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비탈리스 대주교 예하. 법황 성하의 검이자 신성 기사단의 수장인 루블리에 카 딜론이 인사드립니다.”
뚜렷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루블리에를 알아본 비탈리스의 낯빛이 환해졌다. 더불어 비탈리스를 둘러싸고 있던 서름한 공기가 중화됐다.
“비탈리스 대주교 예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델 마레의 새틴입니다.”
새틴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손을 내밀고 비탈리스가 그 손등 위에 키스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새틴은 딜라일라를 굳이 의식하려 하진 않았다.
아는 척할 사이도 아니고 인사를 나눌 사이도 아니다.
비탈리스를 무안하게 쳐내던 딜라일라의 눈빛이 언뜻 흔들렸다. 옅은 푸른 눈에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프리마 돈나는 대중에게 내보여도 좋을 감정과 내보여선 안 될 감정을 본능으로 계산하는 직업이다.
그녀는 이내 자연스러움을 되찾았다. 완벽한 갈무리였다.
“여전히 우, 우아하십니다. 새틴 양, 아니, 새, 새틴 부인.”
비탈리스가 멋쩍게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이혼을.”
“결혼입니다. 결혼했습니다.”
루블리에가 재빨리 정정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만 둘이서 옥신각신했던 이혼 이야기가 그새 법황청으로 흘러 들어간 줄 알고 새틴도 지레 당황했다.
아차. 티를 내지 말아야지.
새틴은 얼른 태연한 얼굴을 꾸몄다.
“시, 실례했습니다. 제가 최근까지 이, 이혼 서류를 하나 작성, 아니 심사해서요. 축하드립니다. 결혼.”
이혼 심사라. 권세가 내에서 이혼 분쟁이 있었다면 살롱에서 분명 말이 나왔을 텐데, 새틴은 그런 소문을 들은 바가 없었다.
평범한 이혼 분쟁은 대주교로서 담당할 업무가 맞긴 하나 굳이 법황의 아들이 심사를 하지 않아도 대신할 사람은 충분히 많다.
신탁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키리온이 차기 법황임을 인정받고 있다는 루블리에의 이야기는 적확했다.
형인 키리온이 법황청 주재의 대형 행사를 맡아 치르는 반면 동생인 비탈리스는 변두리의 일만 조금씩 받았다.
“감사합니다.”
하여튼 비슷한 축하 인사를 계속 들어왔더니 내성이 생겼다. 새틴은 다시금 무릎을 굽혔다.
“두 분 나란히 계신 모습 처음, 처음 뵙는데…… 잘 어울리십니다. 그리고 형님께서 경을 많이 뭐냐 그…… 의지, 의지하고 계시는 걸로 압니다. 카 딜론 경. 형님을 자, 잘 도와주십시오.”
더듬거리면서도 결혼 축하 인사부터 키리온에 대한 당부까지, 대주교로서 해야 할 치레는 다 했다.
새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비탈리스가 원체 낯을 가리는 사람이라 대외적인 자리에 잘 등장하지 않아 만난 기억은 몇 번 없다.
그래도 대화가 이어지고 나름대로 맡아서 하는 업무도 있는 걸 보면 말과 행동이 다소간 어눌하다뿐이지 세간의 평판이 실제에 비해 과하게 퍼진 것도 같았다.
“신성 기사단의 팔라딘으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루블리에가 매끄럽게 대답했다.
“비탈리스.”
콴 테온. 얀 실럿. 두 파수꾼 가문의 가주들이 이제야 키리온을 놓아준 모양이었다. 환담을 마친 키리온이 비탈리스에게 서둘러 걸어왔다.
“혀, 형님.”
나란히 서니 형제의 닮지 않은 점이 더 부각됐다. 외모, 성격, 이미지.
심지어 서 있는 자세마저 달랐다. 한 배에서 나온 혈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번 기념식에는 웬일로 나올 마음을 먹었지?”
키리온이 비탈리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게, 어, 음, 그러니까……. 법황청에 찾아온 손님들이시고……. 제가 올해, 아니 작년에는 참석을 모, 못했으니까 올해는 인사를, 인사라도…….”
비탈리스가 웅얼거렸다. 누가 봐도 잘난 형, 당대의 팔라딘으로 임명받은 루블리에, 그리고 그 팔라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가 출신의 새틴 앞에서 주눅이 든 티가 여실했다.
세 사람 모두가 비탈리스를 부드럽게 대하는데도 천성이 소심한 남자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잘 생각했다. 비탈리스.”
형의 칭찬에 비탈리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대주교의 소임이 있는 만큼 맡아 보살펴야 할 사람들도 상당하겠지만, 너는 평범한 대주교가 아니지. 아들로서, 동생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했으면 좋겠다. 오늘처럼 행사에 참석해 얼굴을 비추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의 훌륭한 소통 방식이야.”
“유, 유념하겠습니다…….”
형제의 대화가 잦아들었다. 어리숙한 동생을 염려해서 부랴부랴 달려왔다가, 별다른 의도 없이 인사하러 나왔다니 한결 안심한 모양새로 보였다.
따지고 보면 오늘은 큰 실수나 문제를 일으킬 만한 날도 아니었다.
기념식의 사교 모임에서 오가는 화제라고 해 보았자 신변잡기에 가까운 내용이 대부분이다.
비탈리스를 옆에 끼고 다니면서 일일이 챙기기에는 도리어 키리온이 한눈에도 바빴다.
“딜라일라?”
이때였다. 마침맞게 기요른이 돌아왔다. 사람보다는 딜라일라를 찾는 목소리가 먼저 도달했다.
