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12)

<31화>

새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기요른은 불가항력으로 마주치게 될 거라 이미 억지로나마 각오를 한 사람이다.

하지만 딜라일라는 아니었다. 예상 밖의 인물에 껄끄러움이 몰려왔다.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저 여자를 데려와? 정말 미쳤어. 무슨 자신감이지?

기가 막혔다. 직접 묻고 싶을 정도였다.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눈길이 이끌렸다. 붉은 드레스를 갖춰 입은 딜라일라는 외양만으로는 기요른보다 더 이 자리에 어울렸다.

얼굴과 몸이 재산인 배우는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애티튜드를 본능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더불어 새틴은 고작 삼 개월 사이 안색이 초췌해진 기요른 때문에도 은근히 놀랐다.

알아서 잘 먹고 잘살겠거니, 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다.

그 성격에 막 나가며 버티기도 괴롭고, 그렇다고 해서 딜라일라를 내보낼 수도 없을 테니 마음고생이 크기는 컸겠지.

친구를 대하는 키리온의 너스레가 귓가를 빙빙 맴돌았다.

“어쨌든 오케스트라의 음이 좀 비어도 봐줘. 날이 궂어 수해를 입었다고 수배했던 연주자들 중 일부가 오지 못했거든. 극단과 가수들도 컨디션이 엉망이더군. 기념식이 무사히 끝나기는 할까 걱정이야. 하긴 자네 같은 귀족들도 입구에서 한바탕 사고를 치르고 입장했는데 저들이야말로 어련하겠나.”

느지막이 손님들이 입장하면서 홀이 채워졌다.

다른 귀족들에게 인사를 하러 키리온이 자리를 뜬 후에, 새틴은 루블리에의 팔을 두드려 신호를 보냈다.

“루……, 카 딜론 경.”

“응.”

“그 여자가 저기 있어요. 봤어요?”

“봤어. 기요른이 데려왔던데.”

루블리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부모님께서도 오실 자리에 무슨 경거망동인지 모르겠어요.”

조만간 델 마레와 셀 위오의 가주들이 도착할 것이다. 각자 어울리는 연령대가 다르고 친분도 다르니 같은 연회장 안에 있더라도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드물겠지만, 그래도 다들 지켜보고 있을 터다.

법황과 키리온이 주최한 건국기념 행사 자리라 양가의 부모님들이 대놓고 싫은 티를 못 낼 거라 판단해서 같이 온 걸까.

“신경 쓰지 마. 그건 네가 아니라 기요른이 할 걱정이지.”

새틴은 화드득 부정했다.

“걱정 아니에요.”

“네가 기요른에 대해 하는 모든 말은, 내겐 걱정으로 들려.”

루블리에가 잘라 말했다.

어째서지? 말투에 문제가 있나?

새틴은 입을 다물려다가, 생각을 바꾸어 항변했다.

“아니라니까요. 제가 기요른 걱정을 왜 해요?”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궁금해.”

걱정은 상대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감정 아닌가.

염려. 새틴은 흘끗 곁눈질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기요른이나 딜라일라와 자꾸 눈이 마주쳐서 편할 게 없었다.

대신 새틴은 루블리에에게 속닥속닥 반박했다.

“……카 딜론 경이 도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이런 불편한 행사는 취소되는 게 낫다고, 기요른과는 안 마주치는 편이 좋다고 했었잖아요. 정작 괜찮다고 말한 사람이 누군데 여기 와서 왜 그래요?”

따지다 보니 조금 전 느낀 꺼림칙한 뒤끝도 되살아났다.

‘다른 사람들 수십 명보다 기요른 한 사람이 더 의식되나 봐?’

루블리에는 남에게 들릴세라 곁에 붙어서 조그맣게 투덜거리는 새틴을 응시했다.

새틴은 다른 날에는 딱 일정한 간격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서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순간에만 그 거리를 무시했다.

이혼장을 내밀며 인장을 찍으라고 요구하던 날에도 그러더니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미적미적한 새틴의 태도가 마뜩잖았다.

사람들은 눈으로 본 부분을 믿고 판단한다.

그러니 최소한 오늘만큼은 이혼 계약을 잊고 행복한 척 원앙 부부로 잘 살고 있다고 과시를 하든가, 또는 기요른을 아예 없는 사람인 양 싸늘하게 무시해야 했다. 그런데 도무지 손발이 안 맞았다.

새틴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본인은 극구 아니라고 부정해도 기요른을 언급해야만 마지못해 반응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기요른을 챙기고 돌보며 지내온 새틴의 지난날들을 안다.

기요른의 경거망동을 흠잡으면서도 얼굴을 찌푸리고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하고 꼭 사감을 덧붙였다. 오래된 습관이 불쑥불쑥 드러나는데 그걸 본인만 몰랐다.

“뭘 원하냔 말이지…….”

“팔라딘과 델 마레의 후계자께 인사드립니다.”

그러나 연회 홀은 둘이서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기에 그리 적절치 않은 장소였다.

방해꾼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루블리에와 새틴을 찾아낸 귀족들은 계속해서 인사를 하러 왔다. 더불어 그 중 상당수의 남자들이 새틴의 손등에 키스했다.

키리온이 제일 먼저 같은 방식으로 새틴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표시했으니 그 휘하의 귀족들도 당연히 이에 걸맞은 예를 취해야 했다.

“두 분,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시기에 언제 인사를 드려야 하나 했습니다. 사이가 아주 좋으십니다.”

