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12)

<52화>

쿵, 쿵, 쿵.

손바닥을 건드리는 진동이 여전했다. 새틴은 아득한 기분이 되어 그 고동을 들었다.

여운이 남아 말을 아끼게 되었다. 지금 이 시간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루블리에는 새틴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뜨거웠다.

이마가, 코가, 볼이, 입술이 홧홧했다. 새틴은 슬그머니 주의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루블리에의 침실은 새틴의 침실과 분위기가 퍽 달랐다.

무채색의 벽은 숨김이 없어 깔끔했고 최소한으로 들인 가구는 직선적이었다. 기사의 침실은 주인의 성격을 꼭 닮아 있었다.

입맞춤 후의 정적은 기묘하게 간질거렸다. 새틴은 한참 만에 조용히 입을 뗐다.

“복도에 걸려 있던 그림들 있잖아, 내가 횃불로 다 태웠어.”

“잘했어.”

아무렇지 않은 반응이 돌아왔다.

새틴은 부끄러움을 감추려 투덜거렸다.

“아, 나 웃긴다. 다 끝났는데 왜 이제 와서 울었지?”

“긴장이 풀려서 그래.”

“내 침실 완전히 망가졌더라. 다 뜯어내고 수리하려면 몇 주는 걸릴 거 같아.”

“오늘 들은 소식 중 가장 기쁜 소린데. 게다가.”

루블리에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이젠 돌아갈 필요도 없지 않아?”

새틴은 짐짓 천연스러운 태도를 꾸며냈던 그대로 멈췄다. 이미 많은 파도가 거쳐 갔으나 가장 큰 파도가 남아 있었다.

머리 꼭대기서부터 쏟아져 내린 물살에 온몸이 휩쓸렸다. 심장이 쿵, 지금껏 없던 기세로 크게 울렸다.

문뜩 엉겁결에 결혼식을 마치고 그와 대면했던 날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델 마레의 이름에 욕심이 났나, 했었다. 새틴은 최고의 신부였고 파수꾼 가문의 명예는 누구라도 원할 것이기에. 그러나 루블리에는 델 마레의 이름값은 중요치 않다고 답했다.

도리어 그는 부부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원한다고 밝혔다. 차라리 재산을, 가문의 결합으로 생길 이득을 원한다고 했다면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고 싶어하고, 또 새틴이 부인으로 있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은 그때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헤어지고 싶다고 이혼장을 들이민 새틴에게 그는 같이 살고 싶다고 말했다.

루블리에가 있었기에 새틴은 그녀를 배신하고 떠난 전 약혼자의 앞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거리낌 없이 경외의 표시를 보였고, 항상 새틴을 위한 선택을 했다.

돌이켜 보면 상상했던 결혼 생활과 지금의 생활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유예한 삼 개월을 넘어서, 삼 년을. 혹은 그 이상까지도.

“나는…….”

새틴은 느리게 서두를 꺼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델 마레 가문의 새틴 아가씨로 돌아갈 거라고 줄곧 믿고 있었어.”

루블리에의 낯빛에 긴장이 어렸다.

전설을 벗어나 현실에 등장한 악령과 맞닥뜨리고도 아무렇지 않게 검을 휘둘렀던 남자가 새틴이 에둘러 언급한 이혼에는 재차 굳었다.

“아무 각오도, 준비도 없이 너와 결혼했어. 전혀 계획에 없던 사건이 내 인생에 벌어졌는데 당연히 겁이 나잖아. 결혼식도 인생의 중대사인데 하루아침에 남편이 바뀌었으니 말이 될까. 쉽게 적응이 될 리가 있어? 나로선 최대한 빨리 내게 익숙한 옛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궁리밖에 없었어.”

“새틴, 내가 잘할게.”

구구절절한 구실 한마디 없이 대번에 돌아온 반응에 새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뭘 얼마나 더?”

알고 있다. 둘 중 부부의 역할에는 루블리에가 훨씬 충실했다.

새틴의 반문에 조마조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던 루블리에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였다.

새틴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 상상을 빌려와야만 해.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정말 하나도 모르니까.”

미루고 미뤘던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으리라.

이제는 갈 길을 정해야 했다.

새틴은 부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려면 아마, 무언가 많은 것들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상상했었다면서. 보여줘. 나한테도 가르쳐 줘. 뭘 상상했었는지.”

난데없이 땅이라도 흔들린 줄 알았다. 번쩍 들린 몸이 어느샌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얇은 잠옷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몸이 바짝 밀착했다. 코가 코를 스치고 뺨이 뺨을 스쳤다.

입술이 입술 위를 스쳤다가 재빨리 머물 곳임을 알고 맞닿았다.

숨이 섞였다. 새틴은 아무것도 분간하려 하지 않았다.

맛을 공유하고 감정을 공유하고 감각을 공유했다.

제 것이 그의 것이고 그의 것이 제 것이다.

가슴이 눌리고 다리의 맨살끼리 문질렸다. 생생한 접촉에 현기증이 몰려들었다.

얕은 신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흘러나오는 소리를 루블리에가 받아 마셨다.

잠시 접촉이 떨어졌다.

새틴은 슬며시 눈을 떴다가 손가락 하나 들어갈 간격도 두지 않고 바짝 붙어 있는 루블리에를 발견했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이 피부를 조심조심 쓸어내렸다.

