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112)

<50화>

“어……. 이거 내 피 아니야.”

새틴은 뺨을 매만져 확인하려는 루블리에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검붉게 말라붙은 핏자국을 쓸어내렸다. 딱딱하게 굳어 닦이지도 않았다.

뺨을 누르는 손끝이 가늘게 일렁였다.

네가 아플까 봐 얼마만큼의 힘으로 만져도 되는지 모르겠다던 루블리에의 말이 맴돌았다.

그래서일까. 그의 손에 힘이 실린 것도 같았고, 차마 싣지 못한 것도 같았다.

“루브.”

새틴은 루블리에의 손을 제 두 손으로 붙잡았다.

눈길이 교차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는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걸까.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고집스럽게 물린 입매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너.”

“못 걷겠어, 나.”

혼란스러운 끝에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새틴은 루블리에의 말허리를 끊고 멍하니 제 말만 했다.

“나 다리에 힘이 풀렸나 봐.”

내내 몸을 굳게 만든 긴장이 사라지면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고작 한 발짝만 떼려는데도 다리가 좀처럼 움직이지를 않았다.

숨을 길게 내쉰 루블리에가 대답 대신 새틴의 등과 무릎 아래로 팔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단단한 팔이 어깨와 등을 한꺼번에 지탱했다.

체격 차이가 크다 할지언정 그래도 성인 한 사람의 무게인데 그에게 부담이 되는 건 아닐까 의심했던 새틴의 우려는 기우였다.

루블리에는 새틴을 아주 쉽게 들었다. 오히려 시야가 제 키보다 훅 높아진 탓에 기겁한 새틴이 엉겁결에 발버둥을 칠뻔했다.

새틴은 루블리에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그렇게 의지하니 한결 안심이 되었다.

“주인님, 마님, 무사하세요?”

동시에 사용인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문밖에서 방 안의 소요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째 깔끔하고 멀쩡한 모습을 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신발도 신지 못하고 뛰어다녀 흙투성이의 발에, 머리에는 뽀얀 잿가루를 얹고 있었다.

악령을 잡아 없앴으니 축하할 만도 한데 그보다는 죄 엉망이 된 몰골들에 기가 막혔는지 여기저기서 훌쩍훌쩍 울음을 터뜨렸다.

새틴이 악령과 갇힌 뒤부터 밖에서 안절부절못했던 라리가 가장 크게 울었다.

무사히 구출된 새틴의 모습에 기뻐하면서, 더불어 결혼식 이후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두 주인에게 안도해 웃으면서도 우느라 아주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참으로 악몽보다 더한 밤이었다.

* * *

디번은 얼굴과 목을 많이 상했지만 어찌 됐든 목숨만은 붙어 있었다고 했다.

사용인들 대부분이 루블리에를 찾아 뛰어다니는 동안 남은 일부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디번을 수레에 싣고 근처 목장으로 데려갔다는 소식을 라리가 전해주었다.

디번을 제외하면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용인들이 준비해 둔 뜨거운 물에 들어가 얼굴의 혈흔과 매캐한 냄새, 잿가루를 씻어내고 있던 새틴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목장? 환자를 왜 목장으로 데려갔어?”

“이 근처에 의사가 없으니까요. 의사를 데리고 오려 해도 말은 팔라딘께서 타고 다니는 녀석을 제외하면 악령이 다 물어 죽였죠, 집안 상황이 어찌 돼가는지도 몰라서 일단 그리로 데려갔대요. 가축을 잔뜩 키우는 집이니까 가축들 다치면 치료하듯 사람도 봐줄 수 있지 않나 해서요.”

한참 울더니 어느 정도 진정한 라리가 말을 하다 말고 울적하게 한숨을 흘렸다.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근데 다행이라고 해도 되나 모르겠어요…….”

“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다행이라고 해도 되나 모르겠다니?

