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 * *
‘널 좋아했으니까. 좋아하는 여자와 살아보고 싶어서 결혼했어.’
이미 모든 불을 끄고 잠들 준비를 끝마쳤지만, 막상 잠은 오지 않았다.
새틴은 침대에서 일어나 라리가 곱게 드리운 커튼을 더듬더듬 치우고 창문을 열었다.
안과 밖의 공기가 섞이면서 냄새가 달라졌다. 퍽 서늘했다.
묵직하게 고인 밤과 대면한 채로 새틴은 창턱에 팔꿈치를 얹고 머리를 기댔다.
루블리에의 결론은 명료했다. 좋아하니까 너랑 살아보고 싶었다.
너무도 간단하고 명료해서 오히려 난처해지고 말았다.
시야가 창틀을 배회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닦인 창틀에는 밤그늘이 거뭇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새틴은 손가락으로 밤그늘을 닦아보았다. 당연하지만, 닦이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위로 그늘이 자리 잡았다.
기한을 둔 날짜는 여전히 착실하게 흐르고 있었다. 잠시 세어 보았다.
어느덧 두 달하고도 반이 채 안 남았다.
같이 지낸 시간보다 멀리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긴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쌓인 날들을 합치면 홀쭉하던 달이 둥그렇게 차오를 정도는 되었다.
그동안 못 살 정도로 괴로웠냐, 하면 그렇진 않았다. 그냥…… 문뜩문뜩 난처하기도 하고 간혹 고맙기도 하고, 이냥저냥 지냈다.
가족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닌데 사용인들처럼 한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이면 그럭저럭 용인됐다.
한집에 같이 사는 사람…….
새틴은 손등 위에 흐르는 그림자를 직시했다.
일견 건조하게 들려도, 제게 있어 남편이란 한집에 같이 사는 사람이 맞았다. 그런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다짐했다.
한집에 같이 살면서 얼마간의 일상을 공유할 사람. 함께 배의 닻을 올리고 노를 저을 사람.
델 마레의 후계를 이을 아이를 낳고 함께 키울 사람.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게 루블리에가 될 수 있을까?
새틴은 고개를 흔들려다가 말았다. 모르겠다. 모르겠어서,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딱 떨어지는 답이 나오지 않아서 당장은 판단을 유보하고 싶었다.
한데 어째서 망설임 없이, 죄책감도 없이 툭툭 꺼냈던 이혼이라는 단어가 아까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걸까. 그의 어떤 면모가 말문을 틀어막은 걸까.
한동안 고민에 잠겨 있던 새틴이 창가에서 머리를 떼고 팔꿈치를 들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밤에는 바람이 한층 서늘해졌다. 웃자란 풀들이 버석거렸다.
머릿속을 비우니 이제야 주변의 소리가 들려왔다.
더불어 아주 덥거나 아주 추운 계절보다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다른 바람이 부는 시기에 더 잘 감기에 걸린다던 라리의 잔소리도 떠올랐다.
창을 닫고 이제 자야지. 팔을 뻗어 창문을 닫으려던 새틴이 불현듯 머뭇거렸다.
무언가 새틴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무 깜깜해서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감이 있다. 등골이 쭈뼛 섰다.
뭐지? 저기에 뭐가 있는 거지?
자세히 보려 했으나 사방이 너무도 어두웠다. 달의 부연 빛으로는 윤곽이 쉽사리 분별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음영의 깊이만 미묘하게 달라질 뿐이다.
불. 불을 켜야 해. 새틴은 속으로 뇌까렸다.
잘못 느낀 것인지도 몰라. 깜깜한 밤이라서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불을 켜고 비춰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사람은 밤이면 눈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흔히 헛것을 보곤 한다.
창문을 꼭 닫아야 하는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창틈으로 들이치는 찬기에 감기가 걸리기도 하지만, 부스럭대는 커튼 자락을 착각하고 지레 놀라게 되는 경우도 벌어지는 까닭이다.
