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루블리에는 의자에 앉았다.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으며 별생각 없이 손잡이를 잡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카락 한 올이 손가락에 걸렸다. 그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길고 구불구불한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손님을 위해 마련된 의자니 손님으로 방문한 사람의 것일 터였다. 대주교의 집무실에 방문할, 붉은 장발의 여자가 있던가.
이런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딱 하나 안다.
새틴의 은발만큼이나 금속성을 띤 붉은 머리카락도 흔치 않은 편이었다.
루블리에는 곧장 그 주인을 입에 담았다.
“프리마 돈나?”
키리온이 화들짝 놀랐다.
“뭐라고?”
“내가 아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는 그 여자밖에 없는데.”
“아, 아하. 딜라일라를 말하는 거였군.”
키리온이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나 루블리에는 한번 잡은 의문을 놓치지 않았다.
“프리마 돈나가 여길 왔었어?”
“자네 반응이 왜 그러지? 굳이 못 올 여자는 아니잖아.”
루블리에는 수상쩍은 눈길로 키리온을 주시했다.
한동안 일에 찌들어 사느라 여자 문제가 잠잠하게 가라앉아 다행이다 싶었는데 프리마 돈나가 집무실까지 들어와 키리온을 일대일로 대면했다니 찜찜했다.
“굳이 올 여자도 아니지.”
“저번에 건국일 행사를 도와줬잖나. 불러서 감사를 표했을 뿐이야.”
키리온이 사뭇 태연자약하게 으쓱였다. 하지만 루블리에는 좁아진 미간을 여전히 펴지 못했다.
“……그게 끝이야?”
“그러면?”
루블리에는 에두르지 않고 단박에 되물었다.
“자네, 프리마 돈나에게 사심이 없는 게 확실해?”
사람 마음은 확언하지 못한다. 더구나 키리온이나 딜라일라나 이성과의 관계에서 능수능란한 재주를 부리는 인물들이다.
둘이 만나 정말로 건국제에 관한 건조한 대화만 나눴을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루블리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스캔들을 새삼 되짚었다.
“프리마 돈나는 기요른의 정부야.”
“그래, 그녀는 그의 정부지.”
키리온이 순순히 수긍했다. 루블리에는 한마디 염려를 보탰다.
“불필요한 호기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딜라일라에게 말인가?”
등줄기가 싸해졌다.
키리온이 프리마 돈나의 이름을 직접 부른 적이 있었던가.
키리온은 프리마 돈나에 대한 관심을 진작부터 표해왔었다.
심지어 법황청 안에 들어앉아 일에만 몰두해야 하는 처지에 처한 와중에도 루블리에보다 더욱 소문에 밝았다.
다만 친구의 부인 체면을 보아 국가 행사에서 그녀를 배제했을 뿐이다.
하필 결혼에 대한 대화를 나눈 뒤였다.
의심은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자네 혹시 결혼할까 하는 여자가…….”
“루브. 자넨 날 뭘로 보는 거야?”
키리온이 대번에 정색했다.
“내가 미쳤나? 다른 남자의 정부로 소문난 여자를 부인으로 들이게. 잠깐 호기심을 충족하려고 만날 뿐이야. 결혼하면 치워버릴, 그럴 여자에 불과해.”
“……만나긴 했단 소리군.”
심지어 그냥 만나기만 한 뉘앙스도 아니다.
강한 어조가 도리어 관계를 암시하고 있었다. 골이 지끈지끈 아파 왔다.
키리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여유롭게 인정했다.
“그야. 그래, 그 얼굴과 그 몸매.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
“난 도무지 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프리마 돈나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이해가 안 가.”
“대단한 이유 없어. 한창 피어났다가 사그라드는 미모는 한순간이기에 가치가 있지. 가장 아름다울 때 잠시 곁에 놓고 감상하는 거야.”
암만 절친한 친구라 해도 그 속을 이해하지 못하겠는 지점이 있다.
한동안 고요하게 살기에 잊고 있었는데 그 지점을 다시 맞닥뜨렸다. 루블리에는 좁힌 미간을 풀지 않고 제안했다.
“차라리 당장 훌륭한 배우자를 찾아서 결혼을 하지그래. 엉뚱한 데 한눈팔지 말고 말이야.”
