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12)

<48화>

“저놈은 불을 싫어해. 그러니까 일단 불이 많이 필요해. 이거 봐, 불을 잘 쓰면 좁은 공간에 가둘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우리 집으로 유인해서 가두고 있는 동안 너희들은 불을 들고 뛰어나가서 루브를 찾아와. 순찰하는 영역을 집에서 멀지 않게 잡았다고 했었어. 무슨 일이 있으면 오겠다고 약속했다구. 그러니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면 루브가 듣고 올 거야.”

“하지만 마님, 장작은 바깥의 창고에 있어요. 가지고 나갈 불같은 게 여긴 없어요.”

기름 등잔 정도로는 모자라다. 장식장 안에 성냥이 있긴 했으나 성냥의 불이야말로 생명력이 지극히 짧았다. 좀 더 오래 활활 탈 것이 필요했다.

새틴은 집을 다급히 휘둘러보았다.

나무로 된 가구? 몇 개 있었다. 그러나 부수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릴 테다. 더구나 끼얹을 기름도 필요했다. 등잔의 기름을 나누어 쓰기에는 턱없었다.

그런 것 말고 뭔가 쓸 만한 물건이……. 아. 새틴은 벽면을 장식한 명화들을 쳐다보았다.

“유화 물감은 기름이잖아?”

그림을 그리기 전 화가들은 캔버스에도 기름칠을 한다. 게다가 액자의 프레임은 가느다란 데다 가구에 비하면 훨씬 성겼다. 순식간에 구상이 끝났다. 프레임을 부수어 막대로 쓰고 캔버스를 묶어 연료로 쓰면 완벽했다.

“예? 마님? 이거 다 진품이에요!”

카 딜론 가에서 온 사용인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들은 이 집을 온갖 장식품으로 꾸미는 데 얼마나 막대한 예산이 들었는지를 잘 아는 이들이었다.

“그래, 카 딜론 가문도 자존심이 있지 설마 여기다 모조품을 걸었겠어? 저 위에 있는 것도 다 내려. 라리, 잠깐 저놈 잘 구슬리고 있어 봐.”

등잔을 라리의 손에 넘긴 새틴이 직접 명화들을 끌어내렸다.

“빨리들 도와!”

나서서 액자를 팍팍 밟고 내리쳐 부수자 어안이 벙벙해 있던 사용인들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액자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파편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얼마 안 있어 형체를 잃은 명화들이 훌륭한 불쏘시개들로 변했다. 모두가 크고 작은 불쏘시개를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새틴도 촛대처럼 조그만 것을 하나 만들어 챙겼다.

“발 조심하고 불도 조심해.”

“이제 어떻게 해요?”

“문 열고 악령을 이 집으로 끌어들일 거야. 불 아래 있으면 안전하니까 너희들은 걱정 말고 나가서 루블리에를 찾아와.”

“마님은요?”

“나는 라리와 악령을 붙들고 있을게.”

“그러다 마님이 큰일 나시면요!”

“그러니까 큰일 나기 전에 루브를 데려오면 되잖아. 냄새 매우니까 빨리 뛰어. 안 그랬단 여기서 우리가 먼저 질식해서 죽겠어. 그리고 혹시 디번의 숨이 아직 붙어 있는지 확인하고 숨을 쉬고 있으면 돌봐줘. 지금!”

짧은 신호와 함께 새틴이 문을 활짝 열었다. 문가에 도사리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그늘진 벽면을 타고 화르르 밀려왔다.

꺄악, 꺅 비명을 지르면서도 사용인들은 사전에 언질을 받은 대로 불 아래 숨어 있다 뛰어나갔다.

“주인님!”

“어디 계세요!”

루블리에를 찾는 고함이 우렁우렁 퍼져나갔다. 저 정도면 루블리에가 금방 듣고 돌아올 것 같아 안심이었다.

악령과 오래 버티지 않아도 돼.

새틴은 스스로 위안을 찾으며 허공을 휙휙 스쳐 가는 검은 형체를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눈으로 뒤쫓다 새틴은 어지럼증에 휘청거렸다.

“조심하세요!”

