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 * *
새벽이 지나도록 뒤척이다 늦게 잠들었던 만큼, 새틴은 느지막이 눈을 떴다.
이불을 쪼작쪼작 파고들면서 더 잠을 청하던 중 어쩐지 생경한 기분에 정신을 차렸다가 잠시 멍해졌다.
여기가 어디더라?
아, 맞다. 루블리에의 방이지.
맙소사. 새틴은 벌떡 일어났다. 언제 출근했는지 침대에는 저 혼자였다.
잠이 안 와서 숨죽이며 몸을 뒤척거렸던 기억이 있는데, 대체 언제 까무룩 잠들었나 모를 일이었다.
루블리에의 침실에서 나오며 새틴은 여러 가지로 부끄러워졌다.
엄마 곁을 찾는 어린아이처럼 겁에 질리자마자 데면데면하던 루블리에에게 쪼르르 달려간 것도, 무작정 뭐가 있었다 주장하면서 한밤에 사용인들을 모조리 깨우게 된 것도.
그런데 자고 일어난 사이 사용인들의 어리둥절하던 반응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라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마님, 어제 마님이 왜 놀라셨는지 이유를 찾아냈어요.”
“응? 왜?”
“맹수가 이 근처 목장의 염소를 사냥했던 모양이더라고요. 목책을 나와 죽어 있는 한 마리를 발견했거든요. 마님께서 그 기척을 들으셨나 봐요. 저 여태 몰랐는데, 마님 귀가 엄청나게 밝으셨네요.”
도리어 이제는 새틴이 얼떨떨할 차례였다.
“그랬어?”
여기가 맹수가 나타날 만한 지형이었던가.
의문은 차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해답이 나왔으니 일단은 다행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구석의 찝찝함은 감출 도리가 없었다.
그게 맹수였다고? 그 느낌이? 어둠에 가려져 윤곽조차 보이지 않던 그 존재가 짐승이었다고?
“……짐승이라기에는 좀 달랐는데…….”
그러나 사용인들 모두가 그리 납득하고 있으니 새틴은 더 물으려야 묻지도 못했다.
게다가 법황청에서 퇴근한 루블리에를 대면하고서, 새틴은 평범한 맹수였다는 결론이 사용인들 안에서 상식적으로 미화된 이야기였음을 알았다.
“새틴, 침실에 두고 있던 귀중품들을 모조리 내 방으로 옮겨.”
카 딜론 경, 지금 왔네요. 있죠, 어제는.
루블리에와 둘이 되면 꺼내려고 준비했던 서론이 싹 사라지는 첫마디였다.
루블리에는 퇴근하자마자 새틴을 찾았고, 그녀를 데리고 곧장 문 닫힌 침실로 직행하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왜?”
새틴은 고쳐 물었다.
“아니, 왜요?”
“당분간 혼자 있지 않는 편이 좋겠어.”
“맹수 때문에요? 안 그래도 아침에 염소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은 들었는,”
루블리에가 새틴의 말을 자르며 정정했다.
“맹수가 아냐. 악령이야.”
하려던 말을 싹 잊어버렸다. 새틴은 멍멍해져 되물었다.
“악령? 뭔 소리야? 루브.”
“이제 카 딜론 경이라고는 부르지 않는군. 듣기에 훨씬 낫네. 진작에 그러지.”
“지금 그게 중요한 거 아니잖아.”
새틴의 항의에 루블리에가 화제를 가져왔다.
“우리 예전에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거 생각나? 마귀는 방심하는 틈을 타 그림자에 스며든다.”
파수꾼 가문의 시초를 설명할 때마다 항상 나오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칼데브란카 국민이라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는 건국 전설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새틴은 얼어붙어 고개만 끄덕였다. 루블리에가 첨언했다.
“또 마귀는 악령을 부려 세상을 망가뜨린다고 했었지.”
“……이백 년 전 전설이잖아.”
