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12)

<35화>

기요른은 당황했다.

새틴도 ‘좀 놀랐어’의 뒤에 숨은 의미를 본능적으로 읽어냈다.

홧김에 한 결혼식이면서도 의외로 둘이 잘 살고 있어서 좀 놀랐어.

우정의 결말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고 해도 이십 년 지기 친구로 지낸 경험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속을 읽는다면 루블리에보단 기요른이 단연 쉬웠다.

루블리에가 줄곧 새틴에게 간지러울 만큼 붙어 있던 효과가 나타났다.

새틴의 심란함과는 별개로 루블리에는 내내 그녀를 위한 최선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파행으로 치닫던 결혼식을 수습해 새틴을 그날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 일부터 법황청의 화려한 입성까지.

‘내가 해결해 준다고. 날 믿어.’

그러게. 그는 훌륭한 해결사였다. 그의 말을 따라 손해를 본 건 없었다.

잘 살고 있어 보여서 놀랐어.

그게 오랜만에 맞닥뜨린 전 약혼자의 첫인사라니. 기요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새틴은 실소했다.

“그래? 너는 내가 어떻게 살 줄 알았는데?”

결혼으로 본가에서 독립하니 단점 아닌 단점이 하나 생겼다.

부모님은 참지 않는 새틴에게 종종 감정을 감추고 귀족답게 행동하라는 잔소리를 해왔다.

때문에 부모님 아래서 살 때는 새틴도 나름대로 제 성질을 누르려고 노력했었다. 하나 지금은 새틴을 강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욱성이 울컥 치받는 대로 새틴은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차가운 말투가 여과 없이 튀어 나갔다.

“내가 설마 힘들어하면서 살 줄 알았니?”

정말로 저를 힘들게 했던 사람은 기요른이었다. 그 아찔하던 결혼식이 누구 때문이었는데.

정부를 들여 신혼에도 두 집 살림을 하려던 사람이 누구였는데. 파수꾼 가문의 금지옥엽 외동딸을 제 사랑의 들러리로 세우려던 남자가 전 약혼녀의 신혼 생활에 놀랍다 어쨌다 왈가왈부를 하니 어처구니가 사라졌다.

기요른이 주저하며 변명했다.

“……잘 살아서 다행이라는 의미야.”

“그것참 이상하다. 내가 잘 사는 게 왜 너에게 다행이 되지?”

“걱정했으니까. 너도 나도 하루아침에 큰 변화를 맞았잖아. 바뀐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지 걱정도 되고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고……. 넌 그러지 않았어? 어쨌든 우리, 집안끼리 오래 안 사인데.”

새틴은 짐짓 놀란 기색을 꾸몄다.

“네가 걱정을 해, 날?”

애초 걱정할 거리를 안 만들었어야지. 설사 걱정을 했대도 주제넘고, 실제로 걱정을 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기요른은 새틴과 끊임없이 비교당했을 것이다. 등장은 충격적이었으나 퇴장은 초라했다. 양 집안이 취한 이득과 손실도 천지 차이로 컸다.

오히려 얻은 것이 많은 새틴의 집에서는 일절 기요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예 없었던 남자 취급을 했다. 반면 잃은 것이 많은 셀 위오 가에서는 사사건건 기요른에게 새틴을 언급하며 물고 늘어졌을 테다.

“우습다. 너야말로 날 걱정할 계제가 아니라,”

너나 네 인생을 걱정하지그래.

기막힘과 울화로 차오른 비꼼이 점차 위험한 수위로 진행되기 직전이었다.

새틴과 루블리에, 기요른과 딜라일라.

이미 유명할 대로 유명한 스캔들의 주인공들이 대치하듯 서 있는 것만으로도 쓸데없는 관심을 끄는 판이다.

서로 무시하는 대신 예민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지니 모두들 하던 사교를 멈추고 이쪽만 주시했다.

그 와중에 오케스트라의 연주자 하나가 현악기의 현을 잘못 그었는지 삐이익, 소음이 났다.

“기요른. 내 부인을 네가 걱정할 까닭은 없지.”

새틴의 말허리를 뚝 끊으며 루블리에가 끼어들었다.

“친구로서의 염려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이긴 했지만, 나나 새틴이 누구의 염려가 필요한 사람들은 아니잖아? 그리고 신혼 생활 중인 다른 여자를 걱정하다니,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그런 소리는 금물이지.”

무심코 잘못 던진 속마음을 수습하려다 새틴과 말다툼에 휘말릴 뻔했다.

루블리에의 지적에 기요른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이제야 한숨 쉬어갈 여유를 찾고서 기요른은 딜라일라의 기색을 헤아렸다.

“잠깐만요, 딜라일라. 나는.”

“기요른님.”

딜라일라는 키리온이 ‘희한한 구성’이라고 표현했던 면면을 차례차례 훑었다.

델 마레의 공주님인 새틴은 여전히 까칠하게 날을 세웠고 팔라딘은 그런 부인을 품에 두고 제법 느긋한 자세를 취했다.

대주교 키리온은 이 상황을 흥미롭게 관망하고 있었고 비탈리스는 그저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기요른. 기요른은 꼭 덫에 걸린 토끼 같았다.

