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12)

<46화>

루블리에가 새틴의 손을 붙잡아 제 앞에 세웠다.

“왜 뒤에서 걸어?”

“그래야 어느 한 방향이라도 놓치지 않고 지킬 수 있으니까.”

“누가? 네가? ……는 아니지. 내가? 나?”

바로 등 뒤는 루블리에가 몸으로 가려주고, 옆은 키가 큰 만큼 팔도 긴 루블리에가 얼마든지 검을 뽑아 들어 방비할 수 있을 테고, 앞은 두 쌍의 눈이 한꺼번에 지켜보고 있다.

딱 안전을 위한 조치가 분명했다.

고작 몇 분 걷는 동안에도 그는 경계를 놓지 않았다. 새틴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런 것까지 고려해서 걸어야 해?”

“왜냐면 산책을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니까, 새틴.”

“아직 해 안 졌는데.”

“해가 지면 위험하지. 그땐 이미 늦은 거라고.”

주황색으로 물들어 기우는 해에 그늘이 한층 짙어졌다. 새틴은 시시각각 색이 변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나 라리한테 그날 얘기 듣고 있었어. 목장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다며? 염소들이 이상하게 우는 소리를 내기에 자다 말고 나가봤는데 그냥 깜깜해서 뭐 자기들끼리 저러다 말겠지, 하며 다시 잠들었대. 축사 문이 열려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축사를 뛰어나간 염소가 있는지, 그 염소가 죽었는지도 우리 집에서 연락을 받고서야 알았다구.”

그때 악령은 새틴의 창가에 있었을 것이다. 용케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말을 아꼈다.

“그때야 염소였지 이다음은 누가 될지 몰라.”

“알았어.”

“문단속 잘하고 내가 돌아와서 문을 열기 전까지는 밤에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마. 오늘부터 계속,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또 바로 나가?”

“얼굴만 보러 온 거야.”

루블리에가 얼굴만 보러 왔다고 하면 말 그대로 얼굴만 보고 갈 시간을 억지로 내서 왔다는 뜻임을 새틴은 지난번의 경험으로 깨닫고 있었다.

새틴은 얼떨결에 사용인들과 함께 루블리에를 배웅했다.

집을 나서며 그가 누차 건네는 신신당부에 사용인들이고 새틴이고 가릴 것 없이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심하는 건 좋지만 온 집안 사람들이 하루의 절반을 집에만 갇혀 보내게 생겼다.

저녁 통행을 통제하면서 간혹 일손이 더 필요해 불러온 사람들도 일찍 돌려보내야 했으니, 교외에 집을 얻은 불편함이 이럴 때 드러났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악령이 어떻게 생긴 놈인지, 어떻게 움직이는 놈인지, 대처 방법은 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그래야 해.”

“그래, 집에만 있을게.”

루블리에의 단호함에 새틴도 누차 되잡아묻지는 않았다.

악령과 습격으로 조성된 두려움은 환한 낮엔 수그러져 있다가 밤이 되니 살아났다.

새틴은 사용인들과 함께 현관 안에 머물렀다.

유일하게 루블리에를 따라 나간 사람은 마구간지기였다.

물과 여물을 먹이며 흑마를 쉬게 했던 마구간지기가 다시 외출 시중을 끝내자, 루블리에는 말 위에 올라 새틴에게 주의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다녀올게. 조심해.”

금방 달려올 수 있게끔 이 근방을 순찰한다면서도 막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루블리에가 말을 탄 채로 서성였다.

새틴은 제 허리 부근을 톡톡 두드렸다. 루블리에가 늘 검을 차는 위치였다.

그러고서 입 모양으로 반복했다.

너야말로.

짧은 신호였으나 알아들었는지 루블리에가 한결 마음을 놓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무슨 비밀 암호를 주고받으신 거예요?”

오지랖 넓은 라리가 궁금해했다. 새틴은 시침을 뚝 뗐다.

“그런 거 안 했어.”

루블리에가 떠나고 나면 이 집의 주인은 저 하나뿐이었다. 새틴은 아직 모여 있는 사용인들에게 다시금 강조했다.

“다들 자기 전에 방의 창문이 열려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도록 해. 커튼도 열지 말고.”

“네, 마님.”

루블리에의 말마따나 대처 방법이 아직 나오지 않은 악령이었기에 목격했던 당시의 환경을 주의하게 됐다.

밤에 함부로 창을 열고 바깥으로 몸을 내밀었다가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는 악령의 관심을 끌지 말 것.

신성 기사단이 밤의 통행을 금지하기로 한 것도 이 일환이었다.

“마님 침실은 제가 다 확인했어요.”

라리가 쪼르르 달려와 보고했다. 요즘 라리가 말하는 ‘마님의 침실’은 루블리에의 침실이었다.

라리는 등잔의 불을 은은하게 밝히고 방을 깨끗이 정리해 두었다. 커튼을 쳐서 밖의 어둠을 차단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어차피 시커먼 밤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커튼으로 풍경을 아예 가려버리니 갑갑한 기분을 피할 길이 없었다.

노랗고 옅은 등불 아래 앉아 새틴은 본가에 별일이 없나 묻는 안부 편지를 쓰고 밀랍을 녹여 봉인을 찍었다.

사용인들은 내일 쓸 식재료를 손질하고 불필요하게 켜둔 등불들을 찾아 껐다. 모두가 몸에 익은 습관대로 움직였다.

대화도 몇 마디 오가지 않아 그저 평화로웠다.

이렇게 고요한 밤인데, 어딘가에는 악령이 있다니. 그 생각을 하면 매일 겪은 이 밤이 느닷없이 낯설어진다.

