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12)

<33화>

새틴에게는 귀족들이 줄을 서서 경외를 표하는데 저에게는 이런 남자가 붙는다면 우스갯거리만 될 것이다.

“제가 혼자 있어서 상대를 해 주시고 싶으셨다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딜라일라는 쌀쌀맞게 거절했다.

“일행이 있으니까요.”

“……아 저, 저는 다른 의도는 없고, 다만 처, 처음 뵙는 분이라…….”

이 사람 대체 누구지?

딜라일라는 남자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하나 차림새만 가지고는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예술가인가?

작년까지만 해도 법황청 내에서 열리는 건국기념일에는 귀족들만 참석했다고 들었다.

법황이 주관하는 행사는 규모가 작은 대신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고 했으나 올해는 달랐다.

키리온은 전통의 반전을 꾀했다. 행사의 규모를 키우고 귀족 외의 손님들을 초청했다. 법황청에 작품을 진상한 화가, 조각가, 음악가들이 그들이었다.

무대를 세우고 공연을 올릴 극단과 악단도 섭외되었다. 만약 딜라일라가 오늘의 기념식에 예술가로 초대받았다면 대극장의 프리마 돈나로서 무대에 올랐을 것이다.

현재 연회 홀의 분위기는 귀족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귀족들과 평민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홀로 작업하는 일이 많은 예술가들은 자기들끼리도 어울리지 못하고 변두리를 떠돌았다.

그나마 오케스트라나 극단처럼 어느 하나의 무리로 소속된 이들만이 귀족들의 사교에 거슬리지 않게끔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눈치였다.

입지 부족한 예술가가 끼어들 데 없어 동떨어져 있다가 혼자 있는 여자를 점찍어 수작을 건 거라면, 그 속은 보통 빤하지.

“됐어요.”

“예, 예?”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찾으신 것 같네요.”

딜라일라는 짜증스럽게 남자를 피했다. 돌아오지 않는 기요른을 찾아 아예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

“비탈리스 대주교 예하. 법황 성하의 검이자 신성 기사단의 수장인 루블리에 카 딜론이 인사드립니다.”

어느새 다가온 인사말이 번뜩 귀에 뜨였다. 팔라딘이었다. 그와 한 쌍인 새틴도 드레스 자락을 쥐고서 나부시 무릎을 구부렸다.

“비탈리스 대주교 예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델 마레의 새틴입니다.”

누구라고? 대주교?

꿈에서도 상상 못 할 정체였다. 남자는 대주교의 상징인 수단을 입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대주교들 특유의 경건함과 품위도 없었다.

그런데 대주교였다니.

비탈리스. 이름이 기이하게 낯익어 기억을 더듬던 딜라일라가 하얗게 질렸다. 이 남자가 비탈리스 대주교. 차기 법황으로 점쳐지는 키리온의 아우였다.

비탈리스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새틴이었다. 루블리에의 뒤편을 지나가는 실루엣에 새틴이 재빨리 화제를 변경했다.

“비탈리스 예하께서 오셨어요. 그런데 왜 저 프리마 돈나한테 가시는 거죠?”

새틴의 지목에 루블리에도 금방 그를 알아보았다.

“글쎄. 이런 자리에 잘 참석하시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오늘은 웬일이지?”

비탈리스가 워낙 사람이 많은 자리를 회피해온 까닭에 법황청에 드나들 만큼 신분이 높은 이가 아니면 얼굴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그 키리온과 형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둘은 안 닮았다. 외모도 성격도 완전히 딴판이었다.

새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그간 공식 석상에 거의 나오지 않으셨으니 오늘은 나오셔야죠. 대외적으로 활동이 많은 키리온 예하에 비하면 비탈리스 예하께서는 후계자로서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으셨잖아요?”

그야말로 천진난만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법황청에 드나들었던 루블리에는 고위 성직자들 사이에 만연하게 퍼져 있는 동의에 익숙했다.

다음 법황은 키리온이 될 것이다. 비탈리스도 아무 불만 없이 스스로 몸을 사렸다. 그 자신조차 형이 아버지의 자리를 이을 거라는 기대를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일부러 모습을 안 비추신 거지. 후계자가 키리온으로 거의 결정되어 있는데 괜히 사람들에게 혼동을 주어 좋을 게 없으니까.”

새틴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루블리에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법황 성하께서 아직 건재…….”

건재하지는 않았다. 법황의 노환은 국가의 염려였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아프다는 표현을 쓸 수도 없었다. 자칫하면 불경으로 보일 터였다. 새틴은 위험한 발언을 건너뛰었다.

“……하여튼 후계자에 대한 신탁은 내려오지 않았는데요.”

“다음 대의 법황은 키리온이야. 다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잖아. 새틴, 몰랐어?”

“몰랐던 게 아니라, 신탁이 확실하게 내려오지 않은 이상 후계자가 정해졌다고 속단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두 분께 기회는 동등하게 있어요.”

새틴이 재차 반박했다. 루블리에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기록을 남기진 않았지만 키리온은 이미 예지를 받은 바가 있어.”

“예지요? 신탁 말고 다른 게 있어요? 그게 뭔데요?”

“지금 이야기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주제니까 나중에 우리끼리 있을 때 의논하기로 하자. 어쨌든 키리온이 법황 성하의 임무를 대리하고 있는 이유가 그래.”

