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 *
‘이렇게 큰비가 쏟아지면 행사가 취소되겠는데요. 준비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건국일은 국가의 가장 큰 기념일 중 하나인데 비 때문에 취소할 리가 있을까요?’
‘새틴님. 혹시 팔라딘께서 행사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신 게 있나요? 아무래도 법황청 출입이 제일 잦은 분이시니까 소식에 정통하실 것 같아서요.’
밤새도록 폭우의 기세는 여전했다.
새틴은 아침 일찍 가문의 문장을 단 마차를 타고 루블리에의 배웅을 받으며 델 마레에 도착했다.
쏟아지는 비의 흉흉함에 놀란 새틴이 무의식중에 함께 마차에 타자는 권유를 했으나 루블리에는 거절했다.
대신 그는 흑마에 올라 마찻길을 방비했다.
시야가 밝고 넓은 사람이 앞장서야 마차가 안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마차의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하도 멍멍하여 새틴은 내내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길을 나선 지 고작 수십 분 만에 새틴은 홀딱 젖어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루블리에를 이해하게 됐다.
강풍과 호우가 몰아칠 때는 차라리 맨몸으로 다니는 편이 괜찮은 방법이었다.
툭툭 꺾인 우산들이 비바람에 쓸려 다니는 통에 마차는 몇 번이나 가던 길을 멈췄다.
그러고는 길을 청소한 후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꼬박꼬박 루블리에가 찾아와 설명을 했지만 새틴은 내심 불안했다. 이 사나운 날에 작은 마차들도 여럿 넘어갔었다지.
다행스럽게도 새틴이 탄 마차는 크고 튼튼한 것이라 델 마레에 무사히 도착했다. 본가의 정문에서 루블리에는 짤막하게 인사했다.
“기념일까지…….”
“잠시 들어왔다 갈래요?”
“……델 마레로 만나러 올게.”
그마저도 귓전이 따가워 반절은 묻혔다. 제 목소리는 아예 루블리에에게 전달된 것 같지도 않았다.
루블리에가 흑마의 고삐를 쥐고 훌쩍 달려갔다. 결국 델 마레의 정문은 새틴 혼자 넘었다.
새벽의 푸른 빛이 가시지 않은 시간이라 아무도 모르게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에도 목격자가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오후가 채 되기도 전에 새틴은 기념식에 관한 소식을 묻는 전갈을 여러 통 받았다. 평년과 다른 날씨는 모두의 근심 걱정이었다.
재해에 관해서는 같은 심정이었다가 행사가 취소되는 어떡하냐는 대목에 이르러 새틴은 몰래 환호했다.
딱 하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기념일 행사가 취소되었으면 좋겠다.
애초에 나가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기요른과 대면할 시간도 암담한데, 속마음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않은 제가 사람들 앞에서 루블리에와 편하게 지낼 수 있으리란 자신도 없었다.
딜라일라가 이번 행사에 초청되지 않았다지만 그녀가 없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새틴은 루블리에에게 에클레 부인에게서 들은 소문을 전달하지 않았다.
짧고 모호한 데다가 정확하게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저 제 안에 묻어버렸다.
게다가 루블리에와 사소한 잡담을 시시콜콜 주고받을 만큼 친밀하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기요른은 오겠지. 그러니 그냥 이런 행사는 취소되는 편이 낫다.
불청객이던 비가 조금쯤 고맙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루블리에는 기념일 전날 점심 즈음에 델 마레로 찾아왔다. 지난밤과 별다르지 않은 행색이었다. 정신없이 바쁘던 와중에 잠깐 틈을 내서 온 기색이 뚜렷했다. 비를 피해 정원의 조형물 아래 매인 흑마가 퍼드득 투레질을 했다.
문간에서 루블리에와 대면한 새틴은 주인과 다를 바 없이 홀딱 젖은 말을 흘끗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래?”
“사람이나 동물이나 참 고생스러운 날이다 싶어서요.”
