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12)

<30화>

그거야 석 달 전의 결혼식 직전까지 그의 약혼녀로 살아왔으니까.

정략적인 혼사였든 사랑으로 엮인 혼사였든 간에 이십여 년 동안 자신의 평생 남편은 기요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이 마당에 고작 세 달 지났다고 마음을 싹 정리하는 게 더 불가능한 이야기 아닌가.

무심코 속으로 변명을 주워 담다가 새틴은 더 뜨악해졌다.

내가 왜 변명을 고민하고 있지?

꺼림칙한 뒷맛이 남은 심정으로 루블리에를 곁눈질했더니, 이미 그는 휘하의 성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느라 분주했다.

“사람들을 도와서 길을 정리해라.”

“네, 수장님.”

신성 기사단이 분분히 흩어졌다.

그냥 별 뜻 없이 한 소리였나 보지. 루블리에는 원래 툭툭 실없는 소리를 던지곤 했으니까.

새틴은 하려던 해명을 꾹 삼켰다.

“들어가자.”

루블리에가 에스코트를 위해 팔을 내밀었다. 그 위에 손을 얹고서 새틴은 자못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옛 약혼녀가 새로운 남편에게 유리 인형처럼 소중히 안겨 애정을 과시하는 과정을 코앞에서 지켜봐야만 했던 기요른의 표정을.

더불어 고대하던 라임라이트를 빼앗겨버린 딜라일라의 눈빛도.

* * *

행사를 위한 연회 홀까지는 외곽의 기나긴 회랑을 통과해야 했다.

정문을 넘어서니 법황청 내부는 아주 조용했다. 삽시간에 서먹해졌다.

새틴은 슬그머니 루블리에의 팔에서 제 손을 가져왔다.

어색했다.

이 분위기를 어쩌지?

방법을 궁리해봐도 적절한 대화는 떠오르지 않았다. 새틴은 억지로 화제를 잇는 대신 회랑 안쪽에 가까이 붙어,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법황청의 무수한 명화들에 시선을 고정했다.

처음에는 그저 그림을 관람하는 척 긴장감을 지울 작정이었는데 어느덧 빠져들어 감상하는 바람에 걸음이 점점 늦어졌다.

“그림을 좋아했었어?”

루블리에의 음성이 새틴을 깨웠다. 새틴은 그제야 저 때문에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루블리에를 알아차렸다.

“있으면 들여다보는 정도예요. 쉬잔 부인의 살롱에 자주 드나들었으니까요.”

그림은 날씨처럼 그럭저럭 무난한 화두였다. 덕분에 새틴은 평범하게 대답했다.

“아, 예술가들에게는 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그곳.”

루블리에도 쉬잔 부인의 살롱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다. 그만큼 유명한 모임이었다.

“거기서 전시됐던 작품들이 여기 진상됐네요.”

신성 교국이다 보니 그림의 주제는 건국에 관한 종류가 주를 이뤘다. 새틴은 은근슬쩍 미술로 대화를 유도했다.

미술가에 관해, 또 그들이 발표한 신작에 관해 재미없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람이 살랑살랑 스치고 지나간 아까의 감각을 지워버리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마침맞게 파수꾼 가문들의 가보가 등장한 탓이다.

성물. 다섯 개로 부서진 검의 파편.

원래대로라면 집안의 명예에 자랑스러움을 느꼈어야 할 그림을 보고 새틴은 가슴부터 눌렀다.

지나간 어느 날 밤의 기억이 스르르 똬리를 틀었다.

집에서 받아온 가보가 들통난 후, 루블리에가 제 심중을 숨김없이 드러냈던 그 밤을.

‘너에게 닿고 싶고 만지고 싶어.’

안돼!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람. 빨리 지워버리자.

“……검의 이 끄트머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새틴은 다급히 서두를 입에 올렸다. 사적인 기억과 감정을 지우려면 검에 실린 공적인 의미를 되새기는 편이 좋았다.

“무슨 끝?”

다행스럽게도 루블리에는 새틴의 머릿속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이번의 이야기를 따라왔다. 새틴은 조용히 안심했다.

