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12)

<36화>

“기요른의 병문안을 갔다가 봤어. 그날 너도 만났었잖아, 새틴. 기억 안 나?”

아, 떠올랐다.

새틴은 불에 덴 듯 움찔했다. 기요른의 사고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갔던 그날이었다.

꺼림칙한 문병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루블리에와 마주쳤었다.

“기억나요.”

새틴은 얼른 목소리를 새침하게 다잡았다. 돌이켜보면 기요른이 딜라일라를 구한답시고 몸을 던진 그 일이 원흉이었다. 딜라일라는 감사의 의미라면서 새틴과 기요른을 공연에 초대했고, 끝내 사달이 났다.

“그게 끝이에요?”

“내가 그 여자를 또 어디서 만날 일이 있나?”

“……혹시 공연에 초대받지는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아까 은근히 품었던 의문이 있었다. 관중이 생기기만 하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저와 달리 루블리에는 남편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그는 이 낯간지러운 말과 행위들을 어디서 보고 배운 걸까.

“공연? 무슨 공연?”

루블리에가 고개를 기울였다. 공연은 정말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딱히 더 추궁할 수단도 없고 해서 새틴은 대략 얼버무리려 했다.

“됐어요. 그냥 해 본 얘기예요.”

그러나 이번에는 루블리에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뜬금없이 공연 얘기를 하니까 궁금해지는데. 내가 공연을 보러 다녔다고? 세 달씩 장기 출장을 다닐 만큼 바쁜 건 너도 봤지 않아? 말을 해야 알지.”

루블리에가 새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새틴은 숨을 깊이 내쉬었다.

“뭔가…… 능숙해 보이니까. 그렇잖아요. 카 딜론 경이나 저나 결혼은 처음인데요.”

굳이 그 인물을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딜라일라의 존재 없이 결혼식이 무사히 치러졌을 시 기요른과 제 신혼이 어땠을지는 겪어 보지 않아도 선하게 그려졌다.

기요른은 같이 마차에 타고 막힌 길이 뚫릴 때까지 기다릴지언정 한 마리의 말에 새틴을 태우고 진 길을 내달릴 남자는 아니었다.

델 마레의 성물을 가져오면 둘이 마주 앉아 이제 어쩌지, 같이 새빨갛게 질려 머리를 감쌀지언정 너를 바란다는 말로 새틴을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지도 않을 것이다.

“난 또 뭐라고. 그런 거라면 공연 따윈 볼 필요도 없지.”

루블리에가 입가를 비뚜름히 끌어당겼다.

“그만큼 상상했으니까.”

마치 별것도 아닌 걸 궁금해한다는 듯이.

“네?”

“나는 상상할 시간이 아주 많았거든.”

성큼, 큰 보폭으로 다가선 루블리에를 새틴은 화들짝 놀라 올려다보았다.

“궁금해?”

“뭐, 뭘요?”

반사적인 반문이 입에서 튀어 나갔다. 물으면서도 참으로 멍청하고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후회가 몰려왔다.

“내가 뭘 상상했었는지.”

부담스러울 게 분명한 회답은 듣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에 어떠한 반응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지금은 더더욱.

새틴은 침묵을 지켰다.

“어디까지 상상을 했는지 알면 넌 많이 놀랄 텐데. 괜찮겠어?”

머리가 복잡했다. 분명 기요른과 딜라일라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었는데, 어느샌가 그들은 다시 뒷전이 되었다.

루블리에는 불쾌감을 당혹감으로 바꾸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참으로 신비하다면 신비한 능력이다.

“나는 내 상상을 아직 제대로 충족해본 적이 없어.”

저를 상대로 수많은 상상을 했다고 밝히는 남자의 얼굴이 뻔뻔하리만치 당당했다.

도리어 새틴의 낯이 화끈거렸다.

오늘 그의 손이 닿았던 모든 부분의 촉각이 오스스 곤두섰다.

구두를 벗겨주던 손, 그 손이 감싸 쥐었던 발목, 허리를 둘러 안던 팔의 무게감, 입을 맞추던 손바닥의 정중앙……. 어쩐지 몸의 말단으로 갈수록 압각이 짜릿하게 울렸다.

“그래서 내 상상을 현실로 만들 날을 기다리고 있지.”

새틴은 발뒤꿈치를 뒤로 밀었다. 끽. 구두의 굽이 오톨도톨한 바닥을 긁으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걸음이 멈췄다. 새틴은 이미 저를 침범해 들어온 그림자만 곁눈질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느껴졌다. 반응을 요구하는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새틴.”

“……장소를 분간해요, 우리. 여긴 성스러운 법황청이에요.”

새틴은 문처럼 걷고 들어왔던 커튼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그만 나가는 게 좋을 듯했다. 새로운 공기가 필요했다. 가볍고 밝고, 보송보송한 공기가. 단둘만 있는 공간은 심장에 좋지 않았다.

오페라 대극장의 좁은 박스석에 기요른과 있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길게 팔을 뻗은 루블리에가 커튼을 꽉 쥐었다. 도톰한 천 자락이 다시 닫혔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래?”

가장 자신 없는 질문이었다.

기이했다. 델 마레의 딸로 살면서 덜컥 내지르면 내질렀지 자신 없어 본 적이 별로 없는데, 루블리에는 그걸 가능하게 했다.

진심으로 의아했다.

대체 무슨 차이일까. 왜 숨이 막혀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이건 겁이 나는 걸까, 무서운 걸까, 싫은 걸까, 아니면 여태 경험하지 못한 마음이 혼란스러운 걸까.

