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12)

<37화>

* * *

“무대가 많이 비어서 볼품이 없어.”

건강이 좋지 않은 법황은 해가 중천에 떠서야 기상했다. 시종에게 준비가 늦어지겠다는 보고를 받은 키리온은 법황의 기념사 전까지 막간을 채워줄 공연 리스트를 점검하다가 루블리에를 돌아보았다.

기존의 계획대로라면 네 번째 축하연으로 무대에 올랐어야 할 극단이 두 번째 차례로 당겨졌다.

키리온이 혀를 찼다.

“내가 계획했던 그림은 이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법황의 기념사가 미뤄지면서 루블리에는 대기에서 벗어나 새틴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는 가장 첫 줄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키리온이 자리했다.

루블리에는 친구에게 위로를 건넸다.

“내년을 기약하지. 올해 해 본 경험으로 내년에는 행사를 완벽하게 치르면 돼.”

“내년은 내년이고, 올해는 결국 이 꼴이 났지 않나.”

마차 사고로 얼룩진 입장부터 난색을 표했던 키리온이다. 초빙된 오케스트라와 극단의 배우들, 법황청의 사용인들은 키리온의 못마땅한 안색을 헤아리며 조심조심 무대를 꾸렸다.

법황청에서 주관하는 기념식에 대고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사람은 아주 드물다. 하지만 엄숙한 행사의 분위기를 젊게 환기시키려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으니 책임자인 키리온으로선 신경에 거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칼데브란카의 온갖 유명한 귀족들을 모아 놓고 선보이는 공연이다 보니 배우들도 긴장했다. 공연장이 법황청이고 초청자가 법황의 아들인 점도 한몫했다.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없었다. 자잘한 실수가 이어졌다.

키리온이 한숨 섞어 촌평했다.

“내년에는 다시 예년의 지루한 기념식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군. 법황청의 중요한 행사를 맡기기에는 배우들의 능력이 영 모자라.”

실망감을 극히 감추지 못하면서 그는 시종을 손짓으로 불렀다.

“성하께서 준비는 다 마치셨나?”

시종이 발을 동동 구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예하. 삼십 분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놈의 수해 때문에 참 되는 일이 없군. 입장부터 사고 수습에, 일부러 공연을 늦게 시작했는데도 배우들이 줄줄이 불참해서 열 편의 공연 중 무사히 무대에 올라간 건 여섯 편밖에 되지 않고. 오케스트라에 지시해서 기념사까지 삼십 분만 더 시간을 채워보라고 해.”

대기하고 있던 법황청의 사용인이 키리온의 지시를 받고 오케스트라에게 걸어갔다. 지휘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사용인이 곤혹스러움을 비추며 보고했다.

“오케스트라 쪽에서도 연주자가 부족해서 준비한 악보를 소화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미 연주한 곡을 다시 연주해도 괜찮을지 여쭙습니다만.”

“그랬다가는 흥미가 떨어지지.”

이래저래 야단이었다. 골치가 아파진 키리온이 이마를 눌렀다. 그러나 딱히 좋은 방법은 없었다. 이미 했던 연주를 반복해서라도 텅 비어버린 간극을 채워야 했다. 하여 사용인을 불러 다시 지시를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삼십 분이면 되나요?”

청청한 음성이 들려왔다.

키리온은 말을 건넨 여자가 누군지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챘다. 딜라일라였다.

“죄송합니다. 예의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심기가 곤란하신 듯해 실례를 범하게 되었어요. 방금 나누시는 말씀을 들었답니다. 공연할 사람이 모자라서 걱정하시던데 삼십 분만 무대를 채우면 되나요?”

키리온은 태연하게 나선 딜라일라와 그런 딜라일라를 뒤따른 기요른을 번갈아 응시했다. 기요른의 난감한 낯을 보니 이건 딜라일라의 단독 행동인 모양이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시오?”

키리온이 되물었다. 행사를 기획하던 당시 초청자 명단에서 빼야 했을 만큼 딜라일라의 입장이 애매하기는 했으나 당장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무대 경험이 많은 딜라일라는 현실적으로 누구보다 도움이 될 사람이었다.

“네.”

딜라일라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 삼십 분을 저에게 맡겨주시겠어요?”

“그대에게 맡기라……?”

“저는 기요른님의 파트너로 이 자리에 왔지만 본업은 가수랍니다. 무대는 제 인생이지요. 가수로서 노래가 부족하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요.”

키리온이 묘한 미소로 대꾸했다.

“가진 재주로 돕겠다는 마음은 고마우나 오케스트라가 악보도 없이 즉석에서 협연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모두가 다 아는 노래를 부를 테니 적당히 음만 맞춰달라고 하면 되어요. 괜찮아요. 제 목소리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음악이니까요.”

