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12)

<56화>

“무슨 공연이라고요?”

“어머, 못 들으셨군요.”

“저희도 처음에는 새틴님의 이야기인지 모르고 갔다가, 어쩐지 내용이 기억에 익은 거예요…….”

“근데 굉장히 멋있었어요. 어떤 극장에서 하는지 알려드릴까요?”

“아뇨, 저는 안 볼.”

“그거 재밌는 소식이군요. 어디서 합니까?”

손까지 내저으며 거부하려는데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훼방을 놓았다.

에클레 부인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맙소사. 새틴님을 모시러 기사님이 오셨네요.”

짙푸르게 끼기 시작한 어스름을 헤치고 루블리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덩치 큰 흑마가 푸르르 울었다.

사람이 평소 신출귀몰하더니만 이젠 살롱에서까지 마주친다. 새틴은 지인들과 루블리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루브, 어떻게 왔어?”

“너 여기 있다기에 데리러 왔지.”

“그냥 빨리 오라고 심부름꾼을 보내지 그랬어.”

“내가 오면 되는데 뭐하러?”

뭐하러, 라니. 지인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남편이 등장하면 유난이라 비치기 쉽다.

그러나 새틴은 이내 루블리에의 이런 행동이 의외로 생소하지 않음을 돌이켰다.

그는 예전에도 새틴의 주변을 맴돌았다. 오히려 또래 여학생들에게 오해는 그때 훨씬 더 많이 샀다.

새틴은 살롱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깐만. 마차를 대기시켰어. 근데 왜 안 보이지?”

“내가 집으로 먼저 가라고 보냈어.”

“마차를? 나는 그럼 어떻게 가라고?”

둘이 동갑내기에 같은 학창 시절을 공유했음을 되새긴 사람들이 친근한 어조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오래 알았고, 그만큼 서로 호감이 있었고, 다만 태중 정혼자가 있었던 탓에 애틋한 감정을 억누르고 살다가 결혼식을 계기로 활짝 꽃핀 사랑.

새틴의 주변인들 중에선 이리 믿는 이들이 많았다.

오해에 휘말려 살면서도 딱히 해명을 할 입장이 아니다 보니 최근 들어서는 새틴도 학생 시절의 기억이 자꾸 조작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두 손으로 허리를 번쩍 든 루블리에가 새틴을 흑마 위로 올려 앉혔다.

“어머, 방금 이 장면 공연에서도 나왔어요!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를 들어서 말에 앉혀주는데, 배우들이 아무리 두 분을 따라 한다 해도 확실히 실제에 비할 수준이 아니네요.”

에클레 부인이 반가워했다.

공연은 아무래도 새틴과 루블리에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몇몇 날들을 짜깁기해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말 한 마리에 함께 올라 발길 묶인 마차 사이를 자유롭게 달렸던 광경은 목격자의 수와 비례하여 유명했다.

“그 공연은 어디서 합니까?”

루블리에가 에클레 부인에게 직접 물었다. 새틴은 기겁했다.

“난 안 궁금해.”

“난 궁금한데.”

“국립극장이에요.”

에클레 부인에게서 기어이 답을 얻어 낸 루블리에가 뿌듯하게 마무리했다.

“우리가 주인공이라잖아. 봐 줘야지.”

* * *

루블리에는 호기심을 뒤로 미루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바쁜 일정을 쪼개 데이트를 할 시간과 공연 스케줄을 조달해 왔다.

에클레 부인이 알려준 국립극장은 딜라일라가 소속된 오페라 대극장과 쌍벽을 이루는 곳이었다.

일전에는 딜라일라의 이름값이 치솟으면서 손님의 대부분을 라이벌에게 뺏겼으나, 그녀가 기요른의 정부로 들어가고 활동을 차차 줄이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오페라 대극장은 이 스캔들 소재를 가져가지 못했다.

주연으로 이름난 딜라일라가 스캔들에 연루된 주인공 중 하나였으니 역할을 맡기에 부적절했던 탓이다.

