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12)

<40화>

* * *

딜라일라는 마차에서 내려 법황청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초대도 받지 못했던 장소를 기요른의 힘을 빌려 들어왔으나 두 번째는 기요른 없이도 따로 부름을 받아 찾아오게 됐다.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오는 것이다.

그리고 딜라일라의 인생에 있어 ‘이런 날’은 간혹 한 번씩 나타나곤 했다. 평소와 다른 하루를 보내고 나면 삶에는 뚜렷한 변화가 찾아왔다.

예를 들면 시골의 촌뜨기 소녀가 후원자의 눈에 띄어 수도의 땅을 밟게 된 날.

처음으로 대극장의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른 날.

또 연하고 약한 인상을 가진 파수꾼 집안의 남자가 저를 감싸며 몸을 던진 날.

때때로 겪었더니 이제는 육감도 생겼다. 차곡차곡 쌓아온 경험에서 얻은 산물이다. 지금도 육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잘 해봐.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가 될 거야. 네가 하기에 따라서 말이야.

딜라일라는 겁이 없었다.

겁이 많은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고향을 벗어날 마음조차 먹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을 상대로는 겁 없이 굴어야 했다. 그러면 늘 기대보다 더 큰 보답이 돌아왔다.

“예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미리 지시를 받아두었던 시종이 대기하고 있다가 나타나 딜라일라를 안내했다. 딜라일라는 일전에 지나갔던 회랑을 사뿐사뿐 걸어갔다.

이 길에서 꺾어지면 기념식을 열었던 연회 홀이 나왔다. 벽을 따라 성화가 걸려 있는 광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다만 음악이 걷히고 손님이 사라진 법황청은 떠들썩한 기념일 날이 꿈이었나 싶을 만큼 고적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쪽입니다.”

딜라일라가 아는 길은 딱 연회 홀까지였다. 그러나 시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깊고 고요한 내측 복도로 발뒤축을 조심히 디디며 들어갔다.

딜라일라는 시종의 뒤를 따라갔다. 아무나 다니는 통로가 아닌지 길을 비추는 불빛부터가 촉촉하게 달라졌다.

몇 개의 문을 건너간 시종이 방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손님의 도착을 알리니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딜라일라는 상큼 몸을 들였다. 동시에 환한 금발의 남자가 펜을 놓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딜라일라를 부른 사람은 키리온이었다.

“딜라일라가 키리온 대주교 예하를 뵙습니다.”

그래, 살다 보면 평민 출신의 가수가 법황의 큰아들과 독대하는 날도 오는 것이다.

키리온이 고갯짓으로 빈 의자를 가리켰다. 딜라일라는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저번부터 느낀 건데, 배우라 그런지 이름이 상당히 신비롭군. 듣자마자 바로 외워지는 어감이야. 본명인가?”

인사도 그 무엇도 아닌 첫마디가 다짜고짜 날아들었다. 딜라일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바꾼 이름이에요. 배우는 관중들에게 기억되는 것으로 살아가는 존재니까요.”

“예술가들은 기억되기 위해서 이름까지 바꾸나?”

“이름뿐일까요. 이름, 외모, 말투, 제스처. 그 무엇이든 도구가 될 수 있죠.”

키리온이 놀랍다는 듯이 수긍했다.

“그렇군. 사람들이 그대를 유독 잊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소. 이번 기념일에는 그대 도움 덕분에 기념식이 무사히 끝났지. 미리 초대했던 다른 배우들에게는 공연에 대한 사례금을 지급했었는데, 막상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그대에게서 제일 큰 도움을 받았어. 이름은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딱 맞더군. 대주교로서 고맙다는 인사는 전해두어야 할 것 같아 불렀소.”

딜라일라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키리온은 잠시 놓았던 펜을 도로 쥐었다.

내용 검토를 끝내고 법황의 인장을 찍어야 할 서류들이 오늘도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국민들은 법황의 눈과 귀와 입이 나라를 통치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 나라는 무수한 서류들로 통치된다. 읽어야 할 글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펜은 종이에 점 하나 찍지 못하고 위를 배회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시간이 조밀하게 지나갔다. 마치 물살을 가르는 듯한 침묵이었다.

펜촉에 갈 곳 없는 잉크가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다. 동그랗게 매달린 방울이 몸집을 부풀리더니, 서류 위로 뚝 곤두박질쳤다.

검은 파동이 번졌다.

키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딜라일라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뿐인가요, 예하?”

맹랑하기 짝이 없는 반박이 귓가를 사로잡았다. 낯선 장소, 최고위 성직자를 앞에 두고도 그녀는 별로 겁을 내지 않았다.

키리온은 반사적으로 딜라일라를 직시했다. 딜라일라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긴 속눈썹이 가늘게 그늘을 드리웠다가 서서히 걷혀가는 과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턱 끝을 요요하게 세웠다. 미소 스민 아랫입술이 도도록하게 도드라졌다. 날큰히 늘어진 눈초리는 요염한데, 그 안에 든 눈은 신기할 정도로 옅고 어린 하늘빛이었다.

