을 들던 라리가 잠시 핑계를 대어 나가더니, 눈 깜짝할 새 루블리에로 바뀌어 있던 적도 있었다.

따뜻한 물에 노곤해서 눈을 감고 엎드려 있던 새틴은 첨벙, 몸을 담그는 물소리에 화들짝 소스라쳤다.

라리, 하며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등허리를 따라 찰랑찰랑 내려앉은 긴 머리카락을 수습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긴 다리가 새틴을 가뒀다.

허리를 감싼 손이 새틴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아주 잘 아는 손이었다. 요 근래 라리보다 더 자주 새틴을 더듬고, 휘두르고, 어루만진 손.

놀랐잖아, 툴툴거린 제게 뭐라고 했더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네가 나오지 않아 조급해졌다고 했던가.

한동안은 서로의 몸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으나 이젠 그렇지도 않았다.

각도를 맞춘 몸이 단번에 밀고 들어왔다. 습한 공기가, 간지러운 물의 온도가, 무르녹던 황홀이 여전히 생생했다.

불쑥 치고 지나간 기억에 뺨이 느닷없이 홧홧해졌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움츠리다 노를 걷어찼다.

좁고 낮은 배 안이라 얼떨결에 튕겨 나갈 뻔한 노를 루블리에가 붙잡았다.

“조심해. 떨어뜨리면 못 찾아.”

“깜짝이야! 나 수영도 못 하는데, 여기 갇힐 뻔했네.”

새틴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루블리에가 씩 웃었다.

“너랑 갇힌다면 그것도 괜찮지.”

새틴은 가만히 루블리에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괜찮았다. 호수의 물은 검푸르게 깊고 물에 뜰 자신도 없지만, 루블리에가 같은 배에 있다면 별로 겁나지 않았다.

잔잔한 물결이 배의 측면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새틴은 가볍게, 그렇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루브. 나한테 할 말이 뭐야?”

그는 일부러 배를 준비했다.

적당히 시간을 보낼 물품까지 챙기라고 지시해서.

굳이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도망도 못 갈 호수 안으로 데리고 나온 용건이 뭘까, 궁금했다.

“새틴.”

“응?”

“결혼해줘서 고마워.”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인사가 돌아왔다. 새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루블리에가 부연했다.

“우린 중간 과정을 너무 건너뛰었지. 공연을 보니 내가 생략하지 말아야 할 것마저 생략했더라고. 그래서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려고.”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 연애도 없고, 아무 약속도 없이 그는 새틴이 떨어뜨린 부케를 들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 청혼했었다. 남들과 순서가 뒤바뀌었다.

루블리에가 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새틴은 얼떨떨한 채로 상자를 받았다. 그래도 열어보는 손길만큼은 신중했다.

“카 딜론 가의 남자들이 대대로 부인에게 청혼하면서 쓴 다이아몬드야. 너에게 의미 있는 상징을 주고 싶다고 하니 어머니께서 물려주셨어. 내 부모님은 조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고, 조모님은 또 증조모님께 받으셨다더군. 형태는 매번 새로 세공하느라 반지가 된 적도, 귀걸이나 머리핀이 된 적도 있지만 보석이 바뀐 적은 결코 없어.”

“……목걸이네?”

“네게는 목걸이가 어울려 보여서.”

왜 목걸이로 세공해 왔는지 직감이 왔다.

쇄골 사이로 길게 늘어질 다이아몬드의 위치는 그가 종종 남겼던 입술 자국과 가까웠다.

새틴은 밤빛을 품은 보석을 눈 안에 아로새겼다.

“걸어줘.”

새틴은 두 손으로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목선이 하얗게 드러났다.

“혹시 오늘 무슨 날이야?”

“아무 날도 아니야.”

“아무 날이 아닌데 이런 예물 받아도 돼?”

“아무 날이 아니니까 받아도 돼.”

루블리에가 새틴을 끌어안고 목 뒤로 고리를 걸었다.

“우리는 오늘처럼 아무 날도 아닌 날들을 훨씬 더 많이 살아갈 테니까.”

아무 날도 아닌 날마저 반짝였다.

그러고 보면 특별함이 멀리 있지 않았다.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고, 날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건 결국 사람이다.

하루하루 제 일상에만 몰두하기에도 시간이 태부족해서, 새틴은 그동안 전 정혼자인 기요른의 행복이 어떻게 무너져 가고 있었는지 미처 몰랐다.

* * *

시기 이른 한파가 한바탕 불어닥친 듯했다.

셀 위오 가문의 사용인들은 살얼음판이나 다름없는 집안의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지나다녔다.

“발소리 내지 마라. 주인님들 심기가 어지러우시니 함부로 눈에 띄지도 말고.”

어린 사용인 하나가 붙들려 주의를 들었다.

쨍한 공기에 위축되어 모두가 살금살금 발뒤꿈치를 들고 다녔다.

활기가 사라진 집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하고 답답했다.

특히 기요른이 거처하는 2층의 복도는 아예 생기를 잃었다. 얼마 전부터 굳게 닫힌 방문은 며칠째 열릴 줄을 몰랐다.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사용인들 중에도 기요른의 얼굴을 본 사람이 하나 없었다.

생으로 굶길 수가 없어 끼니마다 식사를 따로 챙겨 가져다 뒀지만, 문 앞에 둔 식사는 손도 대지 않은 그대로 계속 버려졌다.

오죽하면 떠들썩한 스캔들을 듣고 결혼으로 진작 분가해 나간 남매들까지 찾아와 기요른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나 그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부모도 만나지 않고 남매들도 만나지 않았다. 주인들의 닦달이 죄 아랫사람을 향하니 중간에 끼인 사용인들만 죽을 맛이었다.

“도련님.”

그나마 기요른을 오래 겪은 사용인 하나가 용기를 내어 그를 불렀다.

“깨어 계세요? 일어나셨으면 식사는 하셔야지요.”

똑똑똑.

잠긴 문을 노크하면서 사용인은 딜라일라의 화려한 미모를 떠올리며 속으로 욕을 했다.

가여운 처지에 놓인 여자를 체면 불고하고 구해다 돌본 사람이 누군데,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기요른을 떠났다.

그녀는 이별 통보도 꼭 저같이 했다. 그것도 사용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기요른님. 저 이제 그만 이 집을 나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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