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아. 그제야 새틴은 루블리에가 갑자기 왜 카 딜론의 성물을 가져왔는지 깨달았다.
건국기념일 날, 후계에 대한 새틴의 비판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이야기를 알려주려고 일부러 집에 들러 챙겨온 것이다.
더불어 키리온에 대해 루블리에가 지니고 있던 강한 믿음을 새틴은 얼마간 이해했다. 이유가 있는 믿음이었다.
집안의 성물이 증명했다면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오랜 친구이기에 후계로 밀어주고 싶은 욕심이 아니어서. 실망할 일이 없어서.
응? 다행이라니?
게다가 실망이라니…….
요즘 자꾸 마음에 이런저런 곁다리가 붙는다. 새틴은 딴소리로 상념을 밀어냈다.
“좀 억울하네요.”
“뭐가?”
“가문마다 똑같이 성물을 나눠 받았는데 왜 카 딜론 가의 성물에만 기능이 더 붙었어요? 기사들도 유난히 많이 배출되고, 신탁이 내려지기도 전에 후계자도 누군지 암시를 받고…….”
“그래서 부러워?”
충성의 델 마레라는 상징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랑스럽지만, 이왕 받는 성물에 성능이 추가로 더 붙어 있다면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새틴은 솔직하게 끄덕였다.
“부럽긴 하죠.”
루블리에가 성물을 턱짓했다.
“부러워할 거 없어. 자식에게 물려주면 되잖아.”
물려줄 성물이라면 이쪽에도 벌써 하나 갖고 있다. 새틴은 재빨리 주장했다.
“저는 델 마레가 우선이거든요?”
“첫째는 델 마레로 해. 카 딜론은 둘째라도 상관없어.”
“물론이죠.”
그야 자신이 낳을 첫째 아이는 무조건 델 마레의 이름을 잇는 게 당연했다. 델 마레가 어떤 가문인데.
도도하게 받아치던 새틴은 이내 눈을 샐쭉하게 떴다.
가문 이야기를 하다 난데없이 루블리에와 가족계획을 짜고 있었다.
“잠깐만, 왜 얘기가 이렇게 이어져요?”
“왜라니? 파수꾼 가문 내에서 후계자 문제 합의가 얼마나 중요한데?”
“아뇨, 제 말은 그걸 어째서 카 딜론 경이랑 하냐는 거죠.”
“그럼 누구랑 하게? 남편을 여기 버젓이 두고.”
“우리가 언제 애를…….”
입술 한번 맞춰본 적도 없는 사이에 아이는 무슨.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다. 더구나 한계가 명확한 결혼이다.
기함한 새틴이 항변하려 입을 뗐다.
“카 딜론 경, 우린.”
이혼할 거잖아요.
종종 해온 얘기였다. 더불어 이혼을 먼저 요구한 사람도 저였다. 한데 막상 반복하려니 웬일로 입이 안 떨어졌다. 새틴은 차곡차곡 포개진 두 쌍의 손을 주시했다.
루블리에는 늘 이혼을 안중에 두지 않고 살고 있었다. 농담처럼 던지는 말들이 항상 그러했다.
도망가지 말라더니만 이렇게라도 붙잡고 있는 걸까.
기요른도 의외로 잘 지내고 있어서 놀랍다는 소리를 했다. 그 말에 벌컥 화를 내기는 했어도, 새틴은 조금쯤 공감했다.
어쩌면 내심 공감했기에 지레 찔려 기요른에게 더 화를 냈는지도 모른다.
같이 잘해 볼 마음이 없다는 말은 제가 먼저 루블리에에게 했던 소리였기에.
그것도 결혼식을 끝내자마자 갈라지자고 요구했었다.
“……이런 결혼은 제 인생 예상에 없었어요.”
하려던 말을 삼킨 채로 한동안 부자연스러운 침묵을 지키다, 새틴은 자못 뚜한 듯 톡톡한 듯한 어조로 서두를 열었다.
“내 예상에도 없었어.”
루블리에가 수긍하다가, 재빨리 말을 고쳤다.
“네가 없었던 게 아니라, 너는 있는데 방법이 없었지.”
너는 있는데 방법이 없었다. 새틴은 의미를 묻지 않았다.
“이걸 지금에서야 물어보네요. 왜 저였어요?”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갔다. 목소리가 흔들리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이 일었으나, 의외로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눈치가 암만 발바닥에 달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쯤이면 안다. 그가 이 결혼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름값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그는 결혼이 다른 이유로도 성사된다고 답했다.
‘우리 결혼했다고, 새틴.’
‘이왕이면 진심이 되어보는 건 어때?’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래?’
본인이 가벼운 마음으로, 농담처럼 한 결혼이라면 입에서 나오지 않을 이야기들이었다. 사실 남의 결혼식에 끼어들어 한 청혼부터가 예사 결단이 아니다.
