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12)

<55화>

“라리. 어떻게 될 줄 알고 벌써 보모 이야기를 해?”

아기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고 들었다. 특히 델 마레 가는 대대로 자식이 귀한 편이었다.

형제자매가 여럿 있는 루블리에나 기요른과 달리 새틴이 외동딸로 자란 데엔 까닭이 있었다.

딱히 건강에 문제가 없는데도 그러했다. 하여 누군가는 델 마레의 혈관에 흐르는 색소 결핍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짐작이었다.

“어머, 서운해요, 마님. 그럼 저 말고 누구한테 맡기시려고요? 제가 마님도 돌봤는걸요. 건강하게 낳기만 하세요. 마님 아이는 제가 키워드릴 거예요.”

“그 뜻이 아니잖아…….”

새틴은 이마를 감쌌다. 라리가 안절부절못하며 새틴을 졸랐다.

“그럼 다시 침실로 만드시게요? 마님, 거기서 주무시면 가위눌려요.”

“가위눌릴 방에서 애는 키워도 되니?”

“그땐 제가 아기님 옆에서 같이 자면서 지켜드려야죠.”

라리가 배실거렸다.

새틴은 자신도 모르게 납작한 배를 쓸어보았다. 부모님이 후계자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긴 했어도 아이는 아주 요원한 미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꾸 라리가 아기 이야기를 하니 그 미래가 앞으로 확 당겨지는 듯했다.

“진짜 하나도 현실 같지가 않네.”

새틴은 망연히 되뇌었다.

조만간 루블리에의 침실을 부부의 침실로 꾸미고 델 마레의 성물을 금고에 보관해야 했다.

부부의 역할을 다 하겠다고 결심했으니 더는 집안의 상징을 숨기고 이리저리 피해 다닐 이유가 없다.

금고에 성물이 들어오면 루블리에는 그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집에 속한 사람임을 인정하겠다고. 그렇다면 언젠간 정말 아기가 생길 수도 있었다.

“현실 같지 않아도 현실이에요, 마님. 인생이 다 그렇죠. 알 수가 없다니까요. 그리고 팔라딘께서는 신체 건강하신 분이니 의외로 빨리 생길지도 몰라요.”

“글쎄.”

“마님 닮으면 진짜 예쁠 거예요.”

“지금은 모른다니까.”

어쨌든 인생은 알 수 없다던 라리의 조언은 사실이긴 하다.

누가 결혼 전의 제게 약혼자가 바람을 피울 것이며 네 남편은 루블리에가 된다고 알려준다면…… 농담으로도 듣지 않을 터였다. 들을 가치가 없다고 무시하거나, 화를 냈겠지.

라리가 재차 허락을 구했다.

“방은 육아실로 꾸밀까요?”

하지만 역시 육아실은 너무 일렀다. 새틴은 지시했다.

“싹 비우고 깔끔하게만 치워줘. 어떤 용도든 쓸모가 있겠지.”

라리가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으나 새틴은 끝내 관심 없는 척했다.

부부로 사는 일도 어려운데 부모로 사는 일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 그러면서도 새틴은 저와 루블리에 사이에 선 조그마한 인영을 그려보았다.

외양은 아마 새틴을 닮을 것이다.

흰 피부와 은발로 대변되는 델 마레의 유전적 형질은 유명하니까.

그렇다면 기질은 검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진 루블리에를 닮았으면 좋겠다.

루블리에는 다섯 살의 나이에 검을 쥐었다고 들었다.

루블리에가 다섯 살 된 아이와 집 근처 너른 들판을 뛰어다니며 검을 가르치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건 의외로 멋지게 느껴졌다.

* * *

루블리에는 종종 조그만 선물을 가져왔다. 정말로 사소한 것들이라 새틴은 받으면서도 깜짝깜짝 놀랐다.

대체로 법황청의 요리사가 만든 간식이라든가 카 딜론 가로 들어온 과일주, 찻잎 따위였다.

이런 걸 어디서 나서 챙겨 왔냐고 물어보면 답은 항상 비슷비슷했다.

키리온에게 보고를 마치고 잠깐 차를 마시다 왔는데 곁들여 나온 과자가 맛있어서 챙겨달라고 했다, 네가 차를 좋아하니까 본가에 선물로 들어온 상자를 가져왔다.