새틴은 소일거리를 마치고서 커다란 침대 한쪽에 누웠다.

루블리에가 없어도 잠버릇은 바뀌지 않았다.

제 영역으로 정해 둔 좁은 부분에 몸을 욱여넣고서 이불을 감싸 안았다.

훅. 숨을 불어 등불을 껐다.

며칠이나 같이 있었다고 그새 혼자 자는 침대가 편한 듯도, 불편한 듯도 했다.

베개를 고쳐 베고 이불을 당겨 올린 뒤 새틴은 바르게 자세를 바꿨다.

루블리에가 항상 제 쪽을 쳐다보면서 잠드는 걸 알고 있기에 일부러 그를 등진 채로 눕곤 했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눈을 감고 있던 새틴은 몸을 반대편으로 빙글 돌렸다. 침대를 반으로 나누어 편평하게 정돈된 루블리에의 자리를 흘긋 곁눈질했다.

이상했다. 그가 있어도 잠이 안 왔는데, 그가 없어도 잠이 안 왔다.

그래도 뜬눈으로 밤을 새울 순 없는 노릇이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한 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흐어어어엉!

악인지 비명인지, 사람이 낸 소리인지 짐승이 낸 소리인지, 혹은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것이 낸 소리인지 모를 끔찍한 괴성이 느닷없이 메아리쳤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희한한 울부짖음이었다.

돌연 사지가 얼어붙었다. 새틴은 이불째로 뻣뻣하게 굳었다.

너무 놀라 숨도 쉬지 못했다. 파도처럼 밀려온 공포가 전신을 관통했다.

악령……? 악령인가?

“루브……?”

본능적으로 루블리에부터 찾다가 새틴은 그가 밤의 순찰로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뻔히 알고 있던 일마저 깜빡 잊어버릴 만큼 소름 돋는 악성이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이불 아래 숨어 새틴은 또 다른 기척이 들려오지는 않는지 기다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라리쯤은 찾아와 문을 열며 저를 부를 것 같았다.

그러나 집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괴괴한 정적에 묻혀 있으려니 속이 더 답답했다.

아무도 듣지 못한 걸까.

아니면…… 잘못 들었나? 그것도 아니면 설마 나만 들은 건가?

새틴은 눈을 깜빡였다. 꼭 마비에 걸리기라도 한 양 아직도 팔다리가 무거웠다.

아무래도 잘못 들었나 보다. 그렇게 제 마음을 다독였다.

당장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라면 그냥 착각으로 치부하는 편이 가장 나았다.

커튼을 열고 바깥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루블리에가 워낙 작은 부분 하나하나까지 염려를 하다 떠나서 도무지 어길 기분이 안 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땐 아침이었으면 좋겠다.

날이 밝으면 루블리에가 돌아와 있을 테고, 그럼 안심하며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젯밤에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꿈이었나 봐, 하고.

“흐으으…… 흐어어엉!”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하고 있던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새틴은 이불을 밀어 치우고 튕기듯이 일어났다.

방 안이 너무도 캄캄했지만 루블리에의 방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성냥을 찾아 불을 켤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어슴푸레한 어둠을 헤치며 침실 바깥으로 더듬더듬 길을 찾았다.

“악! 뭐야, 여기 뭐가 있어!”

“그거 장식장이에요, 디번.”

“아니, 아무도 불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없어요?”

“우리 다들 자다 나왔는데 그럴 정신이 어디 있어요.”

“마님! 마님 주무세요?”

어둑어둑한 복도는 자다 말고 놀라서 뛰쳐나온 사용인들의 웅성거림으로 소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제 안부를 걱정하는 라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틴은 라리에게 응답했다.

“나 여기 있어.”

“마님, 깨어 계셨어요? 아까 그 소리는 들으셨고요?”

“들었어. 그 소리 대체 뭐야?”

그래도 여럿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한결 무서움이 덜했다.

“모르겠어요. 다들 아무도 모르겠대요.”

밖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답시고 창문마다 모조리 커튼을 덮어 놔서 집 안이 너무도 컴컴했다.

그나마 눈이 어둠에 익었기에 희미하게 비치는 윤곽들로 사람이나 가구 정도를 간신히 분간할 뿐이었다.

“여기 등불 가져왔어요.”

사용인들 중 누군가가 침실을 나오면서 등잔을 챙겨왔다. 두 개, 그만하면 시야를 분간하기에는 충분한 개수였다.

청소를 담당하는 사용인이 장식장의 서랍을 열고 성냥을 꺼냈다. 불붙인 두 개의 등잔을 가운데 두고서 새틴은 사용인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사용인들이 수군거렸다.

“한밤중에 이게 무슨 야단이래요?”

“다들 조용하기에 혼자 잘못 들은 줄 알았잖아요.”

“처음에는 오싹해서 이불 아래 숨었었는데 두 번째 들리니까 이건 나가 봐야겠다 싶어서 나왔더니 다들 동시에 우르르…….”

“저거 사람이 내는 소리는 아니죠?”

“어쩌면 바람이 세게 부는 걸 수도 있어요.”

아침까지 집에서 나가지 말라는 엄명을 들은 뒤라 모두 찜찜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저 꼬리를 무는 추측만 던지며 불안한 기분을 삭였다. 그래도 다들 일부러 가장 위험한 가능성은 배제했다.

바람이라느니, 집 어딘가가 망가진 게 틀림없다느니, 이런저런 짐작을 늘어놓기에만 바쁠 때였다.

“후우우우…… 허어어어엉…….”

다들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말을 잃은 시선이 분주하게 오갔다. 새틴은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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