“물론 일단 저희 다들 다행이라고 말은 했죠. 어쨌든 살긴 살았으니까요. 근데 그 흉이요, 살을 파먹고 들어가서 안 없어지게 생겼더래요.”

“평생?”

“예에, 평생……. 의사가 아니라도 알겠다대요. 살이 다 우그러져서 얽은 흉이 남겠다고요. 그건 어쩔 수 없으니 그렇다 쳐도 잘려 나간 귓바퀴가 다시 생겨나진 않을 거잖아요.”

맙소사. 새틴은 말을 잃었다.

“실려 가는 동안 아파 죽겠다고 울다가 좀 제정신이 들었나 봐요. 팔라딘께서 절대 나가지 말라고 했던 엄명을 어겨서 마님까지 위험하게 만들 뻔했으니 처벌받는 건 아니냐며 무서워하더래요.”

자기 할 일을 제대로 못 한 줄 알고 저지른 실수기도 했지만, 결국 그 착각이 모두를 위험하게 만든 것도 맞았다.

그래도 평생 악령이 남긴 상처를 얼굴에 달고 살아야 한다는데 그 외의 어떤 책임을 더 묻자니 껄끄러웠다.

더구나 디번이 있었기에 악령의 약점도 알아차렸었다.

“날 밝으면 의사를 불러서 그리로 보내줘.”

“네에.”

“치료가 다 끝난 뒤에는 그간 일한 퇴직금 받으러 한번 오라고 전하고.”

라리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해고예요?”

“당연히 해고야.”

“그래 봬도 디번이 카 딜론 가에서부터 오래 마구간 일을 맡았다던데요……. 뭐, 조심성 없게 굴어 마님까지 위험하실 뻔했으니 돌아온다고 해도 팔라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겠네요.”

라리가 조용하게 속닥거렸다.

“밖에서 마주쳐서 모셔온 사람들 얘기 들어보니까 표정이 정말 무서우셨다고 하더라고요. 화 많이 나셨나 봐요.”

“화? 화낼 일이 뭐가 있어서? 제일 고생한 나도 아무 말 안 했잖아. 루브도 아깐 별말 없던데.”

“아까는 악령 문제가 시급했으니 내색을 안 하셨겠지만, 평소 마님 걱정을 많이 하시는 분이잖아요. ……마님을 왜 안 말렸냐고 조금 전에 사람들 불러서 꾸중하셨대요. 생전 안 그러셨던 분이라던데요.”

“그래?”

하녀로 살면서 윗사람 눈치 보는 데에는 통달한 라리였다. 라리는 숙련된 솜씨로 옷을 입혀주었다.

“네, 그러니까 얼른 가보세요.”

새틴은 제 기억 안에 익숙하게 남아 있는 얇은 슬립을 만져보다 황당해져서 라리를 쳐다보았다.

“이게 뭐야?”

“팔라딘께서도 화를 낼 땐 내시는 분 같고, 더구나 마님은 절대 어디 가서 지는 분이 아니시잖아요. 어차피 싸우실 거면 생산적으로 싸우셨으면 해서요.”

“그게 옷이랑 무슨 상관이야.”

“이번엔 싫으셔도 어쩔 수 없어요. 이게 그나마 옷장 깊숙이 있어서 냄새 안 밴 거예요. 나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집이 온통 엉망이거든요.”

라리의 말 그대로였다. 한바탕 소란을 벌인 집은 군데군데 그을린 데다 악령과 불이 만든 악취가 남아 있었다.

특히 새틴의 침실이 가장 크게 망가졌다.

매운 화기가 잔뜩 배어 들어가기만 해도 눈이 따가웠고 소사한 악령이 남긴 시커먼 그을음은 사용인들이 걸레를 가져와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닦이지 않았다.

새틴은 터벅터벅 루블리에의 침실로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목욕을 마친 루블리에가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새틴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새틴을 본 루블리에가 일순 멈칫했다.

