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 *
“새틴님이 신경 쓰이세요?”
가느다란 팔이 뒤에서 허리를 나긋하게 감싸왔다.
새틴을 바라보고 있다가 기요른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렸다. 딜라일라였다.
“아니요.”
다급히 부정했지만 딜라일라는 새침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인가요? 시선을 못 떼고 계시던걸요.”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절대로 그런 의미는 아니고, 단지 둘이 언제 저렇게까지 친해졌나…… 의아해서요. 제가 기억하는 한 새틴, 아, 그녀는 루브를 싫어했거든요.”
새초롬히 가늘어지던 눈초리, 뾰조록하게 돋던 입술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그랬던 새틴이 오늘은 손에 루블리에의 키스를 받으며 바짝 붙어 연신 무언가를 소곤거리기 바빴다.
“새틴님이 그러셨어요?”
딜라일라는 사뭇 놀랍다는 듯 물었다.
“어린 시절의 루브에게는 좀 짓궂은 면이 있었거든요. 그녀는 예민한 사람이니 싫어할 만도 했죠. 데면데면한 관계였어요. 그랬는데 정신없는 속도로 그날 모든 상황이 뒤바뀌더니 어느새 저렇게……. 뭐 이미 끝난 사람에 대해 별로 할 말은 없지만요. 그나저나 피곤하지 않아요? 예상하긴 했어도 제 처지가 별로 좋진 않군요.”
기요른은 씁쓸하게 웃었다.
키리온은 루블리에와 친근하게 인사하고 새틴의 손등에는 존중의 인사를 남겼다.
그러나 기요른에게는 멀리서 적당히 아는 척만 했을 뿐이다.
키리온이야 덮어 놓고 루블리에와 절친한 사람이니 애당초 아무것도 기대한 바 없었지만, 기실 귀족들 대부분이 비슷한 행동을 취했다. 어렵고 난처하고 조심스러운 미소뿐이었다.
사람들은 교활하다.
지금 기요른에게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 대다수는 아주 가끔 이 비슷한 공식 석상에서 마주쳤을 때 친절하게 웃고 상냥하게 굴던 이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새틴과의 결혼이 무산된 이후로 태도를 싹 바꿨다.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새틴과 루블리에를 선택한 것이다.
안전하게 멀어지면서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을 이쪽에서도 적당히 대하는 일은 쉽지 않다. 기요른은 새삼스레 절감했다.
예전에는 새틴이 있어 겪지 않았던 곤란이었다.
하나 오늘은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 도리어 저만 믿고 온 딜라일라를 보호하며 이 자리에서 버텨야만 했다.
연인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다. 기요른은 억지로 용기를 쥐어짰다.
“괜찮아요. 기요른님께서 여기 계시는걸요. 저는 기요른님 곁에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리고 제가 함께 있어야지, 어디에 있겠어요.”
딜라일라는 태연하게 기요른의 뺨을 감쌌다. 기요른이 확연하게 안심한 내색을 보였다. 그런 기요른을 가볍게 안아 다독이면서 딜라일라는 다소 식은 눈으로 연회 홀 내의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아는 얼굴들이 제법 되었다. 저 중에는 몇 번씩이나 딜라일라의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유명한 배우를 정부로 두고 싶은 남자는 후원자라는 명목 아래 머무른다. 딜라일라의 예전 후원자가 바로 그런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수중에 발굴해 낸 배우들을 여럿 데리고 있다가 새 후원자에게 소개하면서 큰돈을 받아 챙겼던.
딜라일라는 기요른의 뒷머리에 손가락을 찔러넣으며 눈빛이 도드라지지 않게끔 신경 썼다. 전 후원자는 딜라일라의 몸값을 무시무시하게 올려놓았었다.
그녀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명목이었으나, 기실은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프리마 돈나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속셈이 컸다.
뭐, 그 남자를 더 떠올릴 까닭은 없다. 어쨌든 벗어났으니까.
후원자와의 물밑싸움에서 딜라일라는 승리했다.
물론 후원자가 부른 엉터리 같은 금액을 알기 전에, 딜라일라에게 후원을 하고 싶다고 밝힌 남자들도 많았다.