대강 둘러대는 한편으로 새틴은 파수꾼 가문들 중 카 딜론 가의 인기가 유독 대중들에게 높은 이유를 체감했다.
자의든 타의든,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최우선으로 신성 기사단이 소집되어 해결을 책임졌다. 그 신성 기사단을 이끄는 사람이 루블리에였다.
지체 높은 귀족이면서도 가장 일선에 나서서 사람들을 통솔하니 인지도가 높을 수밖에.
“마님, 응접실에 잠시 쉬실 자리를 준비할까요?”
라리가 따라 나와 물었다. 새틴은 얼핏 망설였다. 싫어서는 아니었다. 사람이 종일 밖에서 폭우와 싸워가며 고생을 하고 있는데 잠깐 쉴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이 싫을 리가.
인간이라면 그럴 순 없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설령 기요른이라 할지라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나타나면 순간이나마 측은할 것이다.
물론 기요른에 비하면 루블리에는 물에 빠진 강아지 정도로 크긴 했다.
다만 결혼하고서 루블리에는 아직 델 마레에 정식으로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가까이는 부모님부터 멀게는 사용인들까지, 시집간 딸이, 시집간 아가씨가 남편과 어떤 신혼을 보내고 있는지 호기심 가득히 지켜볼 눈들이 참 많았다.
“들어올래요?”
그래도 측은지심이 앞섰다. 새틴은 부담감을 이겨내고 권유했다.
“이 꼴로?”
“그래서인데요.”
“고생한다고 좀 봐주는 거야, 새틴?”
루블리에가 빙글거렸다.
“장난칠 기운 있는 거 보니 아직 덜 힘든가 보네요.”
“어차피 오래 못 있어. 금방 돌아가야 해. 그리고 이런 모습으로는 델 마레에 못 들어가지.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델 마레에 들어올 땐 완벽하게 준비해서 올 거거든.”
루블리에가 거절했다. 그럴 줄 알았던 터라 새틴은 다른 것을 지시했다.
“라리, 뜨거운 차하고 수건 좀 갖다 줘.”
“닦아도 금방 또 젖을 텐데?”
“알아요.”
바쁜 것도 알고, 신성 기사단으로서 바빠야 하는 것도 알고, 체력이 좋아 어지간히 잘 버틸 것도 알지만 삼 일을 꼬박 새벽부터 새벽까지 비에 젖어가며 일하는데 이러다 나중에 몸살이라도 걸리는 건 아닐까 싶었다.
라리가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새틴이 건넨 수건을 받아 루블리에가 설렁설렁 머리를 털어냈다.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내일 기념식은 예정대로 진행한대요?”
새틴은 슬그머니 질문했다. 주변 사람들의 궁금증이기도 했고, 더불어 자신의 중요한 관심사이기도 했다.
가능한 한 태연하게, 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루블리에는 첫마디에 새틴의 기색을 바로 읽어냈다.
“안 했으면 좋겠어?”
그가 짧게 실소했다. 이렇게 바로 눈치채면 별로 둘러댈 핑계가 없었다. 새틴은 한숨을 쉬고서 긍정했다.
“네.”
“왜?”
왜? 왜라니?
“……아니, 그럼 카 딜론 경은 그런 자리에 나가고 싶어요?”
“음. 나는 기대되는데.”
새틴은 입을 딱 벌렸다.
“……그 자리에 기요른도 올 거예요.”
새틴의 불안에도 루블리에는 여유만만했다.
“기요른이 오면 뭐 어때? 오라고 해.”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요?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뒷말이 오갈지 알 수가 없잖아요.
이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루블리에가 새틴의 말허리를 끊었다.
“네가 혼자가 아닌데 무슨 걱정이야.”
어안이 벙벙했다. 새틴은 얼떨결에 입을 다물었다.
혼자가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잠시 멍해 있던 사이, 수 마리의 말이 델 마레 가 근처를 후다닥 달려가며 지축을 울렸다. 또 어디선가 사고가 터진 걸까. 같은 생각을 했는지 루블리에가 젖은 수건을 건넸다.