딜라일라가 새틴의 역할을 맡든, 혹은 귀족 자제를 유혹한 정부의 역할을 맡든 그 소문이 새틴의 귀에 들어왔다면 새틴은 제 이름을 걸고 절대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두 극장은 상당히 가까웠다.

새틴은 사람이 없는 오페라 대극장을 일별했다.

늘 발 디딜 틈 없이 관객들이 몰리던 입구는 오늘따라 한산했다.

흥미로운 소재의 공연을 만들어 연일 매진 행진 중인 국립극장과는 완전히 처지가 달랐다.

심지어 공연의 실제 주인공들까지 관람하러 왔으니 격차는 더 벌어질 일만 남았다.

극장의 직원이 새틴과 루블리에를 카 딜론 가문이 소유한 지정석으로 안내했다.

새틴은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말고 멈칫했다.

“박스석이네?”

“델 마레에서도 극장마다 박스석을 갖고 있지 않아?”

“아니, 우리는 아버지께서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는 무대 가까운 자리에서 봐야 한다고 하셔서. 박스석은 초대로만 다녔어.”

딜라일라가 초대했던 좌석도 박스석이었다.

기요른과 나란히 무감하게 앉아 공연만 뚫어지게 관람했던 과거가 새삼스러웠다.

“박스석 자리는 무대 전체를 보기에는 괜찮아도 표정이나 연기를 실감 나게 즐기기 힘들다고, 항상 배우들과 가까운 귀빈석에서 보시고 훌륭한 공연에는 누구보다 먼저 박수를 치셔서 나도 그렇게 보는 줄 알고 자랐는데 우리 집만 그랬더라구.”

델 마레의 대귀족이 공연을 칭찬하며 박수를 보내면 배우들에게도 영광이었다.

그래서 새틴의 가족이 공연장을 찾는 날에는 배우들이 기합이 든 연기를 펼쳤다.

막이 내린 뒤에는 배우들이며 관객들이며 죄 델 마레 일가의 눈치를 살피고 있기도 했었다.

새틴은 벽과 커튼으로 가려진 안쪽 공간에 몸을 들였다.

확실히 귀족 가문이 소유한 전용 좌석은 딜라일라가 초대했던 박스석보다 넓어 쾌적했고 무대를 조망하기도 좋았다.

새틴은 난간 너머의 무대를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여기 조용하고 어두워서 공연 보기 편하긴 하겠다.”

“커튼만 치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를 밀실이지.”

“뭐야, 사상이 불순해. 무대를 봐야지 커튼은 왜 쳐?”

“박스석을 굳이 왜 오는데?”

루블리에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새틴은 기가 막혀 되물었다.

“……왜 오는데?”

“이러려고.”

의자의 품은 넉넉했고 팔걸이까지 있었지만, 루블리에에게는 무용했다.

몸을 기울인 그가 삽시간에 새틴의 입술을 훔쳤다.

동시에 공연의 막이 올랐다.

라임라이트가 떨어진 무대 위로 은발의 가발을 쓴 여배우가 입장했으나, 새틴은 루블리에의 그림자에 가려 실루엣만 언뜻 보았다.

“너 시작부터 이럴 작정…… 흡, 루브…….”

양옆의 박스석은 모두 조용했다. 새틴은 무심코 흘러나올 뻔한 신음을 막았다.

어쩐지 이럴 것 같았다. 루블리에는 기요른이 아니니까.

기요른은 같은 밀실 안에서 약혼녀를 옆에 두고도 딜라일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자세로 꿋꿋하게 앉아 어쩌다 손등 한번 스치는 일은커녕 곁눈 한번 잘못 흘리는 법도 없어서, 새틴도 덩달아 무대에만 집중했었다.

루블리에와 박스석에 들어와 보니 확연히 차이가 났다.

기요른의 반응은 정상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토록 신호가 확실했는데, 어리고 어리석은 저는 눈이 어두웠다.

“네가 오자고 해 놓고 왜 안 봐?”

새틴은 자그맣게 속삭였다. 새틴의 손은 어느덧 팔걸이를 넘어가 있었다.

꼼꼼하게 손깍지를 낀 루블리에가 손가락으로 손등을 연신 간지럽게 매만지고 있는 탓이었다.

