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112)

<45화>

곱게 자란 아가씨는 결국 어디서든 티가 나게 마련이다.

고작 염소 한 마리 죽은 일 가지고 옛 전설을 운운하며 통행 통제까지 벌이는 야단이라니.

마귀나 악령이라 함은 이보다 훨씬 끔찍한 재앙을 불러와야 마땅한 존재 아니었나. 새틴이 착각한 건지, 혹은 옛사람들의 과장이 컸던 건지 참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는 고생을 많이 하면서 자랐다고 했던가?”

악령이 어떤 사고를 일으키기 전에 빨리 잡아 없애야 한다는 루블리에의 판단을 신용하는 것과 별개로, 키리온은 딜라일라가 어지간한 불상사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뜻밖이었지. 얼굴만 봐서 그대는 어지간한 귀족들보다 부유하게 자란 느낌이었거든. 내가 보기로 예쁜 소녀는 보통 호감의 대상이던데 그대 이야기는 전혀 달라서 의아했었소.”

키리온은 호감의 대상이 되는 예쁜 소녀의 일례로 굳이 새틴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나 이를 못 알아들을 만큼 딜라일라는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탄한 꽃길 걷는 인생은 새틴님처럼 지체 높은 명문가에서 태어난 예쁜 소녀들이나 가능한 거고, 시골에서 태어난 예쁜 소녀는 오히려 인생이 위험해지기 쉽지요. 대가 없는 호의는 없거든요. 사방천지가 적이죠.”

“그래서 악령을 무서워하지 않는 거요?”

“뭐, 저는 더 무서운 악령들에 시달려봤으니까요. 악령은 기껏해야 염소나 죽이지만 가난과 배고픔은 사람을 죽이죠. 심지어 어리고 재능 있지만 믿을 구석이 없는 배우들의 꿈을 인질로 잡는 후원자들이야…… 말해 뭐하겠어요.”

미모는 돈이 된다.

유난히 맑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웃음, 사람을 봐가면서 대하는 눈치도 돈이 된다.

하지만 미모와 재능으로 지불할 수 있는 금액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 한계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발버둥쳤던 날들을 딜라일라는 한 번의 조소로 표현했다.

기요른은 눈물이 통하는 남자였다. 그는 딜라일라의 불행에 깊이 공감했고,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러나 딜라일라는 키리온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악착같이 성공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군.”

“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었거든요.”

도리어 웃었다.

“상승은 성공에 있어 훌륭한 동기 부여지. 그래서 꿈을 이룬 기분은 어떻소? 화려한 무대에 오르면 귀족들이 그대의 공연을 관람하러 오고, 모두가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는 기분이.”

“예하께서 훨씬 잘 아시잖아요? 칼데브란카의 모든 국민이 예하를 알고 경외하는걸요.”

이 나라에서 고귀하기로 손을 꼽자면 키리온은 단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었다.

인덕으로 이름 높은 추기경과 여러 대주교들, 신성 기사단의 팔라딘, 다섯 파수꾼의 혈족들보다도 그의 위명이 우선됐다.

연륜으로는 추기경보다 부족하고 무력으로는 팔라딘보다 부족하더라도 혈통이 지닌 위엄이 그러했다.

그러나 키리온은 고민도 하지 않고 부정했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남아서 말이오.”

딜라일라는 문득 키리온이 목표로 하고 있는 길의 끝을 깨달았다. 법황.

그 자리에 올라야만 키리온은 자신의 여정이 마침내 끝났다고 여길 것이다.

처음 만난 날부터 대화가 잘 통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던 근거를 찾았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짙은 공통점이 있었다. 높이, 더 높이 상승하고 싶은 욕구.

능력이 다르고 시작점이 달라도 지향점은 같았다. 그들은 동족이었다.

바로 이 시간, 딜라일라는 키리온이 더없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마찬가지예요. 저도 아직 갈 길이 멀죠.”

“그대는 이미 프리마 돈나로서 정점에 오르지 않았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암만 노래를 잘 부르고 암만 재능이 넘치며 암만 아름답다고 한들 결코 넘어서지 못할 벽이 있었다.

귀족들이 아무리 제 공연을 보러 와 찬사를 늘어놓는다고 해도 그들에게 있어 저는 전시품이자 전리품이었다.

기요른을 만난 후로 딜라일라는 제 처지를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셀 위오 가문에서는 당연히 아들이 한때나 거쳐 갈 정부로 저를 대우했다.

같은 귀족 가문의 새틴이 이 결혼 못 하겠다고 엎었음에도 델 마레를 잃을까 노심초사했고, 끝내 새틴이 또 다른 남자를 찾아 훌쩍 떠나버리자 그 탓을 딜라일라에게로 돌렸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딜라일라는 참으로 오랜만에 남 앞에서 무릎도 꿇어 보았다.

기요른의 집을 뒤집으러 나타난 새틴의 부모님에게 울면서 빌었다.

그때는 노력으로 얻은 프리마 돈나의 자리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루블리에는 또 어떤가. 그는 처음부터 딜라일라를 홀대했다.

지금이야 사랑에 눈이 먼 기요른이 제 역성을 들고 있지만, 글쎄…… 그 마음이 과연 언제까지 갈까. 심약한 기요른은 지금 이상으로 부모를 이기지 못할 남자였다.

반면 키리온은 어떤가. 그는 어머니를 진작에 여의었고 아버지인 법황은 노환을 앓고 있다.

그를 제어할 만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셈이다.

새틴과 루블리에가 아무리 권세 높은 귀족이라 하나 법황의 적통 아들에게는 견줄 바가 아니었다.

딜라일라는 남자들을 하나하나 손꼽아보았다.

외모. 첫눈에 끌리는 마력을 느꼈던 사람은 루블리에였다.