라리가 기함했다. 어느새 악령은 새틴의 머리 위에 있었다. 언제라도 몸을 길게 늘여 저를 덮칠 수 있는 위치였다.

새틴은 불을 들어 천장을 비췄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악령이 재빠르게 달아나는 동시에 새틴의 뺨으로 무언가 뚝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손등에 대고 얼굴을 닦아내던 새틴은 손을 확인하고서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악!”

선혈이었다. 악령의 형체에 묻어온 것이 분명했다.

말들의 피인지 마구간지기의 피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것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벽으로 잠시 녹아든 악령이 어느새 라리의 옆에서 불쑥 튀어나와 입을 벌렸다.

“라리!”

소스라친 라리가 온갖 소리를 내지르며 불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으악! 세상에! 악! 엄마야, 마님!”

“라리, 그러다 불나겠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라리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불 가까이 몸을 두고서 울음을 훌쩍거렸다.

“무서워요. 저 무서워서 죽겠어요……. 마님, 이건 맹수가 아닌가 봐요. 맹수는 최소한 날아다니지는 않잖아요…….”

온 그늘이 악령의 은신처가 될 수 있었다.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면 언뜻 다른 그늘과 분간되지도 않았다.

결국 악령의 꼬리를 하나하나 눈으로 따라가며 자취를 더듬는 수밖에 없었다.

새틴은 눈을 굴렸다. 방금 서늘한 기척이 등을 지나갔는데 악령은 다시 감쪽같이 몸을 숨겼다.

언뜻 천장의 음영이 꿈틀거렸다. 비명을 지를 정신조차 없이 불을 흔들어 그늘을 흐트러뜨린 순간 발아래 그림자가 캬악, 솟아올랐다.

기함한 새틴이 허공을 불로 후려쳤다. 입이 절로 루브를 찾았다.

“제발 좀, 루브!”

어디 있어? 언제 오는 거야?

마찬가지로 놀라 달려온 라리가 새틴의 주변을 불로 훑었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가구며 벽 따위에 자꾸만 사각지대가 만들어지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걸음 하나를 디딜 때마다 사방을 비춰보아야만 했다.

“저걸 어딘가에 몰아넣어야 할 것 같아.”

악령이 온 집안을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둬선 안 된다.

“어, 어디로요?”

라리가 불안에 떨며 물었다. 새틴은 다급히 적당한 공간을 물색했다. 악령을 가둘 공간이면 지금 아무도 쓰지 않는 방이 가장 적절했다.

그런 방이 하나 있었다. 침실. 저번에 창가에서 악령을 마주친 뒤로 짐을 싹 정리하고 닫아버린 방.

“이쪽이야.”

새틴은 침실의 문을 열었다.

라리가 새틴의 의도대로 부들부들 떨면서 악령을 몰아왔다. 사람은 악령의 먹잇감이고 불은 악령의 퇴로를 방해했다.

새틴은 불을 제 옆으로 숨기고 반쯤 연 문으로 몸을 드러냈다. 한 겹 드리워진 어둠에 몸의 절반이 잠겼다.

악령을 꾀는 새틴의 행동에 라리가 식겁하며 악을 썼다.

“마님, 이놈이 방으로 들어가면 마님은 나오셔야 해요!”

“알아, 나도.”

악령이 허공에서 빙빙 에돌았다.

무언가를 재는 것 같기도 하고, 새틴을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새틴이든 라리든 누구 하나를 물어뜯고 싶은데 쉽사리 틈이 나지 않으니 성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미처럼 소름 돋는 안광이 번뜩였다.

아까처럼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적절히 시간을 끌면서 버틸 상황이 만들어지면 좋겠는데.

조금만 있으면 루블리에가 올 테니까. 집안 사람들이 저렇게 루블리에를 찾고 있으니까.

악령과 위치를 바꾸어 당장 뛰어나갈 준비를 마친 새틴이 문고리를 잡고 긴장했다.

그러나 새틴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악령은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벽에 늘어 붙었다. 분주하게 자리를 바꿔대며 오히려 새틴을 도우려는 라리에게 위험스레 접근했다.

“이쪽이야. 이쪽이라고.”