“단순한 전설은 아니야. 그 시절에는 분명 현실이었어. 너도 알잖아, 새틴. 델 마레의 성물을 간직하고 있는 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래도, 그렇지만……. 악령? 그런 게 이백 년을 거슬러 지금 또 나타났다고?”
“나타났다기보다는 극히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는 말이 옳아. 수도에서 태어나 계속 살았던 우리들에겐 낯선 얘기지만, 지방에서는 가끔 악령의 흔적이 나타났었다고 하더군.”
“무슨…….”
“나도 저번에 출장을 가서 처음 들었지. 죽은 새떼도 보았고. 그놈이 같은 놈인지, 어떻게 수도 근교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젯밤에는 네 감각이 아주 예리했던 거야. 키리온에게 허가를 받았어. 한동안 신성 기사단이 밤마다 순찰을 돌 거다. 그놈을 잡을 때까지 너도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차라리 맹수가 다녀갔다는 편이 나았다. 이건 제 상식을 벗어났다. 새틴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지?”
“걱정할 필요 없어. 너는 그냥 안전한 장소에 있으면 돼.”
신성 기사단의 무력이야 그 자체를 법황의 군대라고 칭하는 만큼 의심할 바가 없으나, 과연 그렇게 단순한 문제일까.
새틴은 머뭇거렸다. 그 와중에 사용인이 고개를 내밀고 루블리에를 불렀다.
“저, 신성 기사단에서 손님이 오셨는데요. 순찰 문제로 의논드릴 일이 있으시다면서요. 손님을 응접실로 모실까요?”
“아냐. 내가 나가보지. 라리를 불러줄 테니까 천천히 준비해, 새틴.”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도 얼떨떨한데, 그 안전한 장소가 루블리에의 곁이라는 것도 어안이 벙벙했다.
꿈을 꾸는 기분으로 새틴은 하루 동안 비웠던 침실을 돌아다니면서 자주 쓰는 물건들을 챙겼다.
본가에서 가지고 온 귀중품, 화장품, 그리고 방에 숨겼던 델 마레의 성물까지.
새틴은 작은 칼 조각을 들고 잠시간 오도카니 섰다.
마귀, 악령. 농담이라면 정말 질 나쁜 농담이었다.
맹수가 악령으로 뒤바뀐 시점부터 우왕좌왕하기는 사용인들도 똑같았다.
새틴을 도와서 침실을 정리하던 라리가 머리를 내저었다.
“도대체 저는 두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새틴은 차마 저도 아직 이해가 덜 됐다는 답은 하지 못했다.
마귀가 봉인되면서 칼데브란카의 혼란은 잠재워진 게 아니었나?
한데 마귀가 남긴 잔재들이 아직도 이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었다니.
“마님. 저는 무식해서 악령이다 뭐다 하나도 모르겠고요. 그냥 맹수라고 생각하려고요.”
라리가 소곤거렸다.
“어머니께서 해 주신 얘긴데요, 어머니 어릴 적에 산 근처 작은 마을에 사셨댔거든요. 근데 거기서 가끔 호랑이나 멧돼지가 내려와 동네를 발칵 뒤집고 그랬대요. 농사도 망치고 소도 잡아먹고요. 배고프면 사람도 해쳤대요. 염소를 죽인 게 악령이라면 그놈도 이런 놈들과 다를 게 뭐예요.”
새틴은 껄끄러운 기분으로 라리의 결론을 들었다.
“어쨌든 전 두 분이 드디어 부부처럼 사시려는 것 같아서 그건 참 다행이다 싶네요. 마님, 화장대하고 거울, 의자도 같이 챙길까요?”
“아니야. 가구들은 그대로 둬.”
어차피 신성 기사단이 악령을 처리할 날까지만 임시로 머물 뿐이다.
가구들까지 옮겼다가는 남의 침실을 너무 번잡스럽게 만들 것 같아 포기했다.
