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빨리요, 빨리 내려가요, 마님!”
라리가 재촉했다.
새틴은 엉겁결에 등 떠밀려 계단을 내려갔다. 델 마레의 문은 환영객을 향해 이미 활짝 열린 상태였다.
말에서 내린 루블리에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이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델 마레의 모든 사용인들이 일시에 뛰쳐나와 두 사람을 둥글게 둘러쌌다. 심지어 사용인들의 등 뒤에는 새틴의 부모님까지 있었다.
그때까지도 새틴은 말을 잃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루블리에의 시선이 새틴을 향했다. 씩, 웃음이 따라왔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절에도 루블리에의 외모 하나만큼은 인정했던 새틴이었다.
다소 치기 어린 구석이 있었던 소년의 얼굴은 풋내가 완전히 사라진 청년이 되어 나타났다.
새틴은 무심결에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루블리에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을 벌렸다.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한 태도였다.
“새틴, 데리러 왔어.”
* * *
법황청으로 들어가는 거리가 때아닌 정체로 시끌벅적했다.
온갖 가문의 문장을 단 마차들이 길을 가다 말고 줄줄이 멈춰 섰다. 앞에서 길이 막히니 늦게 들어오던 마차들도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호우로 질퍽해진 땅 때문이었다.
편안하고 안전하게 입성하려고 손님들은 너도나도 마차에 올라 법황청을 찾았다.
그러나 비는 그쳤으되, 비가 남긴 흔적은 길바닥에 여전했다. 약해진 길은 묵직한 마차의 무게를 버티지 못했다.
끝내 여기저기서 마차 바퀴가 빠지는 사고가 잇따랐다. 심지어 어떤 마차는 억지로 끌고 가려다 차체가 기우뚱하게 기우는 바람에 큰 사고로 번질 뻔했다.
“으악!”
마차에 타고 있던 손님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가문의 위세가 높고, 그래서 남들보다 크고 화려한 마차를 탄 손님일수록 상황이 더 나빴다.
진창길에 빠진 마차를 빼려면 바퀴를 뒤로 밀거나 사람이 여럿 달라붙어 들어올려야 하는데 다른 마차들이 뒤에 버티고 있어 수습도 불가능했다.
이 마차, 저 마차 할 것 없이 다들 한 가닥 하는 귀족들이 타고 있었던 탓이다. 하물며 파수꾼 가문의 마차도 한가운데 섞여 있었다.
귀족들은 길을 턱 막아 버린 파수꾼 가문의 마차에 아무런 불평불만도 내색하지 못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법황청에서 다급히 인력을 파견해왔다. 그러나 길을 정비하려면 저 먼 뒤편부터 마차를 빼야 했다.
게다가 빠져나가는 마차는 없는데, 모여드는 마차는 시시각각 늘어났다.
“아니, 이걸 어떡합니까?”
옴짝달싹 못 하게 갇혀 있던 귀족 하나가 창문 너머를 확인하면서 혀를 찼다.
마차들의 간격은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까웠고 두루두루 아는 사이가 많았다.
답답해진 귀족들이 각자 자신의 마차에서 창을 열고 분분히 떠들기 시작했다.
“내려서 걸어가야지요.”
“이 길을요? 우리 옷은 다 어쩌고요?”
물이 덜 빠진 진흙 길을 화려한 예복 차림의 손님들이 그냥 걸어갔다가는 구두와 옷을 죄다 버릴 게 분명했다. 특히 남자들의 망토와 여자들의 치맛자락이 문제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급히 길바닥에 깔 천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법황청에서 나온 시종이 크게 소리쳤다.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이거 진짜 걸어오라는 소리네…….”
“천으로 덮는다고 해도 미끄럽고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쩌겠어요. 일단은 사람이 내려야 빈 마차들을 수습할 테니까요.”
“이봐, 천을 이쪽부터 깔아주게! 마차가 기울어서 앉아 있기가 위험하니!”
조금 전 비명을 질렀던 남자가 문을 열고 크게 소리쳐 요구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귀족이 곧바로 반박했다.
“여기 셀 위오 가문이 계신데 감히 어디서 순서를 무시하고 함부로 끼어듭니까?”
