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12)

<42화>

루블리에가 새틴의 팔을 잡았다.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데리고 망설임 없이 앞서갔다.

얼떨결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루블리에의 침실이었다. 그가 누워 있던 모양대로 이불이 흐트러져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 더 실감 났다. 새틴은 그가 이끄는 대로 모서리에 어색하게 앉았다.

“무서워하지 말고 자. 그게 사람이든 귀신이든, 여긴 안 나타나.”

그의 첫마디에 왜 루블리에를 찾아왔던 건지, 뒤늦게 의문의 답을 찾았다.

본능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을 향해 달려온 거다.

이 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을 찾아 달려온 거다. 그래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그는 저를, 그리고 이 집을 위험에서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지금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곁에서 떨어진 순간의 불안감이 더 컸다.

새틴은 모퉁이에 조심조심 몸을 뉘었다.

셋이 누워도 넉넉할 만큼 큰 침대였으나 공간을 넓게 차지하기는 여러모로 어색했다.

몸을 옹송그리고 눕는 게 안정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리니 익숙하지 않은 체취가 코언저리를 스쳐 갔다.

비누를 다른 걸 쓰는 걸까. 엉뚱한 짐작을 하다 새틴은 새삼 놀랐다.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드는 저 자신에게 놀라운 마음이 절반, 루블리에가 바로 옆에 있으니 그만큼 안정이 빨리 찾아왔나 싶은 마음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루블리에가 반대편의 이불을 걷고 누웠다.

침대가 한 차례 출렁였다. 마주 보는 자세라 흠칫 당황했다. 깜짝 놀란 새틴이 얼른 루블리에를 등지며 돌아누웠다.

깜깜했고 조용했다.

그런 만큼 상대의 기척에는 더 예민해졌다.

새틴은 숨을 얕게 쉬었다.

하지만 호흡은 줄곧 균일하지 않게 오르내렸다. 쉽게 잠이 오지 않을 밤이었다.

“새틴, 자?”

그래서 루블리에가 말을 걸었을 때, 새틴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안 자.”

“계속 잠이 안 와?”

루블리에의 염려에 새틴은 잠시간 잠잠하다 물음으로 답했다.

“……아까 바보 같았지?”

“아니.”

“밤에 무섭다고 징징거리면서 부모님을 깨우는 어린애처럼 보였지 않아?”

루블리에가 나직하게 웃었다.

“표현이 상당히 현실적인데. 어릴 때 자주 그랬어?”

“다섯, 여섯 살쯤에 혼자 자게 되면서 가끔 밤이 엄청 무서웠긴 했어. 그래도 헛것을 본 적은 없었는데. 가위에 눌려본 적도 없고. ……루브,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게 그냥 가위에 눌린 걸까? 그렇다면 눈 뜨고서 가위눌린 기분이야. 내가 뭘 본 건지 모르겠어. 정말 라리의 말대로 착각한 거야? 하지만 난 이제 이 집이 예전처럼 낯설지도 않고, 겁을 먹을 나이도 한참 지났는데.”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했다. 서서히 흐르는 시간에 따라 겸연쩍은 마음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해서, 새틴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 뭔가가 나랑 같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착각해서 호들갑을 떤 거라면 우습겠지?”

“전혀.”

루블리에가 웃음기를 지우고 대답했다.

“정말로 누가 널 지켜보고 있었던 것보다는 네가 착각한 쪽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낫지. 네가 실제로 위험하지 않았다는 게 나에겐 중요하니까.”

오래 좋아했다는 고백을 듣고 난 후라 그런가.

기분이 예전과 완전히 달랐다.

다정함으로는 기요른을 쫓아갈 사람이 없으리라 믿었는데 나이가 들기는 들은 모양이다. 그가 새롭게 느껴지는 걸 보면.

새틴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까는 네가 이 집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이상하지. 무의식중에 너만 찾아가면 나는 안전할 거라고 믿었던 거야.”

“약속하지. 내가 있으면 너는 무조건 안전해. 그렇게 할게. 앞으로는 느낌이 이상하면 망설이지 말고 내 이름을 불러. 네가 오는 것보다는 내가 가는 게 빨라.”

정말 그럴 터였다. 제 비명을 듣자마자 그 어떤 사용인들보다 먼저 방문을 벌컥 열고 저를 받아주었던 좀 전을 떠올리면 확실하게 그러했다.

새틴은 베개에 옆얼굴을 꾹 눌렀다. 이성이 돌아오니 슬슬 부끄러워졌다. 빨리 잠들었으면 좋겠는데…….

“잘 자, 새틴.”

그래도 여전히 잠들기는 쉽지 않을 것만 같았다.

* * *

루블리에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내내 잠든 척 억지로 눈을 감고 있었어도 깊이 잠드는 건 역시 불가능했다.

잠이 안 오는지 마찬가지로 꽤 오래 뒤척거리던 새틴은 첫새벽 어느 순간 그대로 잠들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잔잔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루블리에는 제게 등 돌리고 누운 길고 가느다란 머리 타래를 바라보았다.

커튼의 좁은 틈 사이를 밀고 들어온 햇빛에 색 엷은 머리카락이 은사처럼 반짝거렸다.

아침이었다. 평소와 같은, 평소와 다른 아침이었다.

루블리에는 손을 뻗어 흩어진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쓸어내렸다.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워, 간밤의 유령 아닌 유령 소동이 꿈처럼 느껴졌다. 어쩐지 다소 게으름을 부리고 싶은 날이었으나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여느 날처럼 시중을 드는 사용인이 문을 똑똑 두드렸다.