이 자리에도 두셋 있을 정도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성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대극장을 꾸준히 들락거리며 어떻게든 딜라일라와 관계를 만들려 애를 썼다.
하지만 막상 이날에 이르자 그들은 태세를 바꿨다. 서로 짜기라도 한 양 딜라일라를 모르는 체했다.
한결같이 난감하게 웃는 얼굴로 엄벙덤벙 인사치레만 한 뒤 도망쳤다.
기요른만 한 부와 명예를 가진 남자도 아니었지만, 일단 파수꾼 가문끼리의 갈등에 엮이지 않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어설픈 배우들이 여기 가득했다.
하지만 저 팔라딘은 연기하는 모습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었는데 말이다.
그는 등장부터 신분을 과시하는 대신 부인을 끌어안고 나타났고, 내내 부인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둘이 보여주는 예상 밖의 친밀감과 소탈함에 기요른도 아까부터 줄곧 흘끔거리며 관심을 거두지 못했다.
딜라일라는 기요른의 병문안을 왔던 루블리에를 떠올렸다. 학문을 업으로 삼은 남자와 무예를 업으로 삼은 남자는 기질이 확연히 달랐다.
마르고 희멀건 기요른은 루블리에에 비하면 어딘지 덜 자란 미성년 같았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성큼성큼 들어오던 남자는 그 걸음걸이만으로도 공간을 꽉 채웠다.
동작이 크고 간결했다. 체격이 큰데 둔한 느낌은 전혀 없고 도리어 날렵했다.
기사나 왕자의 역할을 하는 남자 배우들을 여럿 파트너로 만나 보았지만, 그 분야를 흉내 내는 배우와 실제 검을 다루는 기사는 풍기는 분위기가 천양지차로 달랐다.
연극을 위해 몸을 만들고 검을 익힌 배우를 데려다 놓는다 해도 루블리에와 견주면 늑대 앞의 강아지로 보일 것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신성 기사단의 수장에게는 그런 야생적인 이미지가 감돌았다.
루블리에 카 딜론. 카 딜론 출신이니 정작 누구보다도 훌륭한 귀족 가문에서 온갖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일 텐데, 엇비슷한 환경에 있었을 기요른이나 새틴과 사뭇 다른 느낌이어서 딜라일라는 흥미를 느꼈다.
아니다.
딜라일라는 생각을 정정했다.
그냥 길에서 스쳐 지나가더라도 흥미를 느꼈을 남자였다.
단순하게 잘생겼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굉장히 잘생긴 남자임은 분명했지만, 하루 내 연달아 본 파수꾼 가문 사람들은 대체로 인물이 좋았다.
기요른도 제법 준수한 편이었고, 잠시 들렀다 돌아간 새틴 또한 자신이 연기하던 공주님이 실재한다면 이런 사람이겠구나 싶은 여자였다.
무엇보다도 무대에 서는 기준 중 하나가 외모였다. 잘생긴 남자는 극장에도 넘치도록 많았다. 하지만 잘생기고 예쁘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는 단기간은 통할지언정 오래 살아남을 순 없었다.
프리마 돈나라는 극장 내 상징적인 자리에 있다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오랫동안 깊은 인상을 남기는지 경험으로 터득하게 된다.
첫째, 외모 이상의 것을 갖춘 사람.
둘째, 넘치는 부분에 비해 부족한 부분이 없는 사람.
셋째, 상상하게 하는 사람.
루블리에는 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남자였다.
일순 가슴께가 일렁였다. 이 남자와 보내는 밤이 어떨지 궁금해서. 여러모로 상상하게끔 하는 얼굴을 가진 남자여서.
손이 크고 저음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울리는 남자라서.
순진무구한 도련님 스타일의 기요른보다는 역시 이쪽이 취향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딜라일라를 본체만체했다.
건넨 인사도 거만한 턱짓 하나로 끊었다. 이런 무시는 오랜만이었다. 적어도 수도에 올라와 프리마 돈나로서 자리를 잡고 이름을 떨친 후로는 처음이었다.
귀족들도 앞에서는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들지언정 제 무대를 보고 난 뒤에는 몰래 대기실로 찾아와 한눈에 반했다는 사랑 타령을 했다.