셀 위오 가문의 마차는 그저 첩첩으로 멈춘 마차에 가로막혔을 뿐 기울어진 마차에 비하면 전혀 위험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위력이 우선이었다. 남자가 기죽어 사과했다.
“죄, 죄송하오…….”
권력의 우열에 따라 흙탕물을 막아줄 천은 가장 먼저 도착한 파수꾼 가문인 셀 위오의 마차 주변부터 깔렸다.
법황청에서 다급히 공수해 온 천은 얇고 하늘거렸다. 몇 겹을 겹쳐 올려 겨우 흙탕물을 막았다. 보통은 세력이 높은 가문일수록 늦게 등장했으나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이건 깨끗한 천을 제일 먼저 밟고 가라는 배려였다.
“나오셔도 됩니다.”
법황청의 시종이 마차의 문을 두드려 신호했다.
그제야 유독 조용하던 마차의 문이 끼익, 열렸다. 남자의 다리가 조심스럽게 바닥을 디뎠다.
안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기요른이었다.
사람들의 호기심이 대번에 기요른을 향해 쏟아졌다.
신성 기사단의 수장으로서 법황청과 기사단을 매일 드나들었던 루블리에와 달리, 파행으로 치달은 결혼식의 본래 주인공들은 꽤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며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었다.
특히나 루블리에의 청혼으로 결혼식을 잘 마무리한 새틴보다 조용히 자취를 감춘 기요른 쪽을 사람들은 더 궁금해했다.
그날 루블리에가 화려하게 등장한 데 비해 기요른이 초라하게 퇴장한 까닭이었다.
하여 이번 건국기념일 행사에는 세 사람의 재회를 관찰하려는 의도로 참석한 손님들이 대다수였다.
기요른은 그새 다소 마르고 창백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을 빼곡히 둘러싼 마차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자신을 분리하려는 태도였다.
그대로 법황청까지 깔린 길을 따라 걸어갈 줄 알았던 그는 가문의 마차를 바라보고 서서 그 안으로 제 팔을 내밀었다.
이내 화려하게 치장한 손 하나가 나와 기요른의 팔에 얹혔다. 붉은 구두를 신은 다리가 마차 아래로 내려섰다.
맨드라미처럼 펼쳐진 드레스 자락과 그 자락을 둥그렇게 말아쥔 손, 굽슬굽슬 말려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 오연한 시선 처리.
기요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등장한 파트너의 정체에 마차마다 일제히 놀라움에 찬 정적이 내려앉았다.
딜라일라였다.
딜라일라는 여상스러운 태도로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예상을 넘어선 등장이었다.
파트너를 동반하고 온 귀족들이 제각기 마차 안에서 수런거렸다.
“세상에……. 저 여자가 소문의 그 여자 맞죠?”
“얼굴 기억나요! 새틴님이 커튼을 걷어달라고 했던 자리에서 저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저 가수가 보통내기가 아닌데? 건국기념일 행사에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나타나다니.”
“공연자로 초대만 받지 못했을 뿐, 출입이 금지된 건 아니었잖아요. 기요른님의 파트너 자격으로 참석하려나 보죠.”
“아니야. 기요른 셀 위오처럼 심약한 사람이 그만한 스캔들을 겪고 나서 남들 보는 자리에 정부를 데려오기는 힘들지. 스캔들의 여파가 얼마나 큰지 겪어 보기 전에는 미처 몰라도 이미 겪어 봤으니 무서울 게 아닌가. 저건 저 가수가 먼저 나선 거야. 어차피 부담스럽고 불편할 자리니까 차라리 자신을 대동하라고. 자기 이름값을 올리려는 의도에서든, 이왕 이렇게 된 거 연인으로서의 관계를 공고히 다지려는 의도에서든. 아마 둘 다겠지.”
“그래도 평범한 배짱이 아니에요. 새틴님의 결혼식이 왜 엉망이 됐는데요. 저 여자 때문이잖아요? 팔라딘께서 그날 그 자리에 계셨으니 망정이지, 자칫 자신이 망칠 뻔한 결혼식의 주인공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저리 태연하게 찾아오다니요. 스캔들을 일으키기 전부터 가수이자 배우로 널리 유명세를 떨친 여자인데도 초대를 받지 못한 건, 이 자리에 널 불편하게 여길 사람들이 있으니 오지 말라는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뜻인걸요.”