이유를 듣지 못한 마당에 완전히 납득하기에는 설득력이 좀 부족했다. 그래도 신성 기사단으로서 누구보다 법황청과 친숙한 루블리에가 이렇게까지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더불어 후계의 위는 굳이 지금 논쟁할 거리가 아니기도 했다. 엄연히 법황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차기 후계자에 대해 논한다는 건 현 법황에 대한 결례였다.

“그래요, 우선은 제가 모르는 사정이 있다고 칠게요.”

새틴은 한발 물러섰다. 대립을 무르고, 대신 비탈리스를 쳐다보았다.

난감했다.

어찌 됐든 키리온의 동생인데도 귀족들의 반응이 키리온을 대면할 적과 사뭇 달랐다.

저 속마음들을 대충 짐작은 가능했다. 이미 요직에서 밀려났다시피 한 동생이고, 형에 견줄 것도 없이 평범한 사람에 비하여도 덜됐다는 평판 또한 유명하니 섣불리 다가가고 싶지 않은 거겠지.

키리온도 콴 테온과 얀 실럿, 두 파수꾼 가문의 가주들을 상대하느라 여력이 없어 보였다.

델 마레와 셀 위오처럼 혼사로 묶어 놓을 만한 자식도 없었고 카 딜론처럼 재능으로 키리온을 사로잡은 자식도 없으니, 다섯 가문 중 가장 위기감을 느꼈을 두 가문은 모처럼 키리온과 환담을 나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심지어 비탈리스는 기요른의 정부로 기념식에 참석한 딜라일라와 함께 있었다.

알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최악의 선택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모이려야 모일 턱이 없었다.

새틴도 마찬가지였다. 비탈리스에 대한 사감은 딱히 없으나 이 장소에서 딜라일라를 제일 거북해할 사람이 저일 것이다.

나중을 기약하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딜라일라의 어투가 쨍하게 울렸다.

“됐어요.”

“예, 예?”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찾으신 것 같네요.”

물이 담긴 잔의 테두리를 손톱으로 퉁 쳐올린 듯한 멍멍함이 귓전을 맴돌았다. 확연한 불호가 실려 있었다.

저 여자는 대체 어떤 여자일까.

의뭉스러웠다. 새틴은 주의 깊게 딜라일라를 관찰했다.

자신이 본 딜라일라의 첫인상은, 남의 기분을 잘 맞추는 여자였다. 한편 기요른은 불쌍한 여자라고 했다.

새틴의 부모님은 주제를 아는 여자라고 했다. 반면 에클레 부인은 만만치 않다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지금은 또 냉랭했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면모가 있으니 도리어 헷갈렸다.

“마치 대극장에 들어온 잡상인을 대하는 것 같군.”

루블리에가 촌평했다. 새틴은 한숨을 쉬었다.

“그럴 수밖에요. 비탈리스 예하의 체면을 무시하고 있는 건 모두가 똑같잖아요. 귀족들은 고사하고 심지어 저 예술가들마저도 누구 하나 예의를 차리는 사람이 없었는데요.”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했다. 비탈리스를 모르는 사람들은 루블리에의 촌평처럼 잡상인을 대하듯 그를 경시했고, 아는 사람들은 누군가 먼저 나서기 전까진 부러 외면하려는 기색이었다.

새틴은 근처를 휘둘러보았다. 차라리 기요른이 빨리 돌아와서 비탈리스에게 인사치레라도 차려줬으면 싶은데, 기요른은 어디 있는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도리어 기요른의 내성적인 성격을 되짚으니 한숨만 나왔다.

다수의 사람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비탈리스를 어찌 여겨왔는지 안다.

심지어 비탈리스 자신도 본인을 법황청에 필요 없는 인물이라 인정하고 웅크려 있었다.

그래도 되는 걸까. 차기 법황이 키리온으로 점쳐진다 할지라도 아직 확정된 바가 없는데 형제지간에 너무 큰 차등을 두는 건 아닐까.

파수꾼 가문은 나라를, 법황을, 정의를 지키라고 명 받은 가문이다. 그런 파수꾼 가문마저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소외를 방관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기요른이 돌아오기 전에 예하께 인사드리고 올게요.”

새틴은 양심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 루블리에도 끄덕였다.

“함께 가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비탈리스는 법황의 둘째 아들이자 친구의 동생이다. 프리마 돈나에게 무시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는데 신성 기사단으로서도 기분 좋을 리 없었다.

루블리에가 팔을 내밀었다. 새틴은 저를 에스코트하려는 루블리에의 팔뚝 위에 손을 엉거주춤 얹었다.

루블리에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러니까 꼭 아카데미의 어설픈 댄스 파트너 같잖아.”

가까이 좀 다가오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작 새틴은 그를 파트너로 만나 마구잡이로 발을 밟아댔던 과거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이 심란한 와중에도 풉, 웃음이 날 뻔했다.

“오늘도 구두 굽이 높아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당연히 농담이었다.

“깜빡 잊고 있었군. 내 부인이 높은 구두만 신으면 휘청거리는 사람이란 걸.”

그런데 루블리에가 농담을 구실로 받았다. 새틴을 확 끌어당겨 허리를 감싸 안은 루블리에가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새틴은 제 몸을 한 바퀴 두른 남자의 팔심에 움찔 놀랐다. 손과는 또 달랐다.

허리는 타인이 함부로 더듬지 않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어설프게 굴기도 난처했다. 결국 조그맣게 항의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안 휘청거려요!”

“설마. 나중에 신발을 벗어 봤더니 발등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던데.”

멍이 들었었다고?

전혀 아프지 않다는 듯이 하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눈치를 못 챘었다. 새틴은 앗, 소리도 내지 못하고 이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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