그러면 새틴은 다소 신기한 기분이 되어 다음날 차를 우려 마시고 과자를 챙겨 먹었다.

하루는 불쑥 붉은 꽃다발이 나타났다.

새틴은 어리벙벙해서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이게 웬 꽃이야?”

“법황청 뜰에 가득 피었더라.”

“법황청에서 키운 꽃을 함부로 꺾어와도 돼?”

“당연하지.”

“근데 정말로 웬 꽃다발이야?”

“네 생각이 나서. 널 닮았더라고.”

새틴은 새빨간 꽃을 의심스레 들여다보았다.

“나랑? 도대체 어디가…….”

“화사하잖아.”

우습게도 꽃다발을 받은 순간 떠오른 사람은 기요른이었다. 오페라 대극장으로 꽃다발을 들고 딜라일라를 만나러 갔던 기요른이.

그렇구나, 싶었다.

그의 눈에는 꽃과 딜라일라가 닮아 보여서, 같은 기분으로 꽃을 들고 딜라일라를 찾아갔던 거였구나 했다.

새틴은 차마 형언키 힘든 마음으로 꽃을 안고 빙긋 웃었다.

“고마워. 꽃은 처음 받아보네.”

그 말이 어떤 여운을 남겼는지, 루블리에는 점점 꽃을 구하기 힘든 시기가 되었는데도 때때로 꽃다발을 꾸며왔다.

새틴은 꽃의 줄기를 다듬고 화병에 꽂아 침실에 가져다 두었다.

더불어 꽃이 반드시 감상하는 용도로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새틴은 밤마다 깨우치게 되었다.

루블리에의 상상력이 풍부한 건지, 아니면 제 상상력이 빈한했던 건지 혼란스러웠다.

“……루브. 이게 뭐야.”

하얀 피부에는 유독 자국이 쉽게 남는다.

쇄골 근처에 꽃잎처럼 붉은 흔적이 찍혔다.

없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 또 입술을 꾸욱 누른다 싶더니만 같은 자리에 같은 자국을 또 만들었다.

“이러면 라리가 본다구.”

다른 사람들 눈에서는 옷을 입고 숄을 둘러 부끄러운 흔적들을 가려도 목욕 시중을 드는 라리의 눈에는 전부 다 드러났다.

그러니 라리도 육아실을 만들자며 줄곧 보채는 것이다.

한참 때 이른 소리라며 새틴이 단칼에 거부했으나 새틴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살피는 라리는 날이 갈수록 기대하는 눈치였다.

“보이면 뭐 어때.”

루블리에가 자국을 어루만졌다. 그러더니 제 벗은 상체를 새틴에게 바짝 갖다 댔다.

“너도 똑같이 나한테 만들어 줘.”

심지어 그는 한술 더 떴다. 새틴은 버둥거리다 루블리에를 밀어냈다.

저야 라리의 눈만 의식하면 되지만 루블리에의 주변에는 신성 기사단이 있었다.

“망신이야, 망신.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기사들은 훈련하다가 땀이 나면 옷도 벗어 던진다면서.”

“난 상관없어.”

“뭐라는 거야! 내가 상관있어.”

낯이 다 뜨거웠다.

팔라딘의 부인이 남편 몸에 함부로 흔적을 남기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냔 말이다.

“내가 창피해서 라리를 볼 수가 없어. 다시는 내 몸에 이런 거 남기지 마.”

“넌 너무 부끄러움이 많아.”

“사방팔방 자랑하고 다닐 얘기도 아니잖아.”

“왜 아니지? 난 널 자랑하면서 다니고 싶은데.”

소극적인 새틴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지 다소 심술궂은 표정이 돌아왔다.

하지만 새틴도 묵묵부답을 지켰다. 아무리 친한 사람일지라도 지키고 싶은 사생활은 있는 법이다.

달아올랐던 몸이 사늘하니 식어갔다.

사람의 체온만큼 확실한 훈기도 드물어서, 들뜬 밤이 가라앉자 가벼운 오한이 일었다.

새틴은 더듬더듬 저 발치까지 밀려난 시트를 쥐고 잡아당기다 재차 루블리에의 품으로 끌려갔다.

“……힘들어. 더는 안 돼.”

어느덧 반쯤 졸음에 먹혔다. 침대 저편으로 누운 그림자에, 주시하는 기척에 긴장해서 말똥말똥 눈을 뜨고 보냈던 나날은 초저녁에 지나갔다.

