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112)

<38화>

6.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건국기념일은 어찌 됐든 지나갔다.

딜라일라는 삼십 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자 힘으로 무대를 채워냈다.

프리마 돈나의 수완은 놀라우리만치 완벽했다.

그날 공연을 했던 어떤 극단보다도 딜라일라, 단 한 사람의 노래가 인상적이었다.

초대를 받지 않고 왔는데도 키리온의 체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도 뜻밖의 변수로 작용해서, 법황청이 딜라일라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수런거림마저 돌았다.

불청객이었던 프리마 돈나는 환호와 함께 퇴장했다.

그 뒤, 한 해 한 해 무섭도록 노쇠해지고 있는 법황이 드디어 나타나 키리온과 루블리에의 부축을 받아가며 기념사를 읊었다.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든 파수꾼 가문의 가주들이 칼데브란카의 영원과 법황의 안녕을 기원했다.

하나 정말로 현 법황의 치세가 오래도록 지속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길어야 이삼 년일 것이다. 그 정도로 병색이 느껴졌다.

더불어 새틴에게 따끔히 덴 기요른 측에서 극도로 조심한 까닭에, 그날 두 번 다시 네 사람이 한 공간에 모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로 일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고요한 걸까.

“새틴, 이리와 봐.”

퇴근이 여느 날보다 늦는다 싶더니, 루블리에는 웬 상자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새틴은 루블리에에게 붙들려 자리에 도로 주저앉으며 고민했다.

요즘 자신의 평화를 해치고 있는 주범은 단연코 루블리에였다.

델 마레의 본가에서 지내던 시절은 분명 고요했다.

부모님도, 새틴도 서로가 예상하는 행동 양식의 반경 안에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신혼집에서의 고요함은 전적으로 루블리에에게 달려 있었다.

그가 문득문득 첨벙, 발을 디디면 고요한 줄 알았던 수면은 파동으로 흔들렸다.

새틴은 찻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찻물이 일렁이면서 표면이 이지러졌다. 꼭 닮았다, 이것과. 작은 자극에도 속절없이 티가 난다.

“그게 뭔데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새틴은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겉보기로는 평범한 상자였다.

직사각형의 까맣고 길쭉한 상자.

느낌이 익숙했다. 소재가 다르지만 비슷한 상자를 저도 신혼집에 가져온 바 있었다.

“카 딜론 가의 가보예요?”

신기함보다는 한숨이 앞섰다. 두 집안의 가보가 한 집에 모였다. 새틴의 반응을 본 루블리에가 피식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고, 나도 그 의미였으면 좋겠는데.”

그 의미였으면 좋겠는데……?

새틴이 주춤했다. 루블리에는 상자를 열어 새틴에게로 밀어 보냈다.

“그냥 잠깐 가져온 거야. 보여주고 싶어서.”

새틴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림으로 여러 번 접한 성물이 상자 안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검의 부서진 밑동이 달린 손잡이.

약 이백 년 전 초대 법황인 디오니시오가 직접 손에 쥐고 마귀를 찔렀던 전설의 검 조각이었다.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끔 양각된 문양이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반짝반짝 살아 빛났다.

“잡아봐.”

루블리에가 권유했다. 새틴은 상자에서 손을 떼고 루블리에를 응시했다.

“왜 그래?”

“카 딜론 경은 다짜고짜 드레스를 입으라고 하면 가능하겠어요?”

“무슨 소리야?”

“저는 살면서 무기는 한 번도 안 만져봤다고요. 손에 들어본 나이프라곤 기껏해야 식기용 나이프나 레터 나이프가 전부예요.”

남의 집안 성물에, 심지어 마귀를 제압하는 데 사용된 진검이다. 쥐어보라 한들 선뜻 손에 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잡으면 돼. 스테이크 나이프 잡듯이.”

스테이크 나이프라니. 비교 대상이 너무도 턱없어 새틴은 웃어야 할지 기겁해야 할지 일순 혼동을 일으켰다.

“……싫어요.”

“웬일이지? 의외로 겁을 다 내고.”

“카 딜론 가의 가보잖아요. 아무나 함부로 손대면 안 되죠.”

“네가 왜 아무나야? 내 부인인데.”

“그래도 카 딜론 가의 혈연이 아닌 사람이 가보에 손을 대면 찜찜하지 않아요? 델 마레에서는 성물을 구경하려면 딸인 저조차도 부모님께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불현듯 시간이 무상하게 느껴졌다.

그 성물을 베개 아래 숨겨 베고 자는 지금의 저를 알게 되면 부모님이 기함할 것이다.

“델 마레는 우리와 꽤 가풍이 다르군. 우리는 다들 어렸을 때 이 성물을 들고 휘둘러보면서 자랐어. 초대 법황 성하의 흉내를 내면서 영웅 놀이를 했지. 다섯 가문 중에 카 딜론이 제일 자주 성물을 공개했을걸.”

루블리에는 대수롭잖게 덧붙였다.

“키리온도 옛날에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검을 잡았지.”

“키리온 예하께서요?”

형제들끼리 성물을 휘두르고 놀면서 자랐고, 손님으로 온 키리온도 잡았다면 카 딜론의 성물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의 손이 거쳐 간 셈이다.

