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112)

<29화>

“길을 비키시오! 팔라딘께서 지나가신다!”

선창을 받아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진 기사들의 후창이 반복됐다.

기요른과 딜라일라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기요른의 낯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딜라일라는 여전히 고고한 태도였으나 이미 이들에 대한 집중도는 조각조각 부서졌다.

“길을 비키시오! 팔라딘께서 지나가신다!”

쩌렁쩌렁한 울림을 담은 경고가 다시금 떨어졌다.

수십 마리에 달하는 말발굽이 일시에 지면을 걷어찼다. 기세가 등등했다. 놀란 기요른이 딜라일라를 이끌고 화급히 길에서 물러났다.

동시에 성큼성큼 빠른 속도로 나타난 말은 평범한 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대한 한혈마였다. 색 하나 섞이지 않은 검은 털의 한혈마는 금빛 술을 단 말갖춤으로 전신을 치장했다.

그리고 그 위에 신성 기사단 정복을 갖춰 입은 루블리에가 늠름하게 앉아 있었다.

한 시대에 단 한 명, 유일하게 팔라딘의 칭호를 물려받는 신성 기사단의 수장은 멈춰서 있는 기요른과 딜라일라에게 시선 한끝조차 주지 않았다.

단지 한 손으로는 고삐를 쥐고, 다른 팔로는 부인을 꽉 감싸 안고서 마차들로 꽉 막힌 길을 여유롭게 달려갈 뿐이었다.

풍성한 드레스 때문에 한쪽으로 두 다리를 모으고 앉은 부인은 거대한 흑마의 높이에 겁을 먹었는지 남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아예 시야를 차단했다. 붙잡은 게 없으니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자세인데도, 루블리에의 팔이 등과 어깨를 아주 단단하게 받치고 있어 안정감이 뚜렷했다.

남편이 짙다면 부인은 옅었다. 델 마레 가문 특유의 엷은, 은회색의 머리카락이 난연하게 나부꼈다.

화려하기 짝이 없던 스캔들 후로, 내내 비밀스러운 신혼을 보내던 부부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신성 기사단의 성기사들이 그들을 둘러싸며 속도를 맞춰 호위했다. 흑마는 법황청 입구까지 단박에 내달렸다.

튼튼한 돌바닥에 다다라 말을 세운 남자는 간단한 몸놀림으로 말 위에서 풀썩 뛰어내렸다.

부인은 말에서 쉽게 내리지 못하고 발을 동동거렸다. 드레스가 가볍게 풀썩였다.

사람들을 등지고 있어 부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대신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말 위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부인에게 두 팔을 뻗었다.

그래도 부인이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모르자 제 목에 팔을 두르게 하고는 번쩍 안아 내렸다.

루블리에와 새틴. 두 파수꾼 가문의 선남선녀가 반전을 거듭한 결혼식을 치르고서 어떤 신혼을 보내고 있을지, 세간에는 온갖 추측만 떠들썩했었다.

서로 정인을 찾아갔으니 그만하면 잘 살지 않겠냐는 낙관부터, 개인의 사정이야 어쨌든 각 집안끼리는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오랜 정혼 기간을 유지했을 텐데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순 없다는 염려까지.

하지만 루블리에와 새틴은 단 한 장면만으로 자신들의 신혼 생활에 대한 온갖 뒷말을 일시에 불식시켰다.

새틴이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서 매무새를 가다듬는 동안 루블리에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부인이 까치발을 들면서 무어라 종알종알 말을 걸자 그는 상체를 구부려 키를 맞췄다.

부인의 이야기를 듣는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했다. 부인에게 집중하는 남편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새틴은 사랑받고 있었다.

똑같이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있어도 몇 달 사이 해쓱해진 기요른과 여전히 화사한 새틴의 처지가 극명하게 대비됐다.

누군가 감탄했다.

“이건…… 일탈로 치른 대가가 너무 아까울 지경인데.”

* * *

하나 기실 새틴의 심정은 밖으로 내보여진 모습과 다소간 차이가 있었다.

“너무 무섭잖아요!”

말 등 위에서 새틴은 비명을 울렸다.

“나한테 기대.”

루블리에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도대체 이 남자를 어찌해야 할지 암담했다. 새틴은 눈을 흘기려다가, 도리어 상체가 휘청하는 바람에 짧은 경악성을 삼켰다.

앞서 길을 탐색하던 기사가 돌아와 길이 틀어막혔다는 소식을 전한 직후였다.

이미 마차로 바글바글한 길목에 저까지 혼란을 더할 수가 없어 새틴은 마차를 포기하고 루블리에의 흑마로 갈아탔다. 거기에는 물론 루블리에의 권유가 있었다.

“드레스용 안장만 있으면 저도 혼자 말을 타도 됐는데요.”

덩치가 크지 않고 성격이 순한 말이라면 새틴도 탈 줄 알았다. 그러나 루블리에는 단칼에 잘랐다.

“왔다 갔다 시간 낭비야.”

귀족 중의 귀족인 카 딜론 가문 남자의 입에서 낭비라는 표현이 나오다니. 새틴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어쨌든 흑마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타는 것이 훨씬 무서웠다. 상상 이상이었다. 시야가 높아지니 공기마저도 생소했다. 심리적인 문제겠지만 괜히 더 추운 듯도 했다.

“새틴. 그냥 기대. 너 그렇게 앉아 있다간 연회에서 부축받아 다니게 될걸?”

허리를 가능한 한 세우고서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버텨보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새틴이 자꾸만 가슴에 옆머리를 툭툭 부딪치자 루블리에가 새틴을 끌어당겼다.