확실한 건 루블리에에게서 자꾸 낯선 면모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이런 남자였나, 깜짝깜짝 놀라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새틴은 억지로 커튼을 당겨 열었다. 마침 시의적절한 구실이 떠올랐다.

“아까 키리온 예하께서 카 딜론 경을 찾았잖아요. 법황 성하께 카 딜론 경이 필요한 모양인데 늦지 말아야죠.”

근처의 홀에 있던 사람들 여럿이 분리된 공간에서 나오는 루블리에와 새틴을 대놓고 관찰했다. 대화가 뚝 단절됐다. 루블리에가 쓴웃음을 보이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다녀올게. 기다려.”

새틴은 그제야 소리 죽여 안심했다. 하나 제법 괜찮은 핑계를 댄 건지, 루블리에가 이번에도 양보를 한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 * *

키리온과 새틴, 루블리에가 떠난 자리에는 딱히 갈 곳이 없는 비탈리스만 남았다. 그제야 딜라일라는 나부시 절했다.

“비탈리스 대주교 예하셨군요.”

그녀는 매끄럽게 겸양을 챙겼다.

“제가 원래는 이런 자리에 들어올 만한 주제가 아니어서 예하를 알아뵙지 못했어요. 부끄럽습니다. 조금 전에는 제가 실례를 저질렀어요.”

“아니, 아닙니다. 제가 원래 이런 데…… 자, 잘 나오지 않습니다.”

비탈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딜라일라는 부드럽게 해명했다.

“예하께 감히 인사를 받을 수 없었던 점도 양해 부탁드려요. 저는 정식으로 초대를 받지 못했답니다. 기요른님의 은정으로 입장하는 영광을 누렸어요.”

이 순간에는 정부라는 위치가 변명을 가능케 했다.

“그, 그러셨군요. 괘, 괜찮습니다.”

비탈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례를 잘 포장해 넘기긴 했으나 새틴과 기요른의 스캔들을 아는 사람들 특유의 떨떠름한 분위기가 묘하게 감도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파수꾼 가문 사이의 오랜 약혼을 지켜봐 온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뒤바뀐 결과를 두고 복잡미묘한 기색을 보였다. 기요른에게 있어 지나간 삼 개월은 줄곧 변명의 연속이었다.

“비탈리스 예하.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마음은 잘못이 될 수 없다. 몇 번이고 되뇌었던 의지였다. 그럼에도 뒤늦게 스캔들의 주인공들을 접하고 잠시나마 휘둘린 비탈리스의 얼굴이 난처해 보여서 기요른은 일단 사죄했다.

“아, 아닙니다.”

비탈리스가 머리를 거세게 흔들었다.

“제, 제가 요즘 결혼, 아니 이혼 심사를 많이 하는데…… 뜨, 뜻밖의 이유로 이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난데없이 비탈리스의 입에서 이혼 심사가 튀어나왔다. 기요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저와 딜라일라의 앞에서 이혼을 운운하는 비탈리스의 심사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기요른은 우선 화제에 맞춰보았다.

“그러십니까?”

“예……. 이, 이 혼을 해야 할 중대한 사, 사정이 있는 부부도 있고, 대, 대단치 않은 일로도 이혼을 하려는 부, 부부도 있습니다.”

“음……. 이혼하는 부부들이 많군요. 유감입니다.”

“저, 저도 안타깝다고 새, 생각합니다.”

“한때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을 사람들일 테니까요.”

“그렇기도 하고 아, 아니기도 합니다.”

기요른은 머리를 긁적였다. 비탈리스는 대화를 나누기엔 즐겁지 않은 사람이었다.

말을 복잡하게 하는 사람과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둘이 모이니 대화가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둘 중 한쪽이라도 달변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달변은커녕 둘 다 내성적이기로는 피차일반이었다.

원래 기요른은 모든 행사에 새틴과 함께 참여했었다. 그러면 새틴은 얌전한 기요른의 몫까지 대신 소통하며 어울렸다.

“예하. 이혼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달리 있으신가요?”

딜라일라가 참견했다. 기요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새틴은 없지만 딜라일라가 있었다.

“어, 그러니까, 저는, 그게…… 인연, 네, 인연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 하게 됐습니다.”

“아하. 비탈리스 예하께서는 저희 둘이 인연이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나 봐요.”

딜라일라가 사르르 웃으면서 기요른에게 머리를 기댔다. 비탈리스가 머리를 주억였다.

“법으로도 허락하는 이혼이 나, 나쁘진 않겠지만 오래오래 잘 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 어려운 일 같습니다.”

이제야 가닥이 잡혔다. 기요른은 가만히 동조했다.

“예. 그렇군요.”

“그래서 지, 진짜 인연을 만나신 거라면…… 각각 네 분께 마땅히 추, 축하드려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느지막이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웬일로 비탈리스가 말을 한꺼번에 뱉어냈다.

“그리고 시, 신분을 넘어서는 선택은 굉장히 용기 있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예하.”

기요른은 다소 놀랐다.

델 마레를 버리고 프리마 돈나를 선택한 그에게 모두가 어리석다는 비난을 했는데, 처음으로 격려를 들었다.

“그래 봤자 어차피 결혼은…….”

딜라일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결혼. 언뜻 스친 음절을 들은 기요른이 고개를 기울였다.

“딜라일라, 잘 못 들었는데 뭐라고 했나요?”

딜라일라는 고개를 틀어 기요른을 올려다보았다.

“결혼까지 포기하고 저를 선택하시다니, 기요른님께서는 비탈리스 예하의 말씀대로 용기 있으신 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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