커튼을 닫고, 창문을 닫고, 불을 가져오고……. 응? 아니야. 불을 가져오고, 커튼을 닫고…….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뒤엉켰다. 머리는 분주한데 두 다리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멍청이가 된 것 같았다.
분명 뭔가가 있었다. 지금도 있다. 유독 밀도 짙은 어둠이 고인 저곳 어딘가에 도사린 채로 이쪽을…….
멍하게 의심하다가 새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상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왜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 거지? 혹 저 어둠 자체가 ‘무언가’라면.
직감일까. 착각일까. 밤은 모든 색을 가린다. 어둠이 꿈틀거렸다. 거리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공포가 발목을 묶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어쩌면 저 멀리에.
어쩌면 이 앞에.
새틴은 빳빳하게 굳어 창문 밖만 주시했다. 얼핏 묘한 냄새가 풍긴 듯했다. 쇠 냄새와 비슷한, 산뜻하지 않은 냄새였다.
제 숨소리가 오르내렸다. 그러다 이게 정말 제 숨소리가 맞나, 불쑥 의심했다. 밤이 숨을 쉬는 듯했다. 살아 있는 듯했다. 움직이는 듯했다.
덜컹.
돌연 창문이 흔들렸다. 바로 옆이었다. 밤의 안광이 번뜩였다. 그렇게밖에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것의 숨소리가 공기에 섞였다.
호흡이 목덜미를 스쳤다. 척추를 타고 소름이 쭉 내달렸다. 그 감각이 신호가 되었다. 굳어 있던 손발이 일시에 풀렸다. 저릿저릿한 통각이 퍼졌다.
새틴은 침실에서 달려나갔다. 비명은 그 후에야 터져 나왔다.
“아악!”
“새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벌컥 열렸다.
문고리를 잡으려다 놓쳐 앞으로 굴러 넘어질 뻔한 새틴을 루블리에가 덥석 받아 안았다. 다리의 힘이 풀렸다. 새틴은 그에게 기대어 주저앉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막 잠이 들려던 참에 새틴의 비명을 듣고 벌떡 일어났는지 가운조차 제대로 여며 있지 않았다.
제 얼굴에 닿아 있는 것이 루블리에의 가운인지 맨살인지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새틴이 더듬거렸다.
“루, 루브. 내 침실 근처에 뭐가…… 뭐가 있어.”
당황하거나 욱했을 때만 들을 수 있는 새틴의 말버릇이 지금 튀어나왔다. 루블리에는 빛 한 톨 새지 않는 새틴의 침실 쪽을 쳐다보았다.
복도와 마찬가지로 침실은 컴컴했다.
“뭐가 있어?”
루블리에의 표정이 대번에 달라졌다.
“마님, 어디 계세요?”
새틴의 비명을 들은 사용인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몇몇이 불을 밝혀 들고 있었다. 일렁이는 빛에 어둠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빛이 반가워 새틴은 눈이 부신 줄도 모르고 넋을 놓았다. 공포에 질린 낯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맙소사, 마님. 괜찮으세요? 왜 그러세요?”
“새틴의 침실을 살펴봐.”
잠옷 차림으로 주저앉은 새틴을 추슬러 안아 올리며 루블리에가 지시했다.
사용인들이 우르르 새틴의 침실로 다가갔다. 새틴은 기함했다.
저를 해칠 것 같던 공포가 아직도 생생했다. 절로 새된 비명이 터졌다.
“안 돼, 위험해! 아무도 들어가지 마!”
침실의 문가에서 사용인들이 갸웃거렸다.
“방에 아무것도 없는데요, 마님.”
“도둑이라도 지나간 거예요?”
도둑이라는 짐작에 개중 용기 있는 두엇이 침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집이면 또 몰라도 팔라딘께서 사시는 집인데 암만 간 큰 도둑이라도…….”
