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12)

<49화>

잠시 미끼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악령도 뭐든 집중할 거리가 있어야 이 방을 빠져나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괜찮아. 되뇌면서 새틴은 쿵쿵 울리는 가슴을 다독였다.

“마님, 정말 아무 일 없으신 거죠?”

“그렇다니까.”

라리가 연신 훌쩍거리며 새틴을 불렀다. 새틴은 어깨를 움츠리고 반사되는 빛 아래로 몸을 구겨 넣었다.

악령은 새틴에게 바짝 좁혀들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놈이 묻혀 온 핏물이 진한 색으로 손등에 말라붙어 있었다.

불빛이 이리저리 맺혔다. 언제 어디로 악령이 달려들지 모르기에 그저 끝없이 방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생살을 뜯던 악령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잠깐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다음 먹잇감은 제가 될 것이다.

“저리 가! 가라고!”

악을 쓰면서 놈을 밀어냈다. 징검다리를 밟듯 악령이 그늘을 건너다녔다.

등불이 악령을 스칠 때마다 코끝이 아린 악취가 풍겼다. 약 오른 악령이 바득바득 새틴에게 달라붙다 숨을 고르며 물러섰다.

놈은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무르며 움직이지 않았다.

새틴은 악령을 노려보았다.

어쩔 생각이지?

악령은 뒤로 물러났다.

마치 새틴이 악령을 꾀기 위해 물러났듯이 이번에는 악령이 새틴을 꾀듯 물러났다.

새틴은 무릎을 꿇은 채로 동향을 살폈다.

조금만 떨어져도 암흑이 짙어, 까딱했다간 악령을 놓칠 것만 같았다.

새틴은 악령이 물러나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송연함을 느꼈다.

벽의 반대쪽에는 커튼으로 감춘 창문이 있었다.

놈이 저리로 탈출하려는 건 아닐까. 그럼 어떻게 잡아야 하지?

커튼이 펄럭였다. 새틴은 가슴이 철렁하도록 당황해 몸을 일으켰다.

투웅, 창문이 울렸다. 퉁, 투웅, 퉁. 몇 번인가 흔들리던 창문이 느닷없이 활짝 열렸다. 새틴은 기겁해 숨을 들이켰다.

창문은 전부 잘 잠가 두었을 텐데?

의문을 품자마자 아차 했다. 그날 이후 쓰지 않은 방이라 사용인들이 다들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망이구나.

경악하며 벌떡 일어나다가 새틴은 등줄기를 관통하는 깨달음에 다시 주저앉았다. 검은 형체가 새틴을 향해 쇄도했다.

도망이 아니었다.

악령이 몰고 온 바람이 새틴의 전신에 들이쳤다.

등잔의 불이 꺼지며 방은 삽시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몸을 지켜줄 단 한 톨의 빛도 없었다.

모든 곳이 악령의 놀이터였다. 피비린내 밴 악령의 숨이 얼굴에 닿았다.

이 순간 머릿속을 채우는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아악! 루브!”

비명이 터져 나온 동시에 열린 창문을 둔탁하게 박차며 뛰어든 인영이 보였다.

험한 기세에 떠밀린 유리창이 와르르 부서졌다. 번뜩임을 매단 날붙이가 새틴을 덮치려던 검은 형체를 그어냈다.

그 예리함, 그 단호함, 그 믿음직스러움에 새틴은 입을 막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참고 있던 눈물이 나려 했다.

“새틴, 다치지 않았어?”

말 등에서 창문을 단번에 뛰어넘은 루블리에의 숨이 거칠었다. 새틴은 울먹였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이제 와!”

“내가 오늘 너에게서 떨어지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런 젠…….”

루블리에가 나직이 욕을 삼켰다.

검에 휘감긴 형체가 벽과 바닥의 틈새로 숨어들었다. 악령은 유연하게 움직였다.

날 수도, 길 수도, 숨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새틴, 거기 숨어서 나오지 마.”

루블리에의 지시에 따라 새틴은 주춤주춤 엉덩이를 밀며 화장대 아래로 기어들었다. 등에 딱딱한 벽이 닿았다.

거기서 루블리에와 악령의 상황을 주시하려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마자 낮은 천장에 머리를 부딪혔다. 골수까지 울리는 통증에 절로 악 소리가 났다.

“악!”

“왜 그래, 어디 다쳤는데? 이놈이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루블리에가 다급하게 물었다.

“안 다쳤어. 괜찮아.”

새틴은 몸을 바닥까지 낮추고 시야를 확보했다.

잠깐 놓쳤더니 악령이 어디에 있는지 그새 알 수 없게 되었다.

겹겹이 깔린 음영을 더듬느라 엎드려 있던 새틴은 일순 목덜미를 스치는 오한에 상체를 일으켰다.

만약 놈이 바닥에 있다면 이 자세는 굉장히 위험했다.

“루브, 악령은 그림자에 숨을 수 있어.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하고, 밑에서 발을 잡아챌지도 모르고…… 위에!”

천장에 고여 있던 어둠이 아래로 훅 떨어져 내렸다.

새틴은 비명을 터뜨렸다. 거취를 예측하고 있던 긴 검이 악령의 진로를 틀어막았다.

악령은 검을 피해 하강하며 새틴이 숨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루블리에가 그걸 보아 넘길 리 없었다.

즉시 검이 놈의 몸뚱이를 꿰뚫었다. 악령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췄다.

아. 새틴은 입을 벌렸다.

된 건가? 잡은 건가?

“루브!”

밤에 어슴푸레하게 젖은 악령이 느닷없이 몸을 쏘아 올렸다. 언제 꿰뚫렸냐는 양, 놈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새틴은 기가 질려 중얼거렸다.

“소용이 없나 봐.”