“주인님, 일어나실 시…….”

“쉿.”

루블리에는 몸을 일으키면서 재빨리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깊이 잠들어 있는 새틴을 발견한 사용인이 조용조용 돌아나갔다.

새틴은 루블리에가 출근 준비를 마칠 때까지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늦게 잠들었으니 편히 자고 일어나도록 깨우지 말라는 지시에 루블리에의 침실만 날이 밝아도 밤이었다.

마구간지기가 흑마를 대령했다.

루블리에는 말에 올랐다.

집안의 사용인들이 일렬로 서서 배웅을 나왔다. 항상 반복하는 일상이었다.

습관대로 짧은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서려다, 루블리에는 문득 ‘어제 무언가가 내 옆까지 다가왔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던 새틴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방향을 반 바퀴 튼 것은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새틴의 침실 근처를 둘러보고 갈 만큼의 여유는 충분했다.

사용인들이 어리둥절하며 주인을 따라 움직였다. 벽을 따라 꺾으니 멀리 들판의 풍경에 면한 새틴의 침실이 보였다.

어젯밤 방을 한 차례 뒤엎었다가 정리하고 커튼을 드리워놓아 텅 빈 침실 안이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루블리에는 말을 몰아 침실 가까이 다가갔다. 언뜻 보기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예 말에서 내려 창턱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이내 루블리에의 눈빛이 변했다.

창틀 아래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많은 양이 아니라서 잘 눈에 띄진 않았으나 기사단에서 팔라딘의 지위에 오를 때까지 삼 년을 구른 루블리에는 단박에 확신했다.

갈색으로 색이 바랜 그것은 분명 혈흔이었다.

“어머, 이게 뭐야!”

주의 깊게 혈흔을 살피는 루블리에를 따라 사용인들이 와르르 몰려들었다. 뒤늦게 정체를 알아챈 라리가 소스라치며 입을 틀어막았다.

“마님께서 다치셨어요?”

“새틴의 피는 아냐.”

새틴이 다쳤으면 알았을 것이다. 본인은 허둥지둥하느라 몰랐을지언정, 그녀를 내내 안고 있었던 제 눈에는 반드시 띄었을 테니.

“어, 여깁니다! 여기 있어요!”

혈흔을 중심으로 쭉 퍼져 근방을 수색하던 사용인들 중 하나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루블리에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거기 뭐가 있지?”

“염소입니다.”

“염소?”

정말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밭 안에 사지 뻣뻣한 염소가 한 마리 누워 있었다.

루블리에는 염소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살을 물어뜯은 흉터가 여기저기 남아 흉측했다.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난 듯 보였다.

최소한 하룻밤은 지났을 것이다.

사체에 손을 대어보니 온기가 식어 싸늘하고 딱딱했다.

하필이면 새틴이 종종 고개를 얹고 물끄러미 내다보던 정경이었다. 라리가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추측했다.

“근처의 목장에서 염소를 길러요. 아마 축사를 빠져나온 게 아닐까 싶은데요.”

“어디서 맹수라도 나타나 습격을 했나 봅니다. 어제는 마님께서 아마 염소가 죽어가면서 낸 기척을 듣고 놀라셨던 것 같습니다.”

기분이 찜찜한 한편으로 전날 밤 새틴이 일으킨 소동에 이유가 없진 않았다는 사실에 사용인들은 그럭저럭 납득했다.

하나 루블리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왜 염소의 피가 새틴의 창문 근처까지 튀어 있단 말인가. 염소를 습격한 맹수가 어슬렁거려서?

그러나 진짜 맹수가 있었다면 죽어가는 염소의 기척까지 감지했던 새틴이 좀 더 확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유 없이 동물이 죽어 나간 광경을 목격한 기억이 있다.

대주교는 악령의 소행이라고 말했다.

새틴의 증언 또한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만약 새틴이 느낀 것이 악령이었다면, 악령이 새틴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던 거라면, 악령이 그 방 근처에 잠시나마 머물렀던 거라면.

새틴은 평생 살기도, 위협도 겪어보지 못하고 귀하게 자란 아가씨였다.

동물의 생명을 해치는 정체 모를 존재가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 그 정도만 떨다가 안정을 되찾았다는 건 도리어 상당한 강심장으로 보아도 좋을 터였다.

“목장의 사람들을 불러올까요?”

루블리에는 몸을 일으켰다.

“새틴이 불안해할 테니 요란하게 처리하지 마. 염소는 이 근처에 묻어주고 목장에 가서 밤새 수상한 기척은 없었는지 알아 와라. 그리고 오늘 하루 내가 퇴근할 시간까지 새틴을 혼자 두지 말고, 다들 두셋 이상 모여 다니도록 해.”

“주인님께서도 맹수의 짓이라고 생각하세요?”

맹수. 루블리에는 미간을 좁혔다.

“……그래, 잡아야 할 맹수가 있군.”

저 먼 지방의 대주교들 다수도 모른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던 악령이 법황이 머무르는 수도의 외곽에 나타났다.

비록 중심지와는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다고 해도 칼데브란카 안에서 제일 안전하다고 일컬어지는 장소에 이런 기분 나쁜 조짐이라니.

그것도 제가 사는 집, 새틴이 사는 집 근처에서.

루블리에는 찌푸린 인상을 끝까지 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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