“너무 착하고 뻔한 이야기를 만들어 놨잖아, 지루하게.”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는 상당히 각색됐다.

극단에서도 괜히 셀 위오 가문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하여 새틴과 루블리에의 결혼에 비중을 두고, 기요른도 새틴과 화해하며 각각의 사랑을 찾아 모두가 해피엔딩을 맞고 있었다.

“내가 속상할까 봐 그래?”

현실은 대본과 다르다. 건국 기념일에서 새틴은 기요른과 각을 세웠다.

절친했던 두 가문은 이제 서로 간단한 서한조차 주고받지 않는다.

공식 석상에서 마주치더라도 완전한 남남처럼 굴었다.

그러니 기분 나쁠 만도 했으나.

“괜찮아. 신기하게도 그냥 괜찮네.”

괜찮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연해졌다.

그와 불편한 동거인으로서 살았던 예전이라면 극단이 제멋대로 만든 해피엔딩에 뾰족뾰족 가시를 세웠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 상처가 많이 아물었다.

어느샌가 그렇게 변해 있었다.

새틴은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결혼식에 염탐꾼이 있었나 봐.”

공연은 결혼식 풍경을 제법 훌륭하게 구현했다.

루블리에의 제복을 엇비슷하게 흉내 낸 남자 배우가 떨어진 부케를 주워 무릎을 꿇는 순간 환호가 나직하게 일렁였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여배우가 환한 웃음을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거짓이었다. 새틴은 잠시 무대를 외면했다.

그날의 광경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당시의 저는 정말로 세상이 뒤집힌 듯한 충격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을 것이다. 하객들을 등진 채로, 오롯이 루블리에에게만.

시간을 한참 흘려보내고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겁을 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우리는 의외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말이다.

못마땅한 기색으로 공연을 지켜보고 있던 루블리에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이 공연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대사야.”

“응?”

“너에게 청혼한 건 내 인생에서 최고로 잘한 선택 중 하나거든.”

새틴은 가만히 웃으며 동의했다.

“나도 그래. 청혼해 줘서 고마워.”

무대 위의 두 배우가 하객이 된 관객들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는 키스를 나눴다.

난장판이 된 결혼식을 얼렁뚱땅 수습하기에도 바빠 차마 새틴과 루블리에가 행하지 못한 예식 순서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가 입술을 겹쳐 와도 당황하지 않았다.

빚진 입맞춤을 이제야 치르는 기분이었다. 끈적하게 상대를 붙든 입술이 살짝 떨어다가 다시 달라붙었다.

흐윽. 호흡이 달아올랐다.

“루브. 어떡…….”

옆의 박스석에 들릴지도 모른다. 새틴은 급히 입술을 닫고 들떠 오르는 열을 삼키려 했다. 하지만 더운 입술이 목소리를 부드럽게 틀어막았다.

의식이 아득하게 달아났다.

무대는 더 이상 두 사람의 안중에 없었다.

“공연은 즐거우셨습니까?”

직원이 정중한 자세로 물었다. 입술 화장이 온통 번져 있어 싹 지우고 나오느라 남들보다 퇴장이 늦었다.

입술 색이 사라져 안색이 다소 창백해 보이는 듯도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대답할 말을 잃어버린 새틴이 루블리에와 은밀한 눈짓을 교환했다.

“아…… 즐거웠어요. 공연이 계속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빈말이나마 새틴은 예의를 차렸다. 하나 결과적으로 새틴의 빈말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한창 흥행을 타며 돈을 쓸어 담던 이 공연에 느닷없는 악재가 닥친 것이다.

불화설.

심지어 신분을 초월한 사랑으로 알려진 기요른과 딜라일라의 불화였다.

출처는 확실했다. 딜라일라가 셀 위오 가문에서 짐을 챙겨 나오는 모습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목격되었다.

놀란 목격자들은 딜라일라의 행선지를 뒤쫓았다.

그녀가 기요른의 정부 자리를 청산하고 찾아간 새 보금자리는 법황청이었다.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극은 강제로 막을 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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