“이 뾰족한 부분이요. 다섯으로 쪼개진 한 자루의 검을 나눠 가졌을 때, 델 마레는 이 검의 끝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다른 가문들이 가진 조각과 달리 우리 가보는 형태가 온전하지 않아요. 보세요. 이 그림에서도 조금 뭉툭하잖아요.”

루블리에가 흥미로운 빛을 띠며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알았군.”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눈에 안 띄니까요. 게다가 다른 가문의 가보는 실물로 볼 일이 거의 없으니……. 저도 평생 딱 한 번 봤,”

아차.

무심코 셀 위오 가의 가보가 튀어나올 뻔했다. 새틴은 어설프게 말을 끊었다.

루블리에가 입매를 한쪽만 끌어올렸다. 비스듬히 기운 조소는 오랜만이었다.

“조만간 하나 더 보게 될 거야.”

“……아녜요, 굳이 뭐하러. 이 중요한 보물을.”

델 마레에서 가한 압박 하나만으로 충분한데 카 딜론의 후계까지 고민하고 싶진 않았다. 새틴은 어물어물 거절했다.

“알고 있나? 검의 손잡이와 붙은 밑동은 카 딜론에서 보관하고 있어.”

그러나 루블리에는 검에 대한 화제를 멈추지 않았다.

“카 딜론 가에서 유독 검사들이 많이 배출된 이유가 가보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유일하게 검을 쥘 손잡이를 가진 가문이니까.”

그래도 화제가 기요른에게서 벗어나긴 했다. 다행이었다.

새틴도 세간의 속설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맨손으로 날을 잡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거기서 거기인 검날을 받은 네 가문의 검술 실력은 비슷비슷했다.

반면 손잡이를 받은 카 딜론은 확실히 남달랐다. 루블리에 역시 그 피를 받은 인물 중 하나였다.

디오니시오 법황이 카 딜론 가문의 핏줄에 섞인 재능을 알아보고 그 조각을 준 건지, 혹은 검 손잡이를 받은 카 딜론 가문이 각성한 것인지 분간은 안 가지만 어쨌든 부러운 재능이다.

“델 마레에도 비슷한 얘기가 돌아요. 검의 끝은 무조건 검을 쥔 사람이 목적하는 곳을 향하니까요. 델 마레는 법황 성하의 검 중, 마귀와 대척해 가장 선두에 섰던 조각을 받았죠. 마귀의 심장을 찌른 그 부분이요.”

하여 충성의 델 마레라고 불렸다. 그리고 셀 위오는 딱 가운데 놓인 조각을 받았다. 검의 끝과 끝. 양측을 조율하는 자리였기에 셀 위오는 중립을 상징했다.

실제로 기요른은 오랫동안 둘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끼워 맞춘 풍문이었으나 제법 그럴싸했다.

“양극단이네요, 우린.”

손잡이와 날의 끝. 어쩌다 보니 정말 가장 먼 두 조각이 만났다.

잘 어울려 살 수 없는 사이라고 느꼈던 데에는 혹 이 영향도 있는 걸까. 만약 둘 중 한 명이라도 다른 조각이었으면 좀 더 친밀하게 지냈을까.

“검의 끝은 무조건 검을 쥔 사람이 목적하는 곳을 향한다…….”

루블리에가 새틴이 전한 풍문의 한 대목을 짚었다.

“그래서 너였던 거로군, 내 목적.”

검을 쥐듯 가볍게 움켜쥔 손끝이 직선으로 움직여 새틴을 향했다. 동작이 빠르고 간결했다. 무인인 티가 났다.

“검을 받은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나 봐.”

“네?”

“어쩐지 네가 자꾸 눈에 띄더라니. 조상의 안배였나?”

뭐라는 거야?

새틴은 기겁했다.

좀, 아무렇지 않은 분위기를 가장해서, 훅 들어오지 말라고!

“카 딜론 경이 말했듯이 우스갯소리예요. 우스갯소리.”

하여간 농담도 참 묘하게 한다.

무엇에 대한 핑계인지 모를 핑계를 던지고서 새틴은 총총 다리를 움직였다.

오케스트라가 악기의 현을 조율했다. 오보에의 표준음에 맞추어 관악기들이 음을 겹쳤다.

그 뒤를 현악단이 따랐다. 예술은 아름답다. 조율조차도 하나의 음악이었다.