그러나 사용인들을 불러다 화를 냈던 그 못마땅함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는 냉정하게 첫마디를 뗐다.

“새틴. 다시는 이런 위험한 짓 하지 마.”

새틴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악령이 나타났는데 잡아야 할 거 아냐.”

“잡는 건 내 일이야. 너한테 감수하라고 안 했어.”

“그래도 빨리 잡을수록 좋은 거잖아. 잡았으니 된 거고.”

잡았으니 그만이라는 새틴의 태도가 오히려 루블리에의 화를 부채질했다.

본디 인상이 세서 학생들이 뒤에선 경외하면서도 앞에선 슬슬 피해 다녔던 루블리에였다. 검푸른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새틴, 우리 하인들이 목이 터져라 날 찾으면서 네가 악령을 유인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그걸 듣는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

어조가 확연히 달라졌다. 언짢은 티가 여실했다.

평상시에는 사용인들에게 너그러운 주인이라 해도 그는 본디 고위 귀족이자 기사였다. 타고나기를 기가 센 사람이다.

그 기운이 새틴에게 향하니 당연히 압박감이 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새틴이었다. 신분으로도 성격으로도 누구 못지않았다.

새틴은 고개를 번뜩 들고서 따지듯 기울였다.

“……그러면 너는 우리끼리만 있는데 악령과 마주친 그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 눈앞에서 디번의 목과 머리를 물고 뜯는데, 나더러 살려달라고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내 심정은 아니?”

“그렇다고 악령이 호시탐탐 노리는데 네가 왜 위험을 자처해! 너는 그냥 오늘 운이 좋았을 뿐이야. 디번이나 말이 당한 해코지를 네가 당할 수도 있었어. 그걸 몰라?”

마구간의 말들은 모조리 몰살당했고 디번은 얼굴의 일부를 잃었다.

새틴은 문득 저도 모르게 거울을 통해 제 모습을 확인했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급히 머리를 흔들어 끔찍한 상상을 털어냈다.

“너 지금 나 겁먹으라고 그런 소릴 하는 거니? 협박해?”

고집 센 두 사람이 만났다. 둘 다 지지 않으려 드니 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루블리에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네가 감당하지 못할 위험은 무릅쓰지 말란 소리야.”

“그럼 악령이 돌아다니게 풀어줘? 그놈이 언제 어디서 어떤 짓을 할 줄 알고?”

“바깥에는 우리가 있었어. 훨씬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신성 기사단이 돌아다녔다고.”

“기사단 눈에 악령이 띌 때까지 방치해? 그게 언제가 될지 어떻게 알아서? 당장 우리 집에 악령이 나타났는데?”

“문을 열지 말라고 했잖아. 거기다 너는 겁도 없이 악령을 끌어들였어. 너 자신을 미끼 삼아서.”

“그래, 문단속을 제대로 못 한 데엔 내 잘못도 있겠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가지고 탓해 봤자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악령은 나타났고, 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네가 하지 않아도 됐어.”

“무슨 말이 그래? 팔라딘이 아닌 나도 악령이 오래 돌아다니면 피해가 점점 커질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런데 너는 팔라딘이잖아. 대체 무슨 책임감으로 그 지위에 있는 건데? ……난 내가 잘했다고 생각해. 그래서 널 이해 못 하겠어.”

누구도 양보할 생각이 없으니 말다툼은 평행선을 달렸다.

새틴은 루블리에를 쏘아보고서 침대로 걸어가 델 마레의 성물을 챙겼다.

“그만두자. 내가 왜 이런 잔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네. 난 지금 피곤해. 너, 하인들한테 화풀이했다며? 나한텐 하지 마.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처를 했어. 아무도 너에게 화풀이를 들을 이유가 없어.”

루블리에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나가려는 새틴의 앞을 가로막았다.

“새틴.”

“비켜.”

“네가!”

목소리가 울렸다. 새틴은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루블리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눈을 뜨고 마른세수를 했다.

“네가 무서워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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