“됐, 꺅!”

거부할 새가 없었다.

푹 팬 물웅덩이가 등장하면서 흑마가 훌쩍 뛰어올랐다. 말이 땅을 딛고 멀리 도약하는 순간 몸이 휘우듬 기울었다. 루블리에가 새틴을 받아 안으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신성 기사단이 보조를 맞췄다.

땅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새틴은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번 빨라진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속력이 느껴져 어지러웠다. 루블리에의 품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더 깊이 파묻히게 됐다.

도무지 몸을 일으킬 엄두가 안 났다. 겁이 나기도 하거니와, 전신의 힘을 쭉 빼고 루블리에에게 기대어 있는 지금이 뜻밖에도 편안해서 새틴은 잠시 떨떠름한 감정을 잊기로 했다.

괜히 꼼지락거리다가 낙마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다치면 안 되니까. 그래, 지금은 위험해서 도움을 조금 받는 정도일 뿐이야.

루블리에의 기사단 정복에 붙은 금색의 장식이 뺨을 간지럽혔다. 새틴은 부드러운 촉각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길을 비키시오! 팔라딘께서 지나가신다!”

활짝 열린 청각으로 사방을 경계하는 신성 기사단의 고함이 들어왔다. 새틴은 자신이 법황청 주변에 엉킨 마차들 사이를 통과했는지도 몰랐다. 단지 소리에 의지해 그저 행인들에게 경고를 하나 보다, 추측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다 왔어.”

그래서 거침없이 달리던 말이 멈추고 루블리에가 흔들어 도착을 알렸을 때, 새틴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게 뭐예요? 우아하게 등장하고 싶었다고요!”

타박타박 느리게 걷는 말 등 위에서 등을 꼿꼿하게 펴고 앉아 얼굴을 들고 싶었는데, 질주하는 말 때문에 루블리에에게 매달려 악악 비명을 누르다 보니 법황청의 문턱이었다.

새틴은 눈을 흘겼다.

“뭐 어때. 부부인걸.”

“부부가 만능은 아니잖아요.”

“부부는 만능이야. 몰랐어? 특히 신혼부부는 무적이지.”

태평하게 눙친 루블리에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평범한 신혼부부도 아니면서 핑계는 참 좋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 보는 데서 할 소리는 아닌지라 새틴도 입을 다물었다.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로 약속한 삼 개월 동안은 어찌 됐든 부부였다.

“헉…….”

새틴은 미끄러지듯 내려오려다가 도로 기어올라 갔다. 팔짝 뛰어내릴 높이가 아니었다. 높은 구두를 신어 발목도 위태로웠다. 아까 말에 오를 때도 루블리에의 부축을 받았었다.

발끝이 얼었다.

“이리 와.”

루블리에가 두 팔을 벌렸다. 새틴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아무리 무적이라도 이 정도로 과시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적당히 괜찮은 부부로 비쳤으면 좋겠다.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애정 행각을 하느라 주위를 신경 쓰지도 않는 부부이기도 부담스럽지만, 너무 마지못해 부부로 살아간다는 티를 내는 부부이기도 싫었다.

신분에서부터 이미 불가능했으나 있는 듯 없는 듯한 부부였으면 그게 가장 좋았을 텐데.

그래야 나중에 이혼을 하고 사람들이 이혼 사유를 물어봐도 적당히 둘러댈 수 있을 테니까.

“기요른이 지켜보고 있어.”

그런데 예상 밖의 이름이 언급됐다. 기요른. 이성이 번쩍 사라졌다.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기요른이 보고 있다는데 망설일 게 뭐가 있겠는가.

새틴은 무심결에 루블리에의 목덜미를 감싸 안으려다 멈칫했다.

구두의 뾰족한 굽이 루블리에의 무릎을 찌를 듯했다. 땅을 몇 번 밟지 않은 구두라 할지라도 말끔하고 화려한 루블리에의 정복 바지에 흔적을 남길까 봐 저어됐다.

높은 굽으로 바닥을 잘못 디딜까 봐도 걱정이었다.

새틴의 망설임을 눈치챈 루블리에가 그녀의 발치 아래로 몸을 낮췄다. 결혼식 날, 무릎을 꿇고서 부케를 선사하며 청혼을 하던 당시의 모습이 겹쳐졌다.

“루…… 카 딜론 경.”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다. 그러나 루블리에는 태연자약했다. 큼직한 손이 새틴의 발목을 감싸 쥐고선 구두를 벗겼다.

얇은 직물로 짠 스타킹 너머로 손의 감촉과 온기가 온전하게 전해졌다.

한 켤레의 구두가 마른 땅 위로 얌전하게 놓였다. 새틴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조심스럽게, 간지럽게 신발을 벗겨준 루블리에가 새틴을 덥석 안아 말에서 내려주었다.

두 팔은 루블리에의 목덜미에 두르고, 발로는 루블리에의 무릎을 디디며 엉거주춤 내린 새틴은 그의 발등이 제 발밑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고 두 번 놀랐다.

루블리에는 새틴이 신발을 신을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이제 됐어요. 괜찮아요.”

새틴은 기요른이 있을 뒤쪽을 차마 돌아보지 못했다. 당당하고 고고한 자세로 마주친다면 모를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는 이 얼굴로는 맞닥뜨릴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아직은 다른 사람들 수십 명보다 기요른 한 사람이 더 의식되나 봐?”

……어?

정수리 위로 미묘한 여운이 남았다. 딱히 화를 낸다거나 하는 어감은 아니었음에도 새틴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