“완전히 찢어 놔야겠어.”

싸늘하게 말을 받은 루블리에가 기회를 잡고 검을 날카롭게 그었다.

섬뜩한 빛에 몸이 길게 갈린 악령이 키이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찢긴 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결합되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눈으로 보았다.

완벽한 복구였다.

루블리에의 검은 악령을 주저 없이 몰아붙였지만, 악령은 마치 안개와도 같아서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맙소사…….”

악령이 밤의 자락처럼 몸을 펼쳐 검을 휘감았다.

팔라딘이 법황의 검이자 무력의 상징이라면, 악령은 꼭 마귀가 흔드는 깃발과도 같았다.

아주 오래되어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전설이 나 아직 여기 남아 있었노라며 자신을 과시하는 듯했다.

검은 몇 번이나 악령을 밀어내고, 몸을 가르기도 했다.

놈이 살과 뼈를 가진 평범한 짐승이었다면 죽었어도 벌써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하나 연기인 양 떠다니는 몸은 검으로 저밀 살과 뼈가 없어서 그저 움직임을 저지하거나 잠시 흐트러뜨리는 정도가 끝이었다.

루블리에가 혀를 찼다.

“아주 여러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야 하나?”

새틴은 불안한 심정으로 악령의 꼬리를 쫓았다.

그런다고 될까? 그렇게 해서 죽는다면 진작 죽지 않았을까? 도대체 저놈을 무슨 수로 잡아야 하지?

검에 찢겨도 살아남고, 불은.

새틴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루브. 시간 좀 끌어봐.”

그래, 검으로 부족하면 불까지 쓰면 된다. 새틴은 화장대의 서랍을 통째로 꺼내 엎었다.

안에 쌓아 놓은 잡동사니들이 데구루루 굴러갔다. 새틴은 엎드려 바닥을 더듬더듬 훑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어달라는 요청에 루블리에는 두말하지 않고 아예 악령이 새틴 쪽으로는 접근하지도 못하게 막아섰다.

새틴이 무엇을 하려는지도 모르면서 집중력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인지 질문조차 없었다.

덕분에 악령을 경계하지 않고 제 판단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레이스 매트, 잉크병, 동전들, 빗.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 모를 잡다한 물건들 사이에서 새틴은 작은 성냥갑을 찾아냈다.

집히는 대로 서너 개의 성냥을 한꺼번에 쥐고 동그란 머리를 북북 그었다.

불꽃이 튀었다. 열기가 훅 끼쳤다.

조그만 빛에도 방을 채운 그늘이 성큼 물러났다.

“그늘을 줄이면 악령은 갈 곳이 없어져. 내가 해봤어.”

“어떻게 알아냈어?”

“네가 저번에 마귀는 그림자에 스민다는 말을 했던 게, 아까 갑자기 생각났어서.”

새틴은 등잔의 심지에 불을 옮겼다. 방이 파뜩 환해지면서 운신의 폭이 좁아진 악령이 몸을 줄이며 갈래갈래 남은 그림자를 밟았다.

“그럼 놈을 태워버리면 되겠군.”

불필요한 설명 없이도 마음이 통했다. 루블리에 역시 파수꾼 가문의 후손이었다.

새틴은 악령을 차츰차츰 몰아갔다. 라리와 둘이 해온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새틴이 만들어 준 기회를 루블리에는 놓치지 않았다.

반사된 빛을 품은 검의 궤적이 악령을 침대 위로 내리꽂았다. 검에 관통된 몸체가 일순 흐트러졌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듯이, 악령은 검은 안개와도 같은 몸을 굼틀거려 검을 벗어나려 했다.

루블리에가 새틴을 향해 팔을 뻗었다.

새틴은 미끄러지듯 달려가 루블리에의 손에 등불을 쥐여주었다.

그는 칼끝으로 찍어 누른 악령에게 주둥이를 기울여 등잔의 기름을 쏟아부었다.

그다음, 등불이 수직으로 낙하했다.

모든 것은 한순간에 이뤄졌다.

불길이 침대에서 천장까지 확 솟구쳤다.

키아아악! 악령이 단말마를 내질렀다.

숨을 확 조여오는 악취가 뿌옇게 공간을 채웠다.

창문이 닫혀 있었더라면 일시적으로 질식하지 않았을까 싶은 독한 냄새였다.

비위가 뒤집혔다.

헛구역질을 일으키는 새틴의 코와 입을 루블리에가 틀어막았다.

그는 악령과 가까이 선 자리에서 꼼짝 않고 놈이 완전히 불타 사라지는 장면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악령이 머문 자리에는 회색의 연기와 냄새만 남았다.

찰나의 화재라 불은 벽과 천장으로 옮겨붙기 전에 꺼졌다.

침대에 남은 불꽃을 루블리에가 툭툭 발로 밟아 껐다.

새틴은 악령이 몸부림친 흔적대로 가득 앉은 그을음을 멍하게 응시했다.

놈이 남긴 잔해는 침대서부터 벽을 통해 천장까지 뻗어 있었다.

마치 불타오르면서 지른 비명이 형상으로 남은 듯했다.

“잡은 거야?”

“사라졌어.”

“다신 안 나타나?”

“아마도 그렇겠지.”

루블리에가 벽에 새겨진 흔적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새틴은 우뚝한 루블리에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창가 근처에 바스러진 유리 조각이 알알이 반짝거렸다. 신기했다. 기분 탓인가.

방으로 들이치는 달빛이 아까보다 훨씬 맑게 느껴졌다.

루블리에는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아무 말이 없는 새틴을 돌아보니,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창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얀 뺨 위를 길게 가로지른 짙은 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더럭 놀라 새틴의 얼굴을 제게로 돌려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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