한쪽에 숨긴 불이 은근히 번뜩거려 눈치를 챈 건가. 새틴은 협탁 위에 내버려진 등잔을 곁눈질했다.

더 조그만 등잔으로 불을 옮겨 붙이고 손에 들고 있던 불을 어떻게 처리할까 갈등하다가 라리를 소리쳐 불렀다.

“라리, 이쪽으로 잠깐만 와 봐.”

라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악령을 경계하며 다가왔다. 새틴은 재빨리 라리의 손에 제 횃불을 넘겼다.

“가지고 있어.”

“이걸 왜 절 주세요! 마님은 어쩌시고요?”

“이 방에 등잔이 있어. 아주 위험하지는 않아. 이 안으로 더 유인해보려고 그래.”

조그만 등잔을 등 뒤에 숨기고서 새틴은 저 자신을 함정으로 삼아 조심조심 뒷걸음질을 쳤다. 문 너머로 라리의 불안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틴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악령이 방문 가까이 달라붙었다. 아까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새틴은 몸을 더 뒤로 물렸다. 악령에게 고정한 눈길을 떼지 않으며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들어와라, 들어와라, 들어와라. 뒤로, 조금만 더 뒤로, 한 걸음만 더, 더, 더.

마침내 악령이 방에 몸을 들였다. 새틴은 이미 방 한가운데를 훌쩍 넘어가 있었다.

거뭇한 연기가 벽을 타고 올라 천장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새틴은 방 바깥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천장을 가로지른 그림자가 훨씬 빨랐다.

검은 것이 갈래갈래 몸집을 늘이며 방문을 향해 쭈욱 뻗어 나갔다. 마치 길쭉한 손아귀가 새틴을 움켜쥐는 듯한 형상이었다.

덜컹, 문이 닫혔다.

“마님!”

바깥에서 라리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머리 위, 등 뒤, 발밑, 방 안에 그간 갇혀 있던 어둠이 일렁였다.

숨어야 해. 불빛 아래로. 하지만 어떻게, 이 방 어디에…….

악령이 새틴의 사방에 포진한 그늘을 노리며 뱅글뱅글 돌았다. 빛보다 어둠이 훨씬 많았다.

숨바꼭질을 하다 함께 방에 갇힌 사냥감에 악령이 춤을 추듯 넘실거렸다.

히이이이.

그림자 속에 잠겨 있던 악령이 새틴의 얼굴 앞까지 불쑥 몸을 들이밀었다.

일순 너무 놀라 비명마저 먹혔다. 새틴은 무의식중에도 등잔불을 휘둘렀다. 악령이 스르르 멀어졌다.

횃불과 달리 등잔은 빛이 작고 얕아서 몸을 온전하게 지키기 어려웠다.

무언가 몸을 보호해 줄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방은 새틴이 쓰던 침실이었다. 방의 구조나 가구에 대해서는 새틴이 가장 잘 알았다.

침대는 안 돼. 제일 위험해.

새틴은 방에 두고 간 화장대를 곁눈으로 돌아보았다. 화장대 아래에는 체구 작은 사람이 하나 정도 몸을 구겨 넣으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었다.

의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면서 요란한 소라를 냈다.

새틴은 미끄러지듯 그 좁은 공간 아래 몸을 욱여넣고 두 손으로 등잔을 움켜쥐었다.

삼면을 막은 벽으로 불빛이 난반사되며 자리가 훤히 밝아졌다. 몸이 덜덜 떨리도록 무서워 자꾸만 땀이 축축하게 배어났다.

손이 미끄러워 마디가 하얗게 변하도록 힘을 주었다.

새틴은 다급히 불을 들어 방 안을 훑었다. 고인 그림자가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마님!”

라리의 울먹임이 다시금 들려왔다. 벽에 달라붙은 악령이 라리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움찔거렸다. 새틴은 기겁해 소리쳤다.

“문 열지 마! 나 괜찮아!”

“세상에, 마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새틴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여기서 붙잡고 있을게. ……아마도 우리 둘 중 하나가 저놈을 감시하고 있어야 편할 거야. 방에 저걸 혼자만 가둬 놓으면 방 안의 어디에 있는지, 어떤 짓을 할지 짐작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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