다들 제 심중의 말부터 하기에 바빴다.
열 사람이 한마디씩만 떠들어도 소란스러운데 훨씬 많은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속닥대니 바람 소리를 닮은 웅성거림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단지 서로 이해타산이 맞은 거지. 기요른님도 지금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곁을 지켜주면 혼자 있는 것보다야 든든하겠다 싶어졌으니 데려오신 걸 거요. 그렇지 않아도 저번 파혼 사건 이후로 집안과 소통하지 않으려고 해서 셀 위오 가문이 막내아들을 포기했다는 소문이 무성하던걸.”
“너무 가엾은 여자라 자신마저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지요? 하지만 어딜 봐서 저 여자가 가련하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사랑에 눈이 멀면 보고 싶은 대로만 보이는 법이요. 왜 이런 말이 있잖소. 장애물이 많으면 사랑은 더 불타오른다고…….”
그러나 오늘 드러난 딜라일라의 모습은 기요른이 가히 마음을 빼앗길 만한 자태였다.
가여운 여자인지 담이 큰 여자인지는 몰라도 만개한 꽃처럼 화려한 미모를 지닌 여자임은 분명했다.
애초 외모와 노래와 연기, 남들이 하나 갖추기도 힘든 재능을 한꺼번에 갖추어 이름을 알린 여자였다.
극장의 조명 아래. 싸구려 드레스를 입고 공주의 연기를 했던 그녀는 오늘 휘황찬란한 실크 드레스로 온몸을 휘감았다. 오페라 대극장의 프리마 돈나 딜라일라는 본래 귀족들의 모임에서도 이름이 빈번하게 오르내리던 유명인이었다. 기요른의 재력과 본인이 가진 매력이 만나, 딜라일라는 어지간한 귀족들과 견주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을 애티튜드를 선보였다.
“저런 여자라면 살면서 인생에서 한 번쯤 일탈을 벌일 만하긴 해.”
개중에는 은근히 기요른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아름다운 프리마 돈나는 아찔하게 높은 구두를 신고서 천 위를 사뿐사뿐 걸었다.
기요른이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붉은 천은 마치 그녀의 발아래 깔린 융단 같았다. 색색으로 장식된 길이 초대받지 못했던 프리마 돈나를 법황청까지 직통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무게에 눌린 천은 금방 지저분하게 젖어갔다. 딜라일라의 발자국이 또렷하게 새겨졌다. 기껏 천을 깐 보람도 없이 길은 금세 흙탕물이 되었다.
“잠깐만요. 저 여자가 먼저 밟고 지나간 길을 우리보고 따라오라는 거예요?”
딜라일라의 입장을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이 뾰족해진 언성으로 불만을 표했다.
“기요른님께서 데려오셨으니 어쩔 수 없지.”
“맙소사. 불청객이 귀빈으로 둔갑하는 건 순식간이네요.”
비난과 체념이 공존했다. 그래도 기요른에게 들리게끔 크게 항의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딜라일라가 어떤 신분이든 간에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남자가 셀 위오였다. 셀 위오의 면전에서는 모두가 몸을 사렸다.
다른 파수꾼 가문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문 내에서 입지가 약해진 기요른만 먼저 출발했기에 마주칠 사람도 없었지만, 누군가 미리 도착해 있었다 하더라도 법황의 성역 안에서 감히 시빗거리를 만들고 싶어 할 이가 누가 있단 말인가.
하여 귀족들은 기 싸움조차 걸지 못하고 우아하게 걸어 들어가는 기요른과 딜라일라를 지켜만 보았다.
그 무렵이었다.
“히히힝!”
느닷없이 엇물린 마차들의 뒤편에서 말의 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닥타닥 경쾌하게 길을 딛는 말발굽 소리도 함께였다.
기요른과 딜라일라를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의 관심이 일시에 한 방향으로 쏠렸다.
“길을 비키시오! 팔라딘께서 지나가신다!”
우렁찬 성기사의 선창이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