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12)

<44화>

장난처럼 던지고 있어도 루블리에의 목소리는 쓴웃음에 가까웠다.

새틴은 아악, 악을 지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 나왔던 그를 떠올렸다.

어쩐지 쓸쓸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해졌다.

암만 그래도 루블리에는 제 편이고 악령은 말 그대로 악령일 뿐인데 말이다.

“……비교할 대상이 아냐.”

새틴은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벽처럼 세우고 있던 등이 무너졌다. 눈이 마주쳤다.

“그렇잖아. 너는 나를 지켜주겠다고 했지만 악령은 나를 해칠 테니까.”

악령은 사납고 위험한 전설이었다.

새틴의 침실 근처를 맴돌았던 존재가 악령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진 뒤로 사용인들은 문과 창문의 빗장을 하나하나 지르고 단속을 훨씬 단단히 했다.

과연 효과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평범한 사람들이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방비는 그게 전부였다.

신성 기사단의 순찰은 이틀, 사흘 간격으로 돌아가게 분배됐다고 했다. 그들도 사람인데 매일 밤을 지새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루블리에는 집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새틴이 델 마레의 성물을 품고 잠들듯이, 루블리에는 팔 닿는 자리에 장검을 두었다.

칼을 품고 자는 밤이다. 기분이 뒤숭숭했다. 악령이 언제 다시 발견될지 기약도 없었다.

“무서워하지 마. 놈이 널 못 해치게 할 거야.”

“알아.”

겁을 먹은 모습으로 보인 걸까. 루블리에의 약속이 재차 이어졌다.

그러나 새틴은 사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막상 일선에 나가 고생하는 사람은 그인데 일방적으로 위로받는 건 공평하지 않게 느껴졌다. 수도를 지키는 일이 신성 기사단의 책임이라 해도 그가 팔라딘으로서 지고 있는 책무는 늘 무겁기 그지없다.

악령을 피해 숨어 있는 사람보다는 악령을 찾아 없애야 하는 사람이 힘들겠지.

새틴은 머뭇거리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조심해.”

“응?”

“조심하라구.”

“다시 말해 봐.”

또다시 반문이 돌아왔다. 새틴은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내 목소리 안 들려?”

루블리에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듣기 좋아서.”

* * *

한 번 지나왔던 길이라고 이제는 퍽 친근했다.

딜라일라는 사용인의 안내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법황청 안 집무실의 문을 넘어갔다.

“예하, 사전에 말씀도 없이 자꾸 마차부터 보내시면 곤란해요.”

정무를 보던 키리온이 고개도 들지 않고 태연하게 반문했다.

“왜, 그가 뭐라 했소?”

“기요른님도 눈치가 전혀 없는 분은 아니시니까요.”

법황청에서 보낸 마차가 셀 위오 가에 짧은 간격으로 연달아 도착하는데 의문을 품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라의 부름이라니 차마 거절하진 못하면서도 기요른은 못내 꺼림칙한 안색을 내비쳤다.

“또 키리온 예하인가요? 기념식 행사에 관한 용건은 저번으로 끝이 아니었어요? 그 공사다망하신 분께서 당신을 왜 몇 번씩이나 부르시는 거죠?”

둔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기요른에게 의외의 눈치가 있었다.

하기야 암만 순진해 빠진 남자라도 제 정부가 다른 남자에게 자꾸 불려가는데 마냥 마음을 놓긴 힘들 것이다.

더구나 애당초 기요른이 딜라일라를 데려온 경위 자체가 이와 비슷했다. 기존의 후원자에게 지위와 권력으로서 딜라일라를 빼앗아 온 것과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기요른이 그대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구속한다면 그곳에서 나오면 되지.”

태생적으로 오만한, 오만한 게 당연한, 오만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반응이었다. 딜라일라는 가볍게 불평했다.

“예하께서는 제 처지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으시는군요.”

키리온은 느긋하게 법황의 인장을 찍었다. 처리한 서류가 한 묶음 넘어갔다. 눈은 공무에 집중하면서 입은 딜라일라를 향해 열렸다.

“그래서 저번에는 마차를 비워 돌려보냈소?”

딜라일라도 미소하며 받아쳤다.

“그래서 화가 나셨나요?”

“웃음이 나던걸.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했지.”

딜라일라는 사뿐사뿐 걸어갔다. 그녀는 책상에 기대어 키리온을 내려다보며 눈짓했다.

“화가 나셨군요.”

“어째서 그렇게 단정 짓소?”

“보란 듯이 오늘 다시 마차를 보내셨으니까요.”

“아하.”

미묘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키리온이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빈 마차를 돌려받고서 갑자기 궁금해지더군. 오늘 보낸 마차에는 사람이 타고 있을까, 아니면 또 텅 빈 채로 돌아왔을까. 해서 나는 나와 내기를 하기로 했지.”

딜라일라의 입매가 더욱 가파르게 올라갔다.

“그 내기에서는 누가 이겼나요?”

키리온은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도 딱 잘라 단언했다.

“나요.”

딜라일라는 눈치챘다.

어떤 결과가 나왔든 키리온은 내기에서 자신이 이겼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법황의 혈통을 타고나 태생부터 대주교로 자라났고 향후 법황의 자리를 이을 자다운 자존심으로.