성격. 나약한 점만 제외하면 그녀가 만난 사람을 통틀어도 기요른만큼 다정다감한 남자는 아주 드물었다.

딜라일라의 신분이 어느 정도 받쳐만 줬다면 그는 남부럽지 않을 남편이 되었을 사람이었다.

가끔 딜라일라는 새틴이 기요른의 어떤 면을 기대하고 그의 약혼녀로 살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능력. 신성 기사단의 팔라딘은 오롯이 능력으로 올라가는 자리였다.

신분으로 얻은 책무를 제외하고 단순하게 타고난 재능 하나만 보자면 프리마 돈나가 된 자신과 팔라딘이 된 루블리에 사이에는 맥이 상통했다.

그러나 신분, 이것만은 기요른이나 루블리에가 다시 태어나도 키리온을 앞지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외모와 능력이라면 딜라일라도 선천적으로 타고났다.

성격은 얼마든지 맞출 수 있었다.

밝음, 부드러움, 도도함, 고상함, 처연함, 모든 배역의 조각이 제 안에 있기에 가능했다.

다만 신분만은 갖지 못했다.

그렇기에 키리온의 조건은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이었다.

사람들은 딜라일라를 일컬어 아무리 올라간들 정부 이상이 되지 못할 여자라고 말했다.

프리마 돈나로서 인정받아도 그녀의 자리는 결국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지. 그대는 위험한 여자라고.”

키리온이 손을 들어 딜라일라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친구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대 몸은 이렇게 가느다란데 말이오. 그대를 감당할 수 있는 남자가 거의 없다는 뜻이었을까? 과연 그 의미였는지는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만나 보니 어느 정도는 동감하오. 그대는 확실히 위험해. 위험할 정도로 독한 향기를 품고 있거든. 한데 그대를 정부로 두고 있는 남자는 셀 위오 가문 사람이지. 파수꾼 가문의 남자조차 감당하지 못할 여자라면.”

기나긴 혼잣말의 끝에서 키리온이 자문했다. 딜라일라는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만한 남자였다.

“……나는 어떨까?”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키리온은 확신하고 있었다.

제게는 자신이 있다고, 아무리 위험하게 느껴지는 여자라 한들 제가 감당 못 할 여자는 절대 아니라고.

“저는.”

딜라일라는 숨을 느리게 삼켰다. 그녀는 키리온의 얼굴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예하야말로 위험한 남자라고 느꼈는걸요. 제 인생이 뒤바뀔지도 모를, 위험한 남자라고.”

도전을 무서워하지 않기로는 피차 마찬가지였다. 차기 법황과 프리마 돈나.

발을 들여놓은 길부터 지루하고 얌전하게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좋다, 어차피 누군가의 정부로 산다면, 차기 법황의 정부가 되자.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의 정부가 되자.

자신의 힘으로 이루지 못할 부족한 부분은 남의 것으로 채워 넣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키리온이 여자를 통해 얻고자 하는 부분은 제가 채워주면 될 일이다.

딜라일라는 결심했다.

자신은 파수꾼 가문에 이어 법황까지 두루 거친 유일무이한 여자가 될 것이다.

* * *

일몰이 사그라지며 슬슬 어스름이 끼었다.

낮 동안 평소대로 신성 기사단의 업무를 마친 루블리에는 저녁 순찰을 나가기 전 잠시 신혼집에 들렀다.

“새틴은?”

“산책 가셨어요.”

“이 시간에?”

루블리에는 마뜩잖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제법 떨어진 들판 위로 두 사람의 인영이 솟아 있었다.

키가 작은 쪽은 새틴, 키가 큰 사람은 새틴이 델 마레에서부터 데리고 온 하녀 라리였다.

하필이면 염소가 건너와 죽은 장소와 가까웠다. 루블리에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새틴.”

커다란 목소리가 먼저 도달했다.

“아, 팔라딘께서 오셨어요.”

라리가 반색하며 새틴에게 소곤거렸다.

“이거 보세요. 팔라딘께서는 항상 집에 들어오자마자 마님부터 찾으신다니까요. 마님, 얼른 다정하게 인사하세요. 안기시면 더 좋고요. 꼭이요. 밤새 고생하실 분한테는 다정한 말 한마디가 힘이 되는 법이거든요.”

라리의 주책에 새틴이 눈을 흘겼다.

“우리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래도 요즘엔 두 분이 꽤 편해 보이시는걸요.”

“원래 이랬어.”

“아유, 하여간 마님은…….”

도도한 주인은 부추겨 봐야 하등 소용이 없다.

루블리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악령이 머물렀다 간 곳에 새틴이 나와 있으니 마음에 안 드는지 표정이 꽤 뚝뚝했다.

새, 루블리에가 입을 엶과 동시에 은근히 기회를 엿보고 있던 라리가 슬그머니 새틴을 루블리에 쪽으로 떠밀었다.

“……엄마야!”

별로 강한 힘이 아니었는데도 불시의 기습이라 새틴은 엉겁결에 두어 걸음 휘청휘청 헛디디다 미끄러졌다. 루블리에가 재빨리 선물을 받아 안았다.

“저녁 준비를 도와야 돼서 먼저 들어가 볼게요. 두 분 천천히 오세요!”

라리가 잽싸게 달아났다.

새틴과 라리의 부주의에 뭐라고 화까지는 내지 못할지언정 주의라도 꼭 한마디 해야겠다 벼르고 있던 루블리에는 제풀에 푹 헛웃음만 켜고 말았다.

루블리에가 아니었으면 자빠질 뻔한 새틴이 앵돌아져 비명을 질렀다.

“라리!”

“난 네 하녀가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점점 생각이 달라지고 있어.”

새틴은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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