“대가로 바라는 게 있으시오?”

키리온의 물음에 딜라일라가 연푸른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제가 무얼 바랄 수 있나요?”

“공식으로 초청한 무대가 아니고 그대의 연회 입장 또한 편법에 가까워서 법황청의 이름으로 치하하기는 좀 곤란하오. 사례금은 따로 책정해 보겠지만.”

“돈은.”

딜라일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하지 않아요. 물론 보시기에 대단친 않아도 저는 극장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프리마 돈나랍니다.”

당돌한 답변에 키리온이 웃음기 스민 시선으로 딜라일라를 훑었다.

“돈은 싫다? 그렇다면 나는 그대에게 사례할 만한 것이 없는데. 아니면 바라는 게 달리 있나?”

극심한 신분 차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대주교와의 독대. 상을 직접 골라 갖겠다는 건방진 요청에도 화를 내지 않는 남자.

그것이 관대함인지, 혹은 저를 향한 호기심인지, 혹은 호기심을 넘어선 관심인지 딜라일라는 이미 얼마간 답을 눈치챘다.

“네.”

“무엇이오? 명예?”

“아니요. 저는 예하를 곤란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무대가 천직인 사람이라 그런가, 그대는 관객을 몹시 궁금하게 하는군.”

키리온의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렸다.

톡. 토독. 톡. 박자가 일정하게 울렸다. 딜라일라는 그 간격을 교묘하게 피해, 다시금 수수께끼를 던졌다.

“답을 알고 계시지 않나요, 예하?”

“내가 말이오?”

“예하께서는 그날 저를 세 번 쳐다보셨지요.”

마지막 시선까지 겪은 후에 딜라일라는 결론을 내렸다.

첫 번의 시선은 탐색.

두 번의 시선은 호감.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시선으로 인해 그녀는 이 자리에 불려왔다.

키리온은 부정하지 않았다. 마치 눈치 게임과도 같은 자리였다. 서로가 서로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묵언이 불러오는 긴장감을 즐겼다. 그러나 이 긴장감은 고작해야 전초전에 그칠 뿐이다.

누군가는 먼저 주사위를 던져야 했다.

딜라일라는 제 순서를 피하지 않았다.

“예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세요.”

키리온의 손이 뚝 멎었다. 탁자를 두드리던 소리도 동시에 딱 그쳤다.

“내 가장 소중한 것?”

미묘한 얼굴이었다. 딜라일라의 심중을 읽어내려는 눈빛이 그녀를 샅샅이 훑었다. 딜라일라는 서두르지 않았다.

키리온이 고개를 슬쩍 꺾었다.

“그대가 생각하기에는 무엇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오?”

결정은 순식간에 내려졌다. 본능에 의거한 소망이 입술을 열고 튀어 나갔다.

“예하. 제가 그날 삼십 분을 채워드렸지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딜라일라가 사분사분하게 다가갔다. 한 손으로 서류를 덮어 가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키리온의 주의를 빼앗아 가져왔다.

“삼십 분. 예하의 삼십 분을 제게 주세요. 나라에서 가장 귀하신 분의 온전한 삼십 분. 저는 그것을 원합니다.”

그가 어떤 눈으로 제 무대를 지켜보았는지 뚜렷히 기억하고 있다. 더불어 지금 키리온의 눈빛이 그날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기회를 놓치는 여자가 아니었다.

자신 있었다. 오는 기회는 잡고, 없는 기회는 만들어서라도 쟁취하면 된다. 하물며 오늘은 완전히 완성된 기회나 다름없었다.

키리온은 딜라일라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법황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장자의 지위에 따라온 책임이 늘어났기에 강제로 일 중독자가 되었을 뿐, 본래 그는 여성에 관해서라면 기요른처럼 숙맥이지도, 루블리에처럼 철모르지도 않았다. 루블리에에게 ‘너 새틴을 계속 쳐다보더라.’ 하고 일깨워준 사람이 일단 키리온이었다. 남자와 여자에 관해서라면 노련한 두 사람이 만났다. 이 이상의 탐색은 무의미했다.

딜라일라는 그의 침묵에서 승낙의 표시를 읽었다.

도리어 기대감마저 느껴졌다. 그가 떠올린 ‘가장 소중한 것’은 벌써 절반쯤 딜라일라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이는 소망이 아닌 확신이었다.

누가 먼저였는지 순서를 더듬을 까닭조차 없었다. 입술이 입술을 나른하게 훑었다. 키리온은 다소 서둘렀다. 오랫동안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던지라 그간 쌓인 갈증이 컸다. 딜라일라는 기꺼이 그의 갈증을 받아마셨다.

딜라일라가 키리온의 집무실을 나섰을 땐, 그로부터 한 시간 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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