“루브. 자네는 운이 좋은 사람이야. 자네 부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신분, 재산, 명예, 미모까지 다 갖춘 경우가 어디 흔한가. 보통은 거기서 몇 가지를 포기하지.”
“그게 프리마 돈나와 상관은 없잖아.”
“보통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게 매력과 미모거든.”
“키리온. 그 프리마 돈나가 아무 계산속 없이 자네를 만나겠어? 그 여잔 자네의 이름을 사방천지에 광고해 댈 거야.”
애당초 기요른의 정부로 유명세를 치렀으니 그에게 안전하게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딜라일라는 제 뒤에 키리온이 있음을 반드시 선전할 것이다.
루블리에의 지적을 키리온은 태평하게 받아들였다.
“물론이지. 그 여잔 자기 몸값을 높이고 싶어 하니까. 셀 위오 가는 오히려 나에게 고마워할걸. 혼삿길 틀어막은 골치 아픈 정부를 아들에게서 떼어내 줬잖아. 그 여자는 잠시 내 이름에 자신을 의탁하고 나는 그 여자에게서 매력을 충족하고. 피차 나쁘지 않은 거래지.”
키리온의 바람기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은 다들 알았다.
일찌감치 거쳐 간 여자의 수만 봐도 쉬쉬할 수준을 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리온은 침착했다.
그의 여유에는 이유가 있었다.
기요른처럼 순진한 공붓벌레로 이름난 남자가 정부를 두면 천지가 개벽할 사건이 되지만, 키리온처럼 여성 편력이 있는 남자가 정부를 두면 한동안 잠잠하던 바람기가 또 시작됐구나 할 뿐이다.
지나간 경험들이 가져다준 예측은 확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파수꾼 가문은 엇비슷한 다섯 가문이 경쟁의식으로 얽혀 있어 약점이 생기면 생트집을 잡으나, 차후 법황이 될 남자의 권위는 키리온이 유일하다.
칼데브란카에서 키리온의 눈 밖에 나길 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키리온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마무리했다.
“지금이 나에게는 결혼하기 전의 마지막 자유 아닌가. 신경 쓰지 마. 결혼하기 전에 정리할 거야.”
* * *
팔라딘의 집을 습격한 악령에 대한 소문은 놀라운 속도로 퍼져 나갔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새틴은 안부를 묻는 편지를 여럿 받았다.
델 마레 본가에서는 부모님이 직접 마차를 타고 찾아왔다. 부모님은 망가진 침실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불타오른 악령이 남긴 잔재는 밝은 낮에 봐도 끔찍했다.
“악령이 나타났다는 경고를 들었어도 요즘 세상에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싶어 기연가미연가했는데 정말로 사람까지 해쳤다니. 네가 무사해서 천만다행이다만……. 끔찍해서 어째. 앞으로 또 이런 일은 없는 거겠지?”
“잘 모르겠어요. 루브도 완전히 장담할 순 없다고 하던데요. 전설 속에서 악령이 한 마리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당분간은 별일 없을 거예요. 이백 년 동안 우리나라는 그럭저럭 평화로웠잖아요.”
“차라리 시가지에 집을 얻는 건 어떠냐? 여기는 너무 외져서 사고가 벌어져도 잘 모르기 십상이겠다. 너와 카 딜론 경이 사는 집이었으니 망정이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왜 죽었는지 알려지지도 않았을 거다.”
아버지의 말에는 새틴도 동의하는 바였다.
과연 지난 이백 년이 완전히 마귀에게서 벗어난 안전한 시대였을까.
어쩌면 그간 악령으로 인한 피해가 간혹 있었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묻혔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곳은 법황이 근거하는 수도이자 성지였다.
악령이 법황의 턱밑까지 들어왔었노라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했다.
어째서 악령이 이토록 대범하게 움직였는지 암만 짐작해 보려 해도 의아했다.
“집은 여기가 나아요. 오히려 악령이 시가지를 돌아다녔다면 피해가 훨씬 컸을 거예요. 대처법도 알아냈으니까 문제없고요.”