“얼굴만 잠깐 보러 왔는데 시간이 좀 지체됐군. 뭐,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이 비가 내일 아침까지 그치지 않으면 행사는 취소될 예정이야. 그렇게 알고 있어.”
그랬구나. 어쨌든 행사가 취소될 여지도 있는 것이다.
“알겠어요.”
새틴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부부로서 처음 같이 나가는 자리잖아. 내가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알아? 내일 봐. 데리러 올게.”
루블리에가 성큼 돌아나갔다. 소란스러운 장대비에도 서슴없었다. 동이째 퍼붓는 빗살에 뒷모습이 금세 흐려졌다.
뒤늦게 뜨거운 차를 끓여 온 라리가 루블리에의 행방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벌써 가셨어요?”
새틴은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서 손짓했다.
“그거 나 줘. 내가 마실게.”
루블리에는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이 떠났다. 새틴은 찻잔을 들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가 아니니 겁을 내지 않아도 된다. 루블리에가 의도를 했든 하지 않았든, 그건 의표를 찌른 위안이었다.
적어도 혼자 있을 기요른보다는 제 처지가 훨씬 편할 터였다. 기요른이야말로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숨을 조이며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리겠지.
하지만 이건 차선이었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역시 기념일 행사 취소였다. 완전히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아주 얌전하고 고요하게 살다가 무사히 이혼할 수 있게끔.
새틴은 기대를 놓지 않고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날씨는 새틴의 기대를 배신했다.
건국기념일 새벽에 비는 기적처럼 그쳤다. 요란한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던 새틴은 고요한 아침에 불길함을 느끼며 깨어났다.
라리를 부를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커튼을 열었더니, 그새 하늘이 희맑게 깔려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미뤄두고 있었던 또 다른 공포가 까마득히 밀려왔다.
외출 준비에 맞추어 새틴을 깨우러 들어온 라리는 주인의 속도 모르고 배실거렸다.
“역시 우리나라는 신성 국가라 신께서 도와주시나 봐요!”
신께서 돕기는 개뿔.
울적한 아침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진작 그쳐서 희망을 주지나 말지. 밤까지 사람을 희망 고문하다가 보란 듯이 뒤통수를 쳐버렸다.
새틴은 울고 싶은 기분으로 몸을 단장했다. 준비했던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마쳤다. 속이 갑갑해 엎드리려는 새틴을 라리가 황급히 붙잡았다.
“화장 망가져요, 안 돼요!”
“괜찮아.”
“안 된다니까요!”
화장이 망가지는 것 따위야 지금 제 심정에 비하면 정말 별문제 아닌데도 라리는 강경했다.
새틴은 넋을 잃고 시계를 외면했다. 시간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하루가 멈춰버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집 안팎에서 사용인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던 라리가 반짝 화색이 도는 얼굴로 새틴을 흔들었다.
“마님, 밖을 좀 보세요!”
“왜? 비 와?”
“예? 비요? 웬 비요? 비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게 왔는데요?”
비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게 왔다고?
알쏭달쏭한 수수께끼에 새틴은 비척비척 걸어가 창밖을 곁눈질했다.
“……어?”
“거봐요, 제 말이 맞죠?”
라리가 두 다리를 동동 굴렀다.
새틴은 멍하게 서 있기만 했다.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델 마레 앞에, 경의를 갖춘 정복 차림으로 반듯하게 도열한 신성 기사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가 법황청을 수호하고 신성을 지키는 기사들이다. 제복 대신 아름다운 정복을 입은 기사단의 모습은 국가의 큰 행사 때나 볼 수 있는 장관이었다.
그런 신성 기사단이 델 마레 가로 행진한 것이다.
그리고 기사단의 제일 앞에는 흑마를 탄 루블리에가 서 있었다.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 델 마레에 들어올 땐 완벽하게 준비해서 올 거거든.’
이런 뜻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