새틴에게 휘말렸을 땐 횡설수설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아 옛 정혼녀의 화를 돋우더니 지금은 정신을 차렸는지 안절부절못하며 딜라일라에게 미안한 눈빛을 전해왔다.

딜라일라는 직감했다.

아마 기요른은 평생 동안 새틴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새틴은 생뚱맞은 결혼까지 강행하면서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은 여자였다.

미리 판을 깔아준 남자가 있었다 해도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심지어 기요른의 말에 따르면 새틴은 남편과 친분도 없다 하지 않았던가.

모 아니면 도.

준비할 겨를도 없이 선택을 강요당하는 처지에 몰리면 보통은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다가 굴러들어온 기회를 차 버리거나 나중을 기약했을 텐데, 새틴은 완전히 망가졌던 예식을 그 자리에서 되살렸다.

겉모습만 보고 만만하게 여겨선 안 됐다.

타고난 배짱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 저렇게 화가 날 때마다 솔직하게 싸울 수 있는 것도, 고작 파혼이 인생의 위기가 되는 것도, 더구나 그런 자리에서마저 마침맞게 도와주는 남자가 나타난 것도 다 믿음직한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덕분이다.

새틴의 인생은 딜라일라가 살아온 인생과는 결이 아주 달랐다.

딜라일라는 고급스러운 드레스 자락을 차분하게 매만졌다. 이어 기요른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참 손이 많이 가는 남자였다.

“아까 저에게는 제대로 말씀하셨으면서, 지금은 해명을 잘못하셨어요. 그렇죠? 루블리에님께 놀라셨다는 의미였잖아요.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팔라딘께서는 저번에 뵈었을 땐 과묵하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새틴님께는 한없이 다정하셔서요. 마치 다른 사람인 줄 알았을 정도예요.”

유연하게 꾸며 넘기는 순간 얼굴에 와 닿는 눈길이 다시 느껴졌다. 키리온이었다. 이번에는 찰나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착각이 아니었다.

한결 안심한 느낌으로 기요른이 딜라일라가 맞춰준 핑계에 동의했다.

“맞아요, 그 뜻이었어.”

피차 적당히 물러서야 할 시간이 왔음을 모두가 알았다. 법황청의 연회 홀은 공적인 장소였다.

어지간한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예술가들을 비롯한 별의별 부류의 사람들이 다 모였다.

이 이상 다퉈 봤자 구경거리만 될 뿐이다.

심지어 여기 초청된 극단의 배우들에 의해 조만간 스캔들이 연극으로 올려질지도 모른다.

루블리에가 마무리했다.

“저번에 말했었잖아, 기요른. 부인의 명예가 곧 남편의 명예라고. 그러니 내 명예는 내가 챙겨야지.”

새틴은 루블리에가 꽉 쥐고 있던 제 손등을 입술로 가져가는 모습을 잠자코 쳐다보았다.

여성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면 경배의 의미라 했던가.

그런데 평생 검만 휘두르고 산 남자가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거지?

꼭 대극장에 올라가는 공연에서나 나옴직한 내용 아닌가?

세간의 유행은 요즘 극장가에서 시작되니 말이다.

게다가 딜라일라도 루블리에에게 은근히 아는 척을 해 왔었다.

이 둘은 또 어떻게 아는 거지? 언제, 어디서? 이 남자도 대극장에 드나들었나?

무심중에 경계심이 차올랐다. 그래도 딜라일라와 기요른이 보는 장소에서 내색하지 않을 이성은 있었다.

법황청의 사용인이 달려와 키리온에게 시간을 보고했다.

“법황 성하를 도와 기념사를 준비할 시간이 됐군. 난 먼저 가 보지. 루브, 신성 기사단을 동원해서 질서를 잡아줘. 그리고 조금 이따가 내 쪽으로 와 주면 좋겠어. 신성 기사단의 팔라딘이 옆을 받쳐줘야 그림이 멋지거든.”

“그러지.”

키리온이 먼저 자리를 뜨고 루블리에와 새틴도 이내 그 뒤를 따랐다.

키리온이 지시한 신성 기사단의 통솔은 스캔들의 주인공들이 뿔뿔이 흩어질 구실이었다.

루블리에의 명령이 없어도 기사단은 안팎을 돌아다니며 군중의 소란을 통제할 훈련이 되어 있었다.

사람이 적은 장소를 찾아 빠져나오니 발코니였다. 새틴은 커튼을 내려 타인의 출입을 방비하자마자 루블리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새틴 델 마레가 아니라 새틴 욱 마레라고 불러야겠는데.”

루블리에가 빙글거렸다.

“……딜라일라는 어떻게 알아요?”

그러나 새틴은 웃음으로 넘길 기분이 아니었다. 가는 곳곳마다 딜라일라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리마 돈나의 이름값은 건재했다. 쉬잔 부인의 살롱에서 ‘고위 귀족들에게 밉보였으니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들었어도 그건 단지 새틴을 위한 위로에 불과했다.

어쨌든 살롱의 귀부인들 중에도 딜라일라를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았던가.

더구나 딜라일라는 초대받지 않은 행사에도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나타났고, 새틴의 주변 사람들과 알게 모르게 면식을 쌓았다.

“프리마 돈나?”

대수롭지 않다는 느낌의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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