“그래, 얘기를 들었다. 네 남편만 신성 기사단의 팔라딘이 아니야. 너 역시도 델 마레의 후손이다. 잘했고, 자랑스럽구나.”
“맞아. 카 딜론 가에서만 능력 있는 인재가 나온다고 누가 그러디? 델 마레도 카 딜론 못지않아. 사람들이 여태 그걸 몰라줬을 뿐이지. 그런데 새틴.”
“네?”
방이 엉망으로 망가졌어도 화려했던 꾸밈새는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이 방은 집주인의 침실이었다.
그것도 우아하고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여성의 방.
하나 방을 어떻게 복원해야 할지 의논이 끝나지 않아 하나도 손댄 구석이 없어 쓰던 가구며 집기들이 고스란히 방치되어 있었다.
방 한복판에 서서 한 사람 몫의 베개, 이불, 가구들을 본 어머니가 수상쩍은 기미를 비췄다.
“너 각방 쓰니?”
헉.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새틴은 기함해서 소리쳤다.
“……아니요!”
제 입에서 나온 부정에 더 놀랐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미묘했다.
옷으로 꼼꼼하게 숨긴 흔적들이 화끈거렸다. 민망한 심정에 새틴은 더럭 성을 내고 말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됐지 얜 뭘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 괜히 속만 읽혔다.
찜찜한 뒷맛이 남았다. 숄을 매만지며 부모님을 외면한 새틴이 어깨를 움츠렸다.
결혼하고 독립해 나가 사는 어엿한 성인인데도 부모님 앞에서는 꼭 머릿속을 다 꿰뚫리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성물은 잘 보관하고 있지?”
물음이 날아왔다. 새틴은 화드득 고개를 세우고 대답했다.
“그, 그럼요.”
“그럼 됐다. 미래가 어찌 될지는 한 치 앞도 모른다는 소리나 하고 가기에 걱정했는데, 잘 지내고 있어서 마음이 놓이는구나.”
맞다, 성물을 물려주려는 부모님께 그런 반항을 남기고 왔었다. 새틴은 멋쩍어 쭈뼛거렸다. 정작 말을 한 저는 깜빡 잊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제 말에 실린 미묘한 거부감을 읽고서 여태껏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정말 잘 지내요.”
제 속이 뒤죽박죽으로 얼크러져 있던 시기에는 자신이 우선이라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평온을 찾고 나니 주변의 염려가 뒤늦게 보였다.
딸이 잘 살기를 바라며 귀중한 델 마레의 상징을 넘겼을 텐데, 성물을 가져가는 딸이 마뜩잖은 기색만 남겼으니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러나 부모님은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고 기다렸다.
그리하여 이제는 자신감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왔다.
잘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잘 지낼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새틴은 힘주어 강조했다.
“기대 이상으로요.”
* * *
악령과의 대적, 루블리에와의 말다툼, 그리고 화해와 첫 밤까지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던 새틴은 부모님을 배웅하자마자 따뜻한 욕조에 드러누웠다.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방문하지만 않았더라면 오늘 하루는 누워서 쉬며 보냈을 텐데, 얼떨결에 침착한 척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손님 접대를 하느라 피곤함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원래 그래요.”
목욕 시중을 도우러 들어온 라리가 뜬금없이 위로했다.
새틴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황당해져서 반문했다.
“……뭘 원래 그래?”
“원래 하루 정도는 푹 쉬셔야 하는데.”
“라리, 제발.”
아무리 허물없는 주인과 하녀 사이라 해도 지나치게 부끄러웠다.
새틴은 물속에서 발을 굴렀다. 그러나 라리는 멈추지 않았다.
“마님, 그 방은 육아실로 꾸미는 게 어떠세요?”
“아니야, 그만해.”
“어차피 마님께서 아이를 낳으면 보모는 제가 되어야 하잖아요. 미리미리 준비해 두면 좋죠. 보통은 신혼집 꾸미면서 육아실도 같이 만드는데 마님께서는 신혼 초에 하도 벽을 치셔서요. 솔직히 지금도 꽤 늦은 거예요.”
제지가 통하기는커녕 제풀에 신난 라리가 미래 계획을 중얼중얼 늘어놓기 시작했다. 새틴은 뾰조록한 눈초리로 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