이렇게 잔뜩 모인 사람들 틈에서 목적하는 사람을 찾으려면 입고 있던 옷으로 분간하는 방법이 편한 까닭이었다.
맨드라미처럼 밑단이 굽슬굽슬 퍼진 붉은 드레스를 입은 사람은 딜라일라 하나뿐이다.
딜라일라를 위시한 주변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기요른에게로 날아갔다.
기요른은 당황했다.
딜라일라는 혼자 있지 않았다. 누군가 딜라일라의 말벗이 되고 있었던 건가, 해서 면면을 둘러보던 기요른이 흠칫 얼었다.
두 블론드의 남자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 탓이었다.
가장 쉽게 눈에 띈 남자는 아무래도 루블리에였다. 이건 원래 그래왔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단지 루블리에가 있다면 응당 따라와 있을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에 기요른은 긴장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기요른과 시선을 교환하게 된 새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로는 마찬가지였다.
예상을 넘어선 최악의 방식으로 헤어진 전 약혼자다.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왔어도 기분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루블리에는 말했었다. 둘이 같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사랑하는 부부의 모습을 과시하면 된다고.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평탄하고 매끄럽게 흘러가던 새틴의 인생에 처음으로 돌을 떨어뜨리고 파문을 일으킨 사람이 기요른이었다.
이십여 년의 우정으로 점철된 잔잔하던 관계에 배신과 분노, 실망과 충격 따위의 거친 파고가 끼어들었다.
기요른은 꼭 접시에 남은 실금 같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제대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래서 어떤 날은 문득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은 유독 선명하게 보여 심기에 거슬리는 그런 실금 말이다.
접시를 깨뜨릴 정도는 아니라도 지워지지도 않는, 지우려고 했다가는 자칫 접시가 깨질지도 몰라서 아예 손을 대지 못하게 되는 실금을 닮았다.
새틴은 무심결에 뒷걸음질을 쳤다.
한 걸음, 두 걸음. 뒤꿈치로 잘박잘박 바닥을 딛다가 별안간 벽과 턱 부딪혔다. 벽이 새틴의 어깨를 쥐었다. 옆으로 돌려세워, 등을 받쳐주었다.
“새틴. 역시 다음번에는 낮은 구두를 신자. 높은 구두는 자꾸 휘청거리게 되잖아.”
“……그러게요.”
새틴은 웃음기 없이 대답했다.
“이제 높은 구두는 신지 말아야겠어요.”
기요른도 선뜻 가까이 거리를 좁혀오지는 못했다. 대신 딜라일라가 움직였다. 어쩌다 보니 키리온과 비탈리스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뉜 모양새가 되었다.
새틴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엉성하게 말아쥔 손안이 허전했다. 불현듯 딜라일라의 화려한 손동작이 떠올랐다.
타고난 배우는 손끝 하나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대를 집중하게 하는 여자였다.
더럭 초조해졌다. 새틴은 두 팔을 내려뜨렸다가, 맞잡았다가, 다시 뒤로 감추려다 포기했다.
부자연스럽게 보이기 싫었다. 연약해 보이기도, 방어적으로 보이기도 싫었다. 그러다 보니 손 둘 데가 없었다.
불쑥 루블리에의 팔이 등 뒤에서 뻗어 나왔다. 팔뚝을 지나 손목까지 넝쿨처럼 감쌌다. 손등을 넓게 감싸 쥐고 손가락을 사이사이 얽었다.
“아파?”
귓전에 대고 건넨 첫 속삭임이 의외였다. 악력이 느껴지기는 했다. 그래도 못 참을 만큼은 아니다. 새틴은 공기처럼 투명하게 대답했다.
“아뇨.”
오히려 지금은 단단하게 쥐어오는 힘이 반가웠다. 짧게 망설이다 똑같이 손을 맞잡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와 저의 체온이 겹쳐졌다. 고개를 틀자 루블리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됐다.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었나 보다. 손 둘 곳이, 기댈 곳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옛 정혼자와 현재 남편, 정혼자의 정부까지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들이 하필이면 이곳에 다 모였다.
키리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희한한 구성이군.”
루블리에가 비싯, 입매를 당겼다.
비탈리스는 그제야 딜라일라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눈치였다.
형과 달리 중심에서 밀려난 명목상의 대주교라 할지라도 칼데브란카의 온갖 살롱을, 거리를, 심지어 법황청까지 뒤흔든 두 번의 스캔들을 모르려야 모를 리가 없었다.
쥐와 새들에게도 입과 귀가 있다면 떠들어댔을 유명한 결혼식이었다.
“오랜만인데. 기요른. 잘 지냈나?”
루블리에가 자못 태연스레 화두를 열었다.
“……어어. 그럭저럭.”
기요른이 엄벙덤벙 대답했다.
“그럭저럭이라니, 대답이 좀 아쉽군.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기 아닌가? 우리는 아주 잘 지내고 있거든.”
“잘 지냈어.”
기요른이 답을 정정했다. 누가 봐도 거짓말이 얼마간 섞여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희멀겋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떴고 뺨도 말랐다.
새틴도 부모님으로부터 후계자에 대한 부담을 듣고 있지만, 기요른에게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압박이 가해지고 있을 터였다.
얼굴에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딜라일라를 보호하고 있는 걸 보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대책이 없다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새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기요른이 루블리에에게서 방향을 틀어 새틴을 바라보았다. 갈색의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피차 거북한 흐름이다. 새틴은 이대로 각자 무관심한 척 찢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기요른이 불쑥 입술을 뗐다.
“……좀 놀랐어.”
속내가 얼떨결에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무례한 말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