요즘은 수면제라도 먹었나 싶을 만큼 잠이 잘 왔다. 어떤 날은 잠깐 눈 깜빡할 사이에도 까무러치듯 잠들었다.

“귀찮게 안 할 테니 자.”

더불어 몸을 칭칭 감싸는 팔다리에,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손길에, 정수리를 누르는 턱에도 적응했다.

새틴은 부스스 눈을 감았다.

그 와중에도 뭔가 고민이 생겼는지, 쇄골을 끊임없이 쓰다듬는 손가락의 촉감이 느껴졌다.

* * *

“새틴님, 감기 걸리셨어요?”

실내에서도 목과 어깨를 감싼 숄을 풀지 않는 새틴에게 걱정스러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새틴은 마음속으로 루블리에를 원망하며 어색하게 연기했다.

“조금요. 약간 감기 기운이 있네요.”

“저런. 조심하세요. 그러고 보니 새틴님은 신혼집을 멀찍이 마련하셔서 좀 추우실 것 같아요. 아무래도 교외는 바람이 많이 불 테니까요.”

“네, 그런 편이에요.”

“오늘도 본가 방문하신 거죠? 나중에 가문을 물려받으시려면 이 근처로 들어오시는 게 편하지 않으세요? 지금 계시는 신혼집은 아무래도 오가기 번거로우실 텐데.”

안 그래도 그 문제로 본가에 들렀다가 쉬잔 부인의 살롱에 찾아온 김이었다.

새틴은 적당히 들어넘겼다.

“아니에요. 어…… 지금 자유로운 게 좋아서요.”

루블리에는 타인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편이었다.

신분이 높을수록 남의 눈치를 볼 까닭도 없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괜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인데 루블리에는 유독 자기만의 길을 개척했다.

아무래도 신성 기사단 소속이라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사교 생활을 해온 기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듯했다.

새틴은 무심결에 숄로 감춘 어깨를 손으로 덮었다.

그나마 이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니 남부끄러운 기억이 있어도 안심이 됐다.

오래전 신혼 생활을 경험한 부인들이 까르르 눈짓을 교환했다.

“역시 신혼이셔서…….”

“저도 그 기분 십분 이해해요. 신혼 땐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기분이죠. 저희는 아예 단둘이 한 이삼 년 휴양지로 내려가서 살았거든요. 그 기억으로 지금까지 정붙이고 살잖아요. 새틴님도 여행이 잘 맞으실 분인데 팔라딘께서 나랏일로 바쁘시니 안타까워요.”

여행. 설레는 단어였다.

다만 루블리에가 휴가를 내기 힘든 사람이라 신성 기사단에 몸을 담은 이상 떠나기 쉽지 않았다.

그때는 사흘의 신혼 휴가가 아뜩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재차 돌이켜보니 짧디짧기 그지없었다.

음……. 아니다.

새틴은 재빨리 마음을 고쳐먹었다.

긴 휴가는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제게도 델 마레의 후계자로서 배워야 할 공부가 있고 의무가 있는데 하루하루가 어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마냥 침실에만 틀어박힐 순 없는 노릇이다.

“나랏일로 바빠서…… 다행인데요.”

“예?”

“바빠야죠, 팔라딘이. 그래야 사람들이 안전한걸요.”

시치미를 뚝 뗀 새틴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안전이 언급되자 사람들은 최근 한바탕 난리를 치렀던 악령에 대해 떠들었다.

어쩌다 보니 악령과 불운하게 조우했던 사람도 새틴뿐이라, 새틴은 계속 화제의 중심에 섰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새틴은 흘끗 시간을 확인하다가 화드득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그만 가볼 시간이 됐네요.”

침실을 함께 쓴 뒤부터 루블리에와 시시콜콜 일과를 나누는 날이 늘어났다.

오늘도 무심코 본가에 가 봐야 한다고 밝히자, 루블리에는 퇴근하는 길에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어쩌면 벌써 델 마레 본가에서 루블리에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랴부랴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는 새틴에게 지인 여럿이 종알종알 수다를 끊지 않으며 배웅을 나왔다.

“아, 참! 새틴님, 그거 아세요? 새틴님을 주인공으로 한 공연이 개막했어요.”

“네?”

문을 나서다 말고 새틴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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