웅장한 음률을 층층이 쌓아 올린 칼데브란카 개선가가 새틴과 루블리에의 입장을 장식했다.

법황청으로 바쳐지는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건국과 관련되어 있었다. 개선가 역시도 어떤 작곡가가 마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디오니시오 법황과 공신 가문들을 경배하며 지은 헌정 곡이었다.

“올해는 정말로 이상한 해야. 자네가 첫 손님이라니. 입장 식순부터 모든 게 다 꼬여버렸어.”

순금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쾌활하게 다가왔다. 루블리에가 반가움을 표했다.

“키리온.”

새틴도 그를 알았다.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적에, 루블리에와 둘이 나란히 서서 사담을 나누는 광경을 두어 번 보았다. 직접 목격한 것만 두어 번이니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이다.

아카데미에서도 둘의 친분은 유명했고, 요즘도 법황의 직무를 절반 이상 짊어지고 있는 키리온과 가장 자주 독대를 하는 인물이 루블리에라는 소문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키리온 대주교 예하.”

“새틴 부인. 결혼을 축하하오. 루브의 결혼식인데 참석하지 못해서 아쉬웠지.”

키리온이 새틴의 손등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키리온 정도 되는 신분의 남자라면 여성에게 이만큼 정중한 인사를 할 필요가 없었으나 그는 기꺼이 입술을 얕게 찍었다.

이건 친우의 부인에게 보내는 예우였다.

“급작스럽게 진행된 결혼이라서요. 감사합니다.”

“새틴 부인께서는 기억이 잘 안 나겠지만 나는 새틴 부인이 왠지 친근하오. 아카데미에서 몇 번 봤었거든.”

“저를요?”

새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수꾼 가문의 후계자니 인적 사항을 외우고 있으리라 생각하긴 했어도 키리온의 입에서 아카데미가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도리어 먼발치에서 키리온을 스치면서 의식했던 사람은 저였다.

“새틴 부인께선 예전부터 루브와 사이가 좋았으니까. 당연히 루브와 가장 친한 내 눈에도 띌 수밖에.”

아니, 우리가 언제? 대주교가 학창 시절을 아무렇게나 조작해도 되는 거야?

키리온과 친근하기는커녕 사적인 대화조차 섞어보지 못하고 졸업했는데 말이다.

유유상종이라더니 이런 부분이 루블리에와 퍽 닮았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새틴은 말을 아낄 도리밖에 없었다.

“하여튼 애쓴 보람이 있었어. 결국 결혼했잖아? 어릴 때 일찍 인연을 맺고 결혼까지 가다니, 아주 드문 경우지.”

키리온이 루블리에의 어깨를 두드렸다.

“맞아. 그 아주 드문 경우를 내가 성공해냈고 말이야.”

둘 다 묘하게 쿵짝이 맞는데 의도가 궁금했다. 도대체 왜들 이러나 싶었다.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틀던 새틴은 홀 저편에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기요른을 발견했다. 언제 입장했는지 기척을 듣지도 못했다.

오케스트라가 장엄한 선율을 연주하고 있는 탓도 있었고, 키리온의 존재에 긴장해 주의가 분산되지 못한 까닭도 있었다.

아, 대화를 맞춰준 거구나. 대외적으로는 연애하다가 결혼한 사이로 되어 있으니까.

게다가 기요른의 앞에서 오랜 친분이 있기로 소문난 키리온이 루블리에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 이 자체로 약간의 압박이 될 터였다.

법황청은 공식적으로는 파수꾼 가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 둘은 십 년 가까이 친구로 지냈다.

사적인 친분을 과시해도 원래 그래왔으니 문제가 될 턱이 없다. 안전한 방식으로 키리온이 힘을 보태주고 있는 셈이다.

해답을 찾았으나 편안함은 찾아오지 못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웃지 못할 기분이 되었다.

새틴은 그 원인이 된 여자를 가만히 의식했다.

대체 저 여자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거야?

처음에는 잘못 봤나 싶었다. 살롱의 소문으로는 결혼식의 훼방을 놓은 대가로 초대장이 나가지 않았다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신분이 낮은 딜라일라가 기요른의 몫까지 덤터기를 뒤집어쓴 느낌이었어도 어쨌든 마주치기 싫은 한 사람이 치워졌으니 괜찮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었는데.

그 여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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