사용인 하나가 중얼거렸다. 루블리에도 도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팔라딘의 집에, 상주하는 사용인들도 일고여덟이다. 도둑이 들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마님. 창문은 왜 열어 두셨어요? 잠결에 잘못 보신 건 아니에요?”
방 안을 기웃거리던 라리가 새틴을 돌아보며 물었다.
“창문에 손대지 마, 라리!”
“이미 닫고 커튼도 다시 쳤어요, 마님.”
새틴이 반문했다.
“……거기 아무것도 없었어?”
“그럼요. 마님께서 가위에 눌리신 건지도 몰라요.”
라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새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들지 않았었다. 정신이 멀쩡했다. 따라서 심장이 얼어붙던 그 감각은 거짓일 리가 없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새틴은 루블리에에게 매달리듯 안겨, 주춤주춤 걸음을 뗐다. 그 사이 사용인들은 가구를 모조리 열고 침대 아래까지 손을 넣어 더듬으며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루블리에는 허옇게 질려 있는 새틴을 다독거렸다.
“걱정하지 마. 이 집은 안전해. 그런데 뭘 본 거야, 새틴?”
“……몰라.”
새틴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다.
결국 모른다는 답변만 재차 내놓게 된 저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자다 말고 뛰쳐나온 사용인들은 새틴이 불을 끄고 누워 있다가 헛것을 봤구나, 하는 기색이었다.
순간 억울함에 화가 났다. 착각한 거라는 오해는 받기 싫었다.
“뭔지 몰라! 하지만 분명 뭐가 내 앞에 있었어. 나를 봤고, 나한테 다가왔단 말이야. 날 해치려고 했어. 잘못 본 게 아니야!”
“알았어. 밖을 둘러보고 오지. 새틴, 여기 있어.”
루블리에가 새틴을 떼어놓으려 했다. 온기가 확 멀어졌다.
새틴은 저도 모르게 루블리에를 붙잡았다.
“나가지 마.”
“새틴. 내 눈으로 봐야 뭐였는지를 알지.”
“안 돼. 나가지 마.”
“네가 웬일로 이렇게까지 겁을 먹었지?”
“느낌이…… 느낌이 이상해서 그래.”
자꾸만 몸서리가 쳐졌다.
여태 무서워했던 저 밤의 어딘가를 이 집의 누군가가 나가 둘러본다고 상상하자 더욱 숨이 막혔다.
그 사람이 루블리에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한기가 으슬으슬 기어올랐다. 추위를 피해 루블리에에게 파고들다가 새틴은 불쑥 의문을 품었다.
왜 루블리에를 찾아왔지?
이 집에서 가장 친한 사람은 델 마레서부터 그녀를 따라온 라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틴은 아까 라리를 떠올리지도 못했다.
종을 울렸으면 라리가 바로 일어나서 달려왔을 텐데, 그러기는커녕 무작정 비명을 지르며 루블리에의 침실로 뛰어갔다.
“늦었으니까 우선 다들 들어가서 쉬지.”
비몽사몽 반, 수런수런 반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용인들을 루블리에가 손짓으로 흩었다.
모두 어리둥절해서 돌아가는 중에 라리가 끝까지 남아 걱정스레 물었다.
“저, 마님은…… 잠드실 때까지 제가 곁에 있을까요?”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새틴과 있을 테니까.”
새틴은 침대와 침대 머리맡의 창문을 번갈아 응시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이 방 자체가 찜찜했다. 창문이 덜컹거리기만 해도 소스라치며 깨어날 것이다.
도저히 잠들 기분이 아니었다.
“못 잘 것 같아.”
“내가 있어도 무서워?”
“이 방이 무서워.”
새틴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여기서 잠들면 그것이 다시 나타나 저를 향해 차디찬 숨을 내쉴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다, 안전하다, 단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은커녕 더 불안해졌다.
“……나 응접실에 있을래.”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루블리에가 저만 지켜보며 밤을 새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응접실에서 잠드는 게 나았다. 새틴은 몸을 빙글 돌려 침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이리 와, 새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