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12)

<51화>

“뭐?”

“그리고 지금도 무서워하고 있잖아, 그놈을. 만약 악령이 또 나타난다면 넌 그때도 무서워하겠지.”

악령을 잡긴 했으나 놈이 두려운 존재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당연했다. 루블리에처럼 숙련된 기사가 아닌 이상 검을 휘둘러 악령을 제압하고 불을 질러 태워버리는 방법은 불가능하니.

새틴은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새틴. 난 너에게 화가 난 게 아냐. 화가 났다면…… 나에게겠지.”

새틴에게 달려들고 있는 악령을 목도한 순간 너무도 많은 감정이 들었다.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거기에 있어서, 그게 꼭 제 잘못인 것 같아서 마음이 덜컥 뒤집혔다.

악령이 이 집에 어떻게 들어왔지, 하는 의문보다 새틴이 저렇게 위험해질 때까지 무얼 하고 있었나 하는 자괴감이 더 컸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째서?”

새틴은 목소리를 낮추어 되물었다. 고요함을 해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루블리에는 덤덤히 응했다.

“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면 다 내 탓이니까.”

의외의 답이라 얼떨떨했다. 새틴은 이번에야말로 멍해졌다.

루블리에의 한 치 틈도 없는 엄격한 어투가 저를 당혹스럽게 했다.

“……뭘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얘기해?”

애초에 문을 열어 악령을 끌어들인 사람은 디번이지만, 루블리에를 데려오라고 사용인들을 죄다 내보낸 사람은 자신이었고 악령과 남겠다고 자원한 사람도 저 자신이었다.

여기 어디에 루블리에의 잘못이 있던가.

“그러겠다고 약속했었으니까. 새틴, 네 무사는 내 의무야.”

“네가 팔라딘이라서?”

“네 남편이라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목전에 들이닥친 곤란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한 이 결혼이 루블리에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는 사실을 종종 느끼곤 했으나 문득 그 무게가 확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 팔라딘답지 않은 마음가짐이겠지. 하지만 나도 욕심이 있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이 내 사람, 내 가족, 내 친구가 누구보다 더 안전하기를 원해. 나는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거다. 너는 그저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새틴은 침묵을 지켰다. 루블리에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 아래 감춰진 눈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손은 오랫동안 이마에 머물렀다.

“무섭고 위험한 일은 내 몫이야. 새틴, 나는 네가 방치됐던 오늘에 화가 나.”

오묘했다. 루블리에는 새틴이 방치됐었다고 표현했지만, 새틴은 정반대로 느꼈다.

방치당했고, 그로 인해 겁먹은 사람이 어쩐지 루블리에처럼 보였다.

새틴은 천천히 생각을 골랐다.

“……있잖아. 삼십 분이었다며?”

서두를 열고 보니 다음 이야기는 좀 더 쉽게 흘러나왔다.

“난 몇 시간을 악령한테 쫓겨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목욕하면서 라리한테 물어보니까 우리 둘이 악령이랑 있었던 시간은 고작 삼십 분이었다는 거야. 너는 삼십 분만에 나한테 왔던 거더라.”

기적이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 이름을 불렀더니 그는 정말 그 자리에 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간조차 아까워, 곧장 창문을 깨부수며 나타났다.

여태껏 술렁거리던 마음이 놀라우리만치 잠잠해졌다.

루블리에는 위험해지면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잘 지켰다.

새틴은 짧은 간격을 두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 악령이 날 덮치려고 했을 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분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꼭 심연의 파도 앞에 내몰린 듯했다.

막막하도록 거대한 물살이 저를 쓸어버릴 기세로 닥쳐왔었다.

그러나 그 파도는 새틴 대신 악령을 집어삼켰다.

공포가 안도감으로 탈바꿈하던 극단적인 변화는 루블리에로 인해 가능했다.

“네가 딱 보인 순간 알았어. 난 살았구나. 그러니까 너는 충분히 해줬어.”

“새틴.”

“……고마워.”

아직 어색함이 남아 머뭇거리긴 했지만 말을 끝내고 나니 역시 이게 옳다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화를 내고 누군가의 책임을 논할 필요가 없었다. 잘 끝났으니까.

그러니 악령에게 제대로 대처했던 저 자신은 대견해하고, 적절한 시간에 나타나 구해준 그에게는 고마워하자.

새틴을 가로막고 섰던 루블리에가 서서히 팔을 내렸다. 무수한 감상으로 흐트러진 눈빛이 새틴을 향했다.

덤덤하게 감당하기엔 그 빛깔이 너무도 묵직했다. 새틴이 눈을 내리깔려는 찰나, 그는 곧장 새틴을 당겨 끌어안았다.

“오늘 저 악령은 네가 잡은 거야. 너 아니었으면 누군가 더 다치는 사람도 나왔겠지.”

걸친 듯 만 듯 얇디얇기 그지없는 가운 위로 더운 체온이 자리했다.

“네가 제일 용기 있었어. 네가 다 했어.”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그 말을 돌고 돌아 이제야 들었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잔뜩 고여 있는데, 그 말들이 제각각 가슴 속에서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도리어 말문이 막혔다.

“넌…….”

목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만약 루블리에가 악령을 없앤 직후 같은 칭찬을 했다면 새틴은 뿌듯하게 듣고 이날을 마무리하는 기억 중 하나로 대충 밀어두었을 터였다.

하나 지금껏 힐난하는 척 속내를 감추고 있던 남자의 입에서 마침내 나온 진심이었다. 언어의 깊이가 너무도 달랐다.

사용인들이 울고 라리가 울어도 덤덤하게 안 울었는데, 느닷없이 눈가가 그렁거렸다.