“네가 너무 생생하니까, 이거 믿어지지가 않는데.”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루블리에가 속삭였다. 사람을 앞에 놓고 도대체 무얼 의심하고 있는 거람.

새틴은 눈썹을 찡그리다가 새의 부리처럼 가볍게 그의 뺨에 입술을 댔다.

“나 여기 있잖아.”

새침한 말투로 일깨웠다. 피식 웃은 루블리에가 입술을 꾹 찍으며 똑같이 돌려주었다.

“예뻤지만, 새삼 더 예쁘네.”

완만하게 도드라진 이마가 예뻐서, 뺨이 붉어서, 콧방울이 동그래서. 그것이 그에게는 입을 맞출 이유가 되었다.

루블리에는 풍부한 은발을 쥐어 그곳에도 입술을 묻었다.

문득 새틴은 머리카락에도 감각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세심하고 상냥한 손길이 흔적을 남기는데 감각이 없을 리가.

루블리에의 손이 하늘하늘한 가운의 끈을 끌렀다.

매듭은 당기면 곧장 풀리게끔 엮여 있었다. 속에 입은 슬립은 안 입으니만 못했다.

종잇장보다도 얇은 천은 몸의 선을 반쯤 내비쳤다.

루블리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슬립이 참 마음에 드는데?”

“라리가 입힌 거야.”

“역시, 네 하녀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야.”

새틴은 눈을 흘겼다.

가운 자락을 건 손가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새틴은 등을 들썩여 옷이 걸리적거리지 않게끔 도왔다.

드러난 살결이 유달리 희었다.

루블리에는 새틴의 손을 가져갔다. 손등에 남기는 키스는 경배의 의미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간지러…….”

짜릿한 전율이 신경을 타고 내달렸다. 루블리에는 멈추지 않고 맥이 뛰는 손목 위로 입술을 옮겼다.

팔꿈치 안쪽, 그리고 그 위의 가장 부드러운 피부를 핥았다.

아아.

새틴은 숨을 들이켰다.

어지러워서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려 했다.

차츰차츰 다가오는 루블리에의 입술도 입술이지만, 아까부터 빈틈없이 맞대고 있던 허리와 그 아래가 더 문제였다.

새틴은 난처해져서 흘끔 곁눈질을 했다. 하복부를 압박하는 존재감이 지나치게 확실했다.

심지어 자꾸 부피를 더해 가 부담스러웠다. 계속 모르는 척을 하자니 이미 한계였다.

“……어떻게 좀 해 봐.”

낯부끄러워서 슬금슬금 엉덩이를 옆으로 밀며 빼려다가 붙잡혔다.

“내가 하고 싶던 부탁이야, 새틴.”

팔 아래 갇혀 새틴은 머리를 들었다. 더운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 이제 도망 못 가. 날 책임져야 돼.”

옆으로 기운 미소가 걸렸다. 루블리에는 제 가운을 대충 벗어 집어던졌다.

끈이 풀려 있어 순식간이었다.

그다음 두 사람의 체열로 미지근하게 데워진 새틴의 슬립을 끌어 올렸다.

허벅지서부터 우묵한 배를 지난 손이 가슴에 머물렀다.

손안에 가슴이 동그랗게 고였다.

아까보다 여유를 잃은 루블리에가 그 정점을 빨아들이는 순간 저릿한 감각이 확 튀어 올랐다.

새틴은 소리를 지를 뻔했다.

흡. 숨을 참고서 손을 움켜쥐었다. 이불이 가득 쥐였다.

성혼 서약을 맺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를 제대로 마주하게 됐다.

완전한 나신에 다리가 절로 오그라들었다.

제 몸도 몸인데, 충실한 기사 생활로 단단하게 다듬어진 루블리에의 몸이 새삼 겁나고 낯설었다.

그는 부드럽고 가느다란 새틴과 완전히 달랐다.

힘이 가득한 근육으로 꽉 조여진 형상은 천재적인 예술가가 정성을 다해 빚어놓은 조각상과 흡사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새틴은 고개를 기웃 꺾고서 나직하게 소곤거렸다.

“지금 와서 할 소린 아니지만 나 좀 무서워지려고 그래.”

처음이다. 두려움은 당연했다.

루블리에가 낮은 음성을 쥐어짰다.

“마찬가지야.”

“너도? 세상 겁날 것 하나 없는 팔라딘이 왜……?”

“내 욕심이 생각보다 큰 것 같아.”

루블리에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저 손만 쥘 수 있어도 행복할 거다.

저 입술에 입 맞출 수만 있어도 행복할 거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건 멋모르던 어린 날의 치기였다.

“상상 따윈 하나도 쓸모가 없어. 실제가 훨씬 아름다워.”

이리 팔 아래 두니 그녀가 저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알겠다.

늘 드레스 속에 감춰진 몸은 안타까울 만큼 약하고 여리게만 보였는데, 온전하게 만난 그녀는 보드랍게 솟은 곡선을 지녔다.

요요한 분위기가 눈을 홀렸다.

오래 참아온 갈증이 일었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잇자국이 남은 가슴을 갈급하게 베어 물었다.

새틴이 몸을 들썩였다가 팔을 길게 뻗어 루블리에의 뒷머리를 감쌌다. 

밤은 이제야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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