한데 남자는 잠깐 있다가 사라진 델 마레 가의 적장녀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심지어 세상 물정 모르는 기요른마저도 약혼녀를 피해 조심조심 눈길을 던지는 판에 말이다. 딜라일라는 멈칫, 굳었던 얼굴을 풀고 일부러 더 미소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틴은 약혼자를 잃었다.
“기요른님. 저희처럼 꼭 사랑하는 사람들만 키스를 하고 몸을 섞는 건 아니랍니다.”
하여간 저 둘의 사이가 수상하다 이거지.
직업은 배우였고 연기는 본능이다. 기요른의 의심을 듣고 다시 보았더니 새틴이 좀 부자연스러운 듯도 했다.
게다가 팔라딘도 밖에서든 안에서든 유독 부인의 얼굴을 관중에서 가리려 드는 게 수상쩍었다. 여자의 표정만큼 극적이고 풍부한 표현법이 드문데도.
이윽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입장했다. 손님의 면면을 살펴보던 기요른이 난감한 기색으로 딜라일라를 의식했다.
“부모님께서 도착하셨군요. 인사는 드려야 하겠죠. 다녀올게요. 당신 그동안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요?”
“그럼요. 다녀오세요.”
기요른의 부모님은 여전히 딜라일라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피차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기요른은 양측을 가능한 한 분리하는 방식으로 딜라일라를 보호하려 들었다.
딜라일라는 무거운 걸음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기요른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하고서 등을 틀었다.
‘가수가 암만 노래를 잘 부르고 외모가 뛰어나다 해도 셀 위오 가의 안주인 자리에 가당키나 해?’
현실이었다.
평민 출신인 프리마 돈나가 아무리 남의 눈에 들게끔 노력해 봤자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기껏해야 정부였다. 타고나기를 귀족으로 타고난 여자와는 출발선부터가 달랐다.
대극장을 벗어난 후로 더더욱 격차가 느껴졌다. 새틴에게는 줄을 서서 인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딜라일라에게는 관심 한끝 두지 않았다.
새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나마 기요른이 있을 땐 기요른을 봐서라도 다가왔으나 혼자 남으니 소외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뭐, 이럴 걸 아예 모르고 오진 않았다.
딜라일라는 요요하게 연회홀을 둘러보다가 멀리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금발의 남자는 초면이었으나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키리온 대주교.
눈길이 부딪힌 시간은 아주 찰나였다. 남자의 주변에 파수꾼 가문을 포함한 귀족들이 잔뜩 포진한 까닭이다. 사람이 계속해서 몰리는 탓에 이내 시야가 완전히 차단됐다.
딜라일라는 추측했다.
호스트로서 연회장을 살펴보고 있는 거겠지.
점차 목이 말라왔다. 관심을 일단 거두고서 딜라일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쟁반 가득 여러 종류의 음료를 든 사용인이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여기,”
불러서 음료수를 부탁하려던 딜라일라의 시도는 가로막혔다. 느닷없이 나타난 어떤 남자 때문이었다.
여러 톤의 갈색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섞인 금발의 남자였다. 키는 땅딸막한데 몸집이 비대해서 옷의 주름이 불편하게 접혀 있었다.
둔탁하고 뭉툭한 인상이었다. 더불어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극장에서도 본 적 없는 남자였다.
엉거주춤 선 남자가 쭈뼛쭈뼛 말을 붙여왔다.
“저, 호, 혼자 계신 것 같아서…… 제가 아가씨께, 그게, 그러니…… 이, 인사를 드, 드려도 될까요?”
기이하게 꼬인 말을 제대로 해석해서 알아듣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딜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제게요?”
“예.”
남자의 눈이 딜라일라의 손을 스쳐 갔다.
저 남자의 두툼한 손이 제 손을 소중하게 감싸 잡고 저 푸르죽죽한 입술이 손등에 입 맞춘다는 상상을 하자마자 딜라일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절로 손을 숨기게 됐다. 차라리 아무도 안 오는 게 낫지, 어디서 이런 반편이 같은 남자가 관심을 보이는 건지 기가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