그러하다 해도 역시 거리감이 느껴져 새틴은 상자를 덮어 루블리에에게 되돌려주려 했다.

“어?”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 손아귀에 성물이 들어와 있었다. 루블리에가 성물을 꺼내 손잡이를 새틴의 손에 쥐여주고 겉을 제 손으로 덮은 것이다. 남자의 손에 맞춰진 크기인지 검 손잡이는 한 손에 쥐기 빠듯한 두께였다.

“어때?”

“……뜨거워요.”

예상을 벗어난 답변에 루블리에는 미묘하게 미간을 좁혔다.

“손잡이가 뜨거워?”

“아뇨.”

새틴은 말을 정정했다.

“카 딜론 경 손이 뜨거워요.”

“깜짝 놀랐네. 나도 모르는 기현상이 너한테 일어난 줄 알았잖아.”

“저도 놀랐거든요?”

손등이 홧홧할 만큼 체온이 후끈했다. 사람의 온도가 짙어 검의 감촉은 잠시간 잊혔다.

덥고 컸다. 그리고 늘 그렇듯 급작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참 주인과 똑같다. 깜짝깜짝 등장해 사람을 놀래는 게.

인생 어찌 될 줄 모른다지만 돌이켜 봐도 신기했다. 쭉 각자의 자리로 떨어져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불쑥 나타나더니 제 일상을 휘저어놓았다.

루블리에는 새삼스레 새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고개를 기웃했다.

“네 손은 차갑군. 작고 부드러워서 신기해. 크림처럼 무른 느낌이 들어서 손에 힘을 줄 수가 없더라고. 손도 작고 발도 작은데 어떻게 그 몸으로 걷고 뛰고 움직이는 거야?”

새삼스레 발가락까지 오그라들려 했다. 한편으로는 체격이 서로 극과 극이다 보니 강골인 루블리에의 눈에는 신기할 법도 하겠다, 싶었다.

어린 나이에도 또래보다 훨씬 키가 우뚝한 루블리에를 제가 신기해했던 것처럼.

“이게 손에서 힘을 뺀 거라고요?”

항상 손을 꽉 쥐는 느낌을 받았었다. 옴짝달싹 도망갈 구석을 주지 않고 옭아매는 힘을 느꼈었다.

“안 그러면 네가 아플 것 같아서. 얼마만큼의 힘으로 만져도 되는지 모르겠어. 검을 쥘 땐 악력이 부족해서 힘이 분산되거나 검이 흔들리면 안 되니까 꽉 움켜쥐는 습관이 있거든.”

그래서 기념식 행사에서 느닷없이 아프냐고 물어봤었던 거구나. 단순히 놀랐을 뿐이었는데.

“내 손 말고, 검을 쥐어본 소감은 어때?”

“글쎄요.”

마디가 도드라진 루블리에의 손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새틴은 그제야 손안에 들어온 성물의 손잡이를 엄지로 조심조심 쓸어보았다.

“간지러워.”

“네?”

“네가 손을 꼼지락거리니까, 간지러워.”

간지럽다 말하면서도 루블리에는 포갠 손을 놓지 않았다. 새틴이 잡아빼려고 하자 오히려 더 힘을 실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모르겠어요.”

새틴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무얼 느껴야 하는지 전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 검을 쥐고 사는 기사면 또 모를까, 새틴의 입장에서 이건 그냥 거칠고 딱딱하고 낯선 물건일 뿐이었다.

마귀를 벤 검이란 유래를 떠올리면 오싹함이 더해지긴 했으나 루블리에가 겁을 줄 목적으로 성물을 가져올 남자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정답이 뭔데요?”

루블리에가 입을 열었다.

“키리온은 검이 자신을 불렀다고 했어.”

“뭐라고요?”

절로 귀를 의심하게 됐다. 귀하디귀한 성물이기는 하되 본디 검은 무정물이다.

물건이 사람을 불렀다는 소리는 난생처음 들었다. 시적인 은유인가 싶어 새틴은 루블리에를 이리저리 살폈다.

“검이 불러요? 어떻게요?”

“나도 몰라.”

“착각 아니에요? 거짓말이거나.”

“그때 키리온의 표정을 네가 봤다면 거짓말이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을걸.”

지금 루블리에의 표정을 봐도 알겠다. 새틴은 불필요한 반론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어떤 감각인지 나도 몰라. 그래서 무슨 소리야, 하고 말았지. 한데 어느 날엔가 아카데미에서 역사 속 야사를 가르쳐주시던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 몇 대 전엔가, 신탁으로 후계자를 가리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파수꾼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던 성물들을 모아 만져보게 했더니, 누가 정당한 후계자인지 가릴 수 있게 됐다고.”

“그걸 언제 배웠어요? 전 기억 안 나는데요.”

“나도 키리온이 아니었으면 흘려들었을 거야. 하지만 키리온이 성물의 부름을 받았고, 성물이 후계자를 가려냈다는 전설을 들으니 정황상 궤가 딱 들어맞더군. 기념식 행사에서 내가 말했지, 키리온은 예지를 받았다고. 바로 그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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