악령이 저를 잡아먹겠다고 날아들던 순간에도, 루블리에가 창문을 건너 달려 들어오던 순간에도 꿋꿋했는데 갑자기 지금 가슴이 울컥 북받쳤다.

새틴은 억지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다.

“……되게 약았다. 지금 그런 소릴 하면 어떡해.”

얼굴을 숙이고 다급히 눈물을 닦으려 했으나 루블리에가 더 빨랐다.

그는 새틴의 턱을 들고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새틴은 기를 쓰고 울지 않으려 참았다. 그러나 시도는 거기에서 그쳤다.

루블리에가 입술로 눈꺼풀을 눌렀다. 새틴은 어찌할 바 모르다 눈을 감았다.

눈가에 일렁일렁 고인 눈물이 사라졌다.

울지 말라는 말보다, 울어도 된다는 말보다 훨씬 직관적인 방식의 표현이었다.

언제든 기꺼이 눈물을 대신 마셔주겠다고.

그의 입술이 젖은 속눈썹을 건드렸다.

새틴은 화들짝 눈을 떴다. 얼굴 바로 앞에 루블리에가 있었다. 그 큰 몸을 새틴에게 맞추어 낮게 구부린 채로.

여러모로 어지러운 밤이었다.

이상했다. 이건 이상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예전이었으면 일단 도망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텐데, 실제로 코끝만 살짝 스치고도 더럭 기겁해 달아났던 날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가 겁나지 않았다. 불쾌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았다.

새틴은 분주하게 해답을 찾아다녔다.

악령을 겪어서 그래. 그럴 거야.

이미 그때 놀랄 만큼 놀라서 이젠 더 놀랄 기운이 없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러니까…… 이 남자를, 루브를.

“내가 약아서 싫어?”

상념을 깨우며 나직한 속삭임이 흘러왔다. 새틴은 커다랗게 뜬 눈으로 루블리에를 올려다보았다.

색이 신비롭게 뒤섞인 눈동자 속에 제 눈부처가 맺혀 있었다.

하여 그의 눈빛을 들여다보는 것이 꼭 제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던 의문이 일시에 사라졌다. 답은 너무나도 명료했다.

새틴은 숨을 가다듬었다. 자그맣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그에게 닿았다.

“너는 답을 알고 있잖아.”

마치 신호와도 같았다.

루블리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입술이 포개졌다. 새틴도 더는 헤매지 않았다.

눈물로 촉촉하게 젖은 눈썹 위를 조심스럽게 내리누르던 입술의 감촉이 여전히 선명했다. 새틴은 그가 가르쳐 준 그대로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으면, 심장이 울렁일 것 같으면 그저 눈을 감으라고. 그러면 된다고.

시야가 어두워지니 다른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도톰하게 도드라진 아랫입술을 살며시 훑고, 부드럽게 빨아들이다 놓아주는 촉감이 짙었다.

입술을 따라 잔잔하게 온기가 찍혔다. 가슴이 간지러웠다.

체온이 잠시 떨어졌다.

“……새틴.”

낮은 음성이 귓가에 감겼다. 새틴의 기색을 살피는 듯했다. 새틴은 멈추고 있던 숨을 짧게 내쉬었다.

다행이다.

새틴은 안도했다. 루블리에가 결혼을 훼방 놔줘서 진심으로 마음이 놓였다.

실로 억울할 뻔했다. 이런 걸 의무감에 해야 했다면, 부부이기에 몸을 부딪는 과정의 일환으로 여기며 과제처럼 치렀다면 얼마나 아까웠을까.

루블리에는 새틴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큰 손이 목 뒤와 뒤통수를 한꺼번에 감쌌다.

열기 스민 입술은 안온하고 다정했다. 그 감각에 새틴은 기꺼이 응했다.

그가 속입술을 매만지듯 파고들었다. 약하고 녹녹한 살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벌어지며 접촉을 받아들였다.

한숨에 신음이 섞였다. 머릿속이 뭉그러졌다. 이성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남은 건 오로지 본능에 가까운 감정뿐이었다.

갈증을 나누고 열을 나눴다. 시간을 헤아리지 않았다. 그저 이 아득한 세계를 갈구하기만도 바빴다.

다른 모든 상념들은 불필요하게만 느껴졌다. 제 낯섦이나 서투름을 걱정할 정신도 없이 새틴은 그가 인도하는 길로 무작정 이끌려갔다.

무엇이든 좋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덜컥 두려워질 정도로 좋았다.

이렇게 좋으면…… 어떡하지?

내가 이상한 건가, 이 남자가 이상한 건가, 혼란스러웠다. 새틴은 한없이 얼떨떨한 심정에 젖어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반드르르 젖은 입술이 평소보다 붉어 야릇했다. 제 색이 옮아간 듯했다. 어쩌면 그의 색도 제게로 옮아왔을까.

새틴은 멍하게 입술을 매만졌다.

“너 처음 아니지?”

질문은 불쑥 튀어 나갔다. 낯선 감정이 당혹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반쯤은 실없는 소리였다.

루블리에가 입가를 당기며 웃었다.

“글쎄. 한 이백 번쯤?”

“뭐?”

새틴이 당황하자 루블리에가 장난스럽게 제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이 안에서.”

“아, 싫다.”

이번엔 루블리에가 당황할 차례였다.

“왜?”

새틴은 일부러 새치름하니 표정을 다잡았다. 가슴께를 눌러 진정시키며, 뾰로통한 어조로 톡 대꾸했다.

“심장이 왜 이렇게 뛰는 거야?”

루블리에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새틴의 손을 가져다 제 왼쪽 심장 위에 댔다.

쿵. 손바닥에 파동이 번져왔다. 크고 묵직한 울림은 계속해서 겹쳐졌다. 쿵, 쿵, 쿵.

“나는 원래 그랬어. 널 보고 있으면 언제나, 아주 오래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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