“……그래요?”

새틴은 적당히 웃으며 응대했다.

다른 귀족들이 기요른을 배척하진 않았고, 또 셀 위오 가의 남자를 상대로 그럴 만한 배짱도 없었지만 기요른보다는 새틴과 루블리에에게 훨씬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만큼은 뚜렷하게 보였다.

귀족들은 정식으로 결혼한 새틴의 손등에는 키스를 남길지언정 정부에 불과한 딜라일라에게는 접촉을 삼갔다.

반가운 인사는커녕 기껏해야 눈인사, 또는 이름만 딱 밝히는 통성명이 고작이었다.

새틴과 루블리에를 거쳐 인사를 나누러 간다 하여도 그 상대는 거의 기요른이었지 딜라일라가 되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셀 위오 가조차 인정했듯 신분상 딜라일라는 귀족의 정부 이상이 되지 못했다.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은 결혼식에 참석했거나, 초대받지 못했어도 이미 소문으로 상황을 접한 이들이었다.

기요른이 내 연인을 왜 무시하느냐고 경우 없이 난동을 부린다면 달라질 순 있어도, 오히려 그는 그저 사랑하는 여자와 피곤한 마찰을 피해 조용조용 살아가는 쪽을 선택할 성향이었다.

그러니 사람들로선 굳이 딜라일라를 반갑게 대해 새틴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바탕 몰려온 사람들이 물러난 뒤에 새틴과 루블리에는 속닥속닥 툭툭거리며 좀 전의 대화를 재개했다.

“카 딜론 경이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기요른이 후회했으면 좋겠다고요.”

“너와 헤어진 것을?”

“그야 자기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잠깐만, 제가 기요른에게 미련이 남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거든요. 저는 그냥 지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렇단 말이지.”

무얼 원하냐. 새틴의 물음을 되새긴 루블리에가 입가를 쿡 찍어 가리켰다.

“새틴, 웃어봐.”

새틴은 떨떠름하게 반문했다.

“갑자기 웃으라고요?”

“미리 말하지 않으면 항상 너는 표정으로 너무 티를 내니까.”

“……뭐 하려는 건데요?”

“여성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는 건 경배의 의미지.”

루블리에가 새틴의 손을 쥐고 들어 올렸다. 여기까지는 손등에 입을 맞춘 여타의 남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연회 홀에 모인 남자들이 새틴에게 앞다투어 경의를 표했는데, 남편인 루블리에가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남편은 누구보다도 부인을 경배해야 하는 사람이고.”

루블리에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모아 잡고서, 천천히 새틴의 손등을 제 입술로 가져갔다.

표정 관리를 하라는 뜻이었구나.

새틴은 언질을 받은 대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러나 입술에 닿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그는 새틴의 손을 빙글 뒤집었다.

손바닥의 정중앙에 천천히 입술을 묻었다.

웃음이 설핏 엉클어졌다.

손바닥의 연한 피부는 손등보다 감각이 훨씬 예민했다. 의례적인 손등 키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입술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간지러웠다. 따뜻했다.

더불어 당혹스러웠다. 이건 일부러 기요른을 당황스럽게 하려는 건지, 저를 당황스럽게 하려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런…… 이런 느낌인 걸까. 누군가 입을 맞춰온다는 게.

입술에 하는 입맞춤과 다른데도, 아마 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저렸다. 두 다리가 찡하게 울렸다.

직접 겪어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홀로 느끼는 남자의 숨, 오르내리는 호흡, 조각조각 곤두서는 촉각, 그리고 촉각을 덮는 온기는.

손바닥에 맞닿은 입술 하나로 새틴은 그를 감각했다. 불가항력이었다.

“기요른이 지켜보는 장소에서는 최소한 날 사랑하는 척을 해 봐.”

손바닥에 입술을 꾹 누른 채로 루블리에가 새틴과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만 접촉이 짙어지면 새틴은 늘 어쩔 줄을 몰랐다. 쨍쨍하게 굴다가도 냉큼 달아나기 일쑤였다.

지금도 본능적으로 손을 잡아빼려는 새틴의 경계가 읽혔다.

루블리에는 붙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했다. 새틴의 미간이 살풋 움직였다.

“아파?”

“……아뇨.”

아프지는 않았다. 아픔보다는 난감함에 가까웠다. 새틴은 목소리를 낮췄다.

“기요른도 저를 이십 년이 넘게 보아오기로는 마찬가지예요. 제가 연기를 하는지 진심인지 정도는 간파할 거예요…….”

새틴은 긴장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루블리에의 말 마디마디마다 자꾸만 입술이 스쳤다. 손바닥이 오므라들려 했다. 이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어색해 보이지 않을까.

야릇해 보이지는…… 않을까.

피부를 쓸어내리는 촉감이 오싹오싹했다. 참아보려 기를 썼으나 완전히 숨겨지지는 않았다.

“그래? 그거 잘됐군.”

루블리에가 느긋하게 대꾸했다. 도통 속을 모를 소리에 새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엇이 잘됐다는 뜻인지 의아했다.

거짓말로 사랑하는 척을 하면 기요른에게 들통날 텐데도 잘됐다고?

도망치지 못하게 손을 압박하고 있던 힘이 다소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하게 자유롭진 않았다.

루블리에가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쪽. 살결을 빨아들였다 놓는 소리에 새틴이 움찔 떨었다. 답은 그다음에 들려왔다.

“이왕이면 진심이 되어보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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