세상 바보라도 눈치채겠다. 이만한 직설도 드물다. 그는 둘러 말하지 않는 남자였다.
“자꾸 보여서?”
“그게 전부예요?”
“5년 동안 자꾸 보였거든.”
“…….”
“실은 나도 잘 몰랐는데 어느 날 키리온이 그러더군. 왜 자꾸 델 마레 가에서 온 여자아이를 쳐다보고 있냐고. 그때 깨달았던 것 같아.”
새틴의 기억도 비슷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 건지 루블리에는 번번이 근처에 와 있었다.
장난을 걸고, 참견하고, 성가시게 집적거리고, 그래도 새틴이 짜증을 내거나 사소하게 앙갚음하면 그대로 당해주고.
“……졸업하고 4년을 안 봤잖아요. 어릴 때 그런 애가 있었나 보다, 하고 잊어버릴 만도 했는데.”
“그래서 너는 날 잊고 있었어?”
새틴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얼마간은 잊고 있었다가, 결혼을 앞두고 오랜만에 맞닥뜨리니 과거가 새록새록 떠올랐었다.
제 학창 시절의 추억은 빈약한 편이다. 일반 학생들은 파수꾼 가문 출신을 어려워해서 피해 다녔으니 당시 진짜 친구라고 할 만했던 사람은 기요른 하나였다.
단지 루블리에가 주변을 맴돈 까닭에 모두가 오해와 속단을 섞어 루블리에와 엮어댔다. 그래서 의외로 루블리에가 섞인 기억의 비중이 컸다.
어쩌면 기요른과 맞먹을,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랬다. 아카데미의 기억이라고 하면 떠올릴 법한 사람이 기요른과 루블리에 둘뿐이었다.
루블리에의 입장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친구라고는 키리온과 기요른, 그리고 눈에 자꾸 띄었다는 저 한 사람까지 포함해서 고작 셋.
5년이란 기간은 결코 짧지 않은데 그 5년의 기억을 채운 사람이 적으니 그만큼 뚜렷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야. 졸업하고 신성 기사단에 바로 들어갔지. 거기서 매일같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느라고 일상과 격리되어 있었어. 하루하루 구르기 바빠서 뭘 기억할 틈이 없더군. 기사단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지쳐서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 아카데미와는 많이 달랐지. 그러다 겨우 팔라딘으로 서품을 받고 한숨 돌릴 시기가 됐더니, 그즈음 네가 다시 짠하고 나타났어.”
평범한 성기사도 아니고 전대 수장이 미성년의 나이부터 후계자로 지목해 키워낸 재목이다. 훨씬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했을 터였다.
어쩐지 루블리에가 그간 여러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부러 드러내지 않은 게 아니라, 법황과 카 딜론 가의 양해 아래 드러내지 못한 거였다. 팔라딘이라는 급선무가 있어서.
“눈물겹게 반갑던데? 3년, 기억도 추억도 없이 지내다 일 년 정도 숨 돌리고 널 딱 만나니 옛 추억이 막 솟아나더라. 그때의 감정도 생생하게 말이야. 순간 학창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지.”
일부러 말 한마디 더 붙여오던 루블리에가 문득 떠올랐다.
‘기요른은 기요른이고, 나는 카 딜론 경인가?’
‘기요른은 약혼자고, 카 딜론 경은 카 딜론 경이죠.’
‘아카데미에서는 그러지 않았었잖아?’
‘그때는 어렸으니까요.’
그런데 어쩌다 그 남자와 부부가 되어 한 배를 타고 전 약혼자에게 대처하고 있었다. 새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저 말고 다른 여자였으면 이혼한다 어쩐다 귀찮은 분쟁 없이 결혼 생활이 더 편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저와 기요른이 아카데미 졸업 후 가문에 머무르며 각자 하고 싶은 공부와 결혼 준비에 치중하며 지내 온 반면 루블리에는 팔라딘으로 취임하고도 직책에 적응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은 안 됐더라도 시간이 한참 흘러 팔라딘으로서 익숙해졌을 때, 또 집안에서 결혼 독촉을 시작할 때쯤 적당히 잘 맞을 사람을 선택해 결혼했을 수도 있었다.
명문가 출신인 데다 팔라딘인 남자 아닌가. 정말 쉽고, 아주 편안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테다.
“글쎄. 내 주변 사람들이 하나하나 결혼하는 걸 다 지켜보고 나서 몇 년이 더 흘렀을 때, 가족들에게 떠밀려 나 역시 누군가와 결혼을 하게 됐을지도 모르고 안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을 예상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난 이미 너와 결혼했는데. 난 그런 무쓸모한 상상에 힘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아.”
벌어지지 않을 일은 굳이 예측할 까닭이 없다고, 시원하게 정리하는 루블리에의 결론을 새틴은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들었다.
“새틴. 왜 너였냐고? 널 오랫동안 좋아했으니까. 좋아하는 여자와 살아보고 싶어서 결혼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