값나가고 중요한 물건만 챙긴 후 곳곳에서 튀어나온 잡동사니는 쓸어 모아 화장대 서랍에 넣고 닫았다.
호랑이와 멧돼지. 침실을 비우면서 새틴은 라리의 단순한 비유를 되뇌었다.
형태는 좀 다를 것이다. 어쩌면 아주 많이 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나 동물을 해친다는 점에선 일견 비슷했다. 라리의 말에 일리는 있었다.
하나 악령은 전설 속의 존재였다.
그게 문제였다. 루블리에의 방에 물건들을 가져와 정리를 마친 라리가 나가고서, 새틴은 성물을 끌어안은 채 돌아온 루블리에를 쳐다보았다.
“새틴?”
“……또 한동안 밤에 늦게 들어오겠네?”
장기 출장과 수해 지원을 겪어 봤기에 예감이 왔다. 총괄자인 그가 누구보다 바쁠 터였다.
“일부러 기사들이 각자 집이 있는 구역 근방을 순찰하도록 수색 범위를 짰어. 나는 이 근처에 있을 거야.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금방 달려올 수 있도록.”
저를 안심시키려는 목적이 뻔히 보였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악령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
“글쎄. 내가 알기론 유일한 목격자가 넌데……. 네 눈에 안 보였다고 했으니 그 진술을 따라야겠지. 기사단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색이나 형태일 거라고 전달해 뒀어.”
“그럼 어떻게 분간해?”
“감각으로. 너도 느꼈잖아. 비슷해.”
“잡을 수는 있는 거야? 지방에서는 소문이 진작에 돌았지만 못 잡았다며.”
“무조건 잡아 없애는 게 내 목적이야. 그쪽은 사람이 적고 활동하는 시간도 짧아 피해가 적었나 본데, 우리는 사람도 많고 동물도 많아서 악령이 돌아다니면 훨씬 피해가 커. 그리고 난 팔라딘이야. 법황 성하께서 계시는 수도에 악령이 설치고 다니게 둘 순 없지. 여기서 놈을 한번 겪어 봐야 지방의 자경단들에게 대처 방법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
들어도 들어도 마음이 쉬이 놓이지 않았다.
새틴은 마귀를 퇴치했던 성물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루블리에가 가져온 가보도 침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 방 안에 성물이 두 개나 모였다. 하나는 카 딜론 가로 돌아갈 성물이고, 하나는 여전히 새틴이 직접 보관하고 있는 성물이었다.
새틴은 델 마레의 성물을 습관대로 베개와 침대 사이에 감췄다.
루블리에는 그런 새틴을 빤히 관찰했다.
“아직도 그 조각을 품에 안고 다니는 거야?”
“내가 직접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
루블리에는 새틴이 상자 속에 자신을 가두어 두고 곧 떠날 여행자처럼 군다고 지적했었다.
사실이었다. 델 마레에서 온 것들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종류를 불문하고 언젠가 다시 델 마레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겼다. 아직까지는 제 마음이 그러했다.
“새틴. 가운데에 사람이 두 명은 더 들어와도 되겠어. 그러다 굴러떨어지지 말고 이쪽으로 좀 오지그래?”
“괜찮아. 여태까지 자다가 침대 밑으로 떨어진 적 없어.”
새틴은 전날처럼 멀찍이 떨어져 누워 대꾸했다. 새우처럼 오므린 자세도 그대로였다.
내내 혼자 자다가 다른 사람과 이부자리를 공유하려니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잠들어 몸부림을 치지는 않을까, 잠꼬대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걱정이거니와 루블리에는 무신경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건 마치 너에게 있어 내가 불편하냐, 악령이 위험하냐의 싸움 같군.”
루블리에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정확하게 꼬집었다. 정말 제 기분과 딱 맞아떨어져서 새틴은 긴장한 와중에도 풋 웃음을 삼켰다.
“이거 남편 체면이 영 말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