“제가 예하의 승리에 도움이 된 듯해 기쁘네요.”

고혹적인 미소를 끌어올리며 딜라일라가 속삭였다.

키리온은 자존심이 드높은 남자였다.

이런 남자 상대로는 그 심기를 과하게 거슬려선 안 됐다.

“오늘은 제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허용해 주실 건가요?”

물어보는 순간에 딜라일라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대가 원하는 만큼.”

암묵적인 신호였다. 그 어떤 답을 했어도, 전부 신호가 되었을 순간이기도 했다.

딜라일라는 키리온의 목덜미에 제 팔을 둘렀고 키리온은 딜라일라의 붉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었다.

키리온이나 딜라일라나 하나하나 가르칠 필요 없는 이들이었다. 지난번 경험으로 둘은 서로의 습관과 취향을 파악했다. 두 번째는 훨씬 익숙했다.

그때였다.

“예하. 팔라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이 긴급하게 알현을 청했습니다.”

불청객이 찾아왔다.

“이런. 내 친구지만 짝사랑만 오래 해서 그런지 눈치가 영 아니군.”

딜라일라가 재빨리 키리온의 입술에 찍힌 제 화장품 자국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더불어 제 입술도 정돈했다. 재빠른 솜씨였다.

딜라일라가 방문객의 자리로 마련된 의자에 가 앉는 동시에 키리온이 대답했다.

“들어오시오.”

루블리에가 보낸 심부름꾼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는 정중하게 예법을 지켜 인사한 후 키리온에게 봉인된 봉투를 올렸다.

“루블리에 신성 기사단 수장님께서 이 서류를 주시며 긴급히 허가를 받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긴급 허가?”

벌떡 일어난 상태로 서류를 넘겨받은 키리온이 금색의 밀랍 봉인을 뜯었다.

앞장을 대충 살펴보는가 싶더니 그는 이내 인장을 찍어 심부름꾼에게 돌려주었다. 뒷장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현장에 관한 모든 권한을 루브에게 이양할 테니 일일이 허가를 받을 필요 없다고 전하라. 나에게는 다 끝나고 사후 보고만 올려도 충분하다고.”

“네. 그러겠습니다.”

심부름꾼이 집무실에 머무른 시간은 도합 오 분도 채 되지 않았다.

허가가 난 서류를 들고서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딜라일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용을 다 읽지도 않고 허가를 내려주시나요? 굉장히 믿으시나 봐요, 루블리에 카 딜론 경, 그분을.”

“당연하지 않소. 루브는 내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 가장 도움이 될 친구니까. 게다가 사안이 중요하기도 해서 나에게 일일이 허가를 구하며 움직였다간 늦을 거요.”

“무슨 서류인데 허가를 구할 시간조차 아까운 거죠? 아, 극비인가요?”

키리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극비는 아니오. 오히려 수도 내의 거주자들에게 위험을 경고해야 하니 하루라도 빨리 허가를 내 달라고 요청했지. 그대도 알아두시오. 악령이 나타났다는군. 조용히 해결했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밤의 통행을 제한해야 돼서 골치가 아픈 모양이오.”

방금 전의 낭만적인 분위기는 어디 가고 난데없이 업무에 시달리는 대주교가 나타났다. 더구나 악령이라니, 듣던 중 하도 희한한 소리라 딜라일라는 얼떨떨해졌다.

“악령이 뭔가요?”

“마귀가 손발로 부렸다던 놈들 말이지. 수도 근처에 한 마리가 나타났다는 듯하오.”

순간 딜라일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귀요? 맙소사. 우리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거죠? 농담 같네요. 그것도 유행 지나 촌스러운 농담이요.”

처음 루블리에에게서 악령에 대한 보고를 전해 받았을 때 키리온도 일순 딜라일라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지방을 돌아다니는 것도 황당할 판에 수도에까지 기어들었다니.

키리온은 악령을 목격했다는 새틴이 약한 마음에 착각을 일으킨 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루블리에는 연일 신성 기사단을 소집해 순찰을 내보냈다. 법황청의 경비도 늘어났다. 이쯤 되니 키리온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그는 새틴은 못 믿어도 친구의 감은 믿었다. 팔라딘의 눈은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예리해야만 했다. 분명 수상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농담이었으면 좋겠군. 구시대의 유물이 대체 왜 이백 년을 거슬러 지금 나타났는지 기가 막혀서, 원. 하지만 목격자가 루브의 부인이고 담당자가 루브인데 믿어야지 어쩌겠어.”

딜라일라는 새침하고 오연한 인상을 가진 귀족 가문의 외동딸을 떠올렸다.

새틴 델 마레. 그 이름이 지금 나올 줄 몰랐다. 뜻밖의 목격자였다.

“새틴님이요? 그분이 악령을 보셨나요? 그런데 악령이 그분께 어떤 짓을 했기에요?”

“이웃집에 가축 피해가 있었다더군. 염소가 한 마리 죽었다던가.”

“그게 전부예요?”

“꼭 실망스럽다는 어투인데?”

“아……. 그냥 악령이라는 이름만 거창하지 대단한 재앙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가축이 죽는 건 악령이 아니라도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사고잖아요. 팔라딘께서 부인을 무척 사랑하시나 봐요. 과잉보호를 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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