지극히 당당한 자신감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스캔들만 없었다면 딜라일라는 모두가 공식 행사에 와 주기 바랄 첫 순위의 가수였다. 갈등은 당연했다. 친구도 중요하지만 행사도 중요했다. 명성 높은 프리마 돈나의 공연은 그 역시 내내 궁금해 했던 것이다. 연이 없다 믿었던 여자의 재능을 직접 보고 들을 기회였다.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었으나 키리온은 일부러 재차 반문했다.

“미리 공연 준비를 해온 극단들도 연달아 실수를 하는 판에 아무 준비 없이 온 프리마 돈나의 즉석 공연이 가능하겠소?”

대주교 앞에서 재능을 증명하게 된 딜라일라의 눈빛이 달라졌다. 배우의 자존심이 살아났다.

“저는 항상, 언제라도 무대에 설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제 능력은 직접 확인해주세요.”

“좋소, 기대하지.”

키리온의 허가가 내려지자 딜라일라가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아무런 예고 없이 이루어진 프리마 돈나의 등장에 관중들이 술렁였다. 호의적인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새틴은 일시적으로 제게 확 몰린 곁눈들을 느끼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게 됐어, 루브, 새틴 부인.”

뒤늦게 키리온이 짤막한 사과를 전했다.

“키리온, 설마 자네 저 프리마 돈나…….”

루블리에의 항의를 새틴은 고개를 가로저어 막았다.

“저희에게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기념식 전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붙잡아 놓을 수단이 있다는 건 중요한 요소니까요.”

명예가 필요하다면 적극 지원했을 것이다. 위엄이 필요하다면 그 역시도 적극 지원했을 것이다. 하나 가수의 무대는 전혀 달랐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딜라일라가 갖지 못했듯, 딜라일라가 가진 재능을 새틴은 갖지 못했다. 이건 딜라일라의 분야였다.

다만 스캔들이 사그라지지 않고 꼬리표처럼 달라붙어 틈만 나면 부활하니 그 점이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이번 건국기념일 행사 때에는 국내의 내로라하는 가수며 배우들이 다 공연을 해 달라고 초청을 받았는데 명단에서 혼자 제외됐다네요.’

기억의 메아리가 퍼뜩 스쳤다. 단순한 행운일까. 아니면 행운을 만든 걸까. 일부러 제외된 행사에 입장한 딜라일라는 마침내 공연까지 성사시켰다.

붉은 드레스 자락을 넓게 펼친 딜라일라가 무릎을 굽히며 관중을 향한 레베랑스를 선보였다. 특유의 선을 가진 움직임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서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제가 오늘 기념식을 위해 노래를 한 곡 선사하고 싶습니다. 칼데브란카의 영원을 위해,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의 영광을 위해.”

인사말이 낭랑하게 퍼져나갔다. 발성이 워낙 또렷해 음절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선곡을 합의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단독으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악기라는 바이올린의 선율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기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얹혔다.

고작 첫 소절 만에 술렁임이 잦아들었다. 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 있던 키리온이 허리를 세우고 앉은 시점도 이 무렵이었다.

딜라일라의 자신만만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프리마 돈나. 무대의 주역.

그 단어는 이 순간 딜라일라를 위해 존재하는 표현이었다.

무대와 무대의 첫 열은 지나치게 가까웠다. 배우와 관객은 일종의 기 싸움을 벌인다.

배우는 관객을 압도해야 하기에, 관객은 배우를 검증해야 하기에. 하여 청중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면 프리마 돈나의 위치에 오를 수 없다.

딜라일라는 청중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부담스러운 인물들도 몇 있었다. 이를테면 새틴이 그러했고, 표정의 변화가 없는 루블리에도 그러했다. 그리고 키리온.

차기 법황인 키리온 또한 위압감을 주는 존재였다.

청중들을 하나하나 쓸어가던 시선이 키리온에게 멎었다. 보통 눈이 마주치면 한쪽이 양보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 승자는 딜라일라였다. 머리카락까지 한 올 한 올 연기를 하고, 손끝까지 살랑살랑 노래를 하는 천생 프리마 돈나의 에너지를 이기는 관객은 거의 없었다. 관객들은 행복하게 순응했다.

하지만 키리온은 딜라일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도리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머물렀다 떠나려던 눈동자가 그 집요함에 붙들렸다.

익히 아는 눈빛이었다. 많은 남자들이 그런 눈빛으로 딜라일라를 바라보곤 했다.

아까와는 깊이가 달랐다.

느낌이 왔다. 이건 꽤 괜찮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딜라일라는 자신감 있게 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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