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12)

<26화>

“그 여자 후원자였던 사람이 지방 출신의 중년 남자 귀족이라는데, 신분은 그냥저냥 해도 돈은 아주 많은 사람이래요. 아랫지방을 다니면서 어린 배우들을 발굴해 데뷔시키고, 또 그 배우들을 수도 귀족에게 연결해주면서 거액의 소개비를 받는 방식으로 나름 유명한 사람이더라고요.”

처음 알게 된 내용이었다.

“그래요?”

“아마 그 프리마 돈나도 비슷하게 데뷔했을 거예요. 한데 그 여자의 경우에는 인기가 너무 대단해지니까 안 놓아주려고 손에 꽉 쥐고 있었다나 본데, 기요른님이 등장하고 일이 희한하게 진행되면서 셀 위오 가의 후광을 등에 업게 됐으니 후원자 쪽에서 오히려 그녀를 피할 위치가 된 거죠. 신분은 비교조차 안 되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상대는 셀 위오 가의 기요른님인걸요. 그래서 한참 동안 입 꾹 다물고 씩씩대면서 노려보기만 하다가.”

에클레 부인이 꺼림칙한 낯으로 소곤거렸다.

“너는 정말 명배우가 틀림없다고 그랬대요. 나는 잘못이 없고, 너는 나라는 무대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라고요. 그러면서 네가 언제까지 무대 위에 서 있나 두고 보겠다고 을렀다더군요.”

새틴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계속 듣기만 했다. 에클레 부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루 세끼 먹고 살 방법도 없었던 가난한 계집애를 여기까지 올려준 사람이 누군데 은혜도 모른다는 식으로 비난을 했나 봐요. 그런데 그 프리마 돈나는 후원자의 분풀이를 들으면서도 침착했대요. 비웃는 건지 뭔지 하여간 미묘한 태도였다더군요. 그러다가 거기서 뭐라고 딱 받아쳤는데.”

“어떻게요?”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별로 오래 말을 섞지도 않았다고 했으니까요. 다만 조용하게 몇 마디 하니 후원자가 거기서 도망치듯 떠나갔다는 거예요.”

참으로 듬성듬성 이가 빠진 소식이었다. 새틴은 에클레 부인이 ‘별것 아닐 수도 있다’고 한 이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굳이 불러 전달해준 이유도 이해했다.

깜깜한 땅속에 묻기도 찜찜하고 드러내어 말하기도 찜찜한 뒤끝이 있었을 터다.

부인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후원자가 쏘아붙였다는 말이 어딘지 의미심장한 느낌도 들고, 사람들은 프리마 돈나도 이제 끝물이겠다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저는 그 여자가 만만치 않은 사람처럼 느껴져요, 새틴님…….”

* * *

건국기념일 사흘 전부터 장대비가 사납게 쏟아졌다. 외출이 거의 불가능할 수준의 비였다.

보통 변덕스러운 날씨라면 단연코 여름이었으나, 올해는 그 시기가 약간 늦었다. 가을로 넘어가는 이 시기에 하늘이 뒤집혔다.

길에는 누런 흙탕물이 차올랐고, 바람은 횡으로 불었다. 길에는 행인이 사라졌다.

사용인들은 틈새로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창문을 단단히 방비하고 시끄러운 빗소리를 막기 위해 커튼을 쳤다.

루블리에가 없는 시간이면 전면의 큰 창을 활짝 열고 바람을 맞거나 풍광을 감상하길 좋아했던 새틴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창문을 웅웅 뒤흔들고, 퍽퍽 내리꽂히는 강풍과 폭우는 마치 흉포한 야수와도 같았다.

잿빛 천둥이 밤낮으로 으르렁거리며 울었다.

새틴은 자다가도 깜짝깜짝 소스라치며 귀를 틀어막았다.

눈을 뜨면 책을 읽는다거나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잔잔한 일거리를 찾아 가능한 한 안전하고 조용하게 시간을 보냈다.

반면 루블리에에게는 업무가 늘어났다.

하필 건국기념일을 앞둔 시기였다.

신성 기사단은 법황청에서 제일로 의지하는 집단이고, 루블리에는 법황의 손발인 키리온이 제일 의지하는 친구였다.

키리온의 급전을 받은 루블리에는 곧장 기사단을 소집했다. 기사단은 행사 준비의 도움부터 날씨로 인한 각종 사고 수습까지 도맡게 됐다.

그 책임자는 신성 기사단의 수장, 즉 루블리에였다.

“라리, 아직이야?”

새틴은 라리를 불렀다. 새틴이 생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라리가 불안 가득한 태도로 대답했다.

“네, 팔라딘께선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아침 일찍 출발한 루블리에는 밤이 늦도록 돌아오질 않았다.

암만 불편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날 사람이 밖에 나가 하루 종일 고생하는데, 신경이 아예 안 쓰일 리가 없다. 이건 뭐 눈에 보여도 걱정이고 안 보여도 걱정이었다.

……걱정이라니, 내가? 루블리에를?

무심코 도달한 결론에 새틴은 기겁했다.

이건 단지 근처 목장의 염소들이 잘 있나, 염려하는 그 정도의 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납득하면서도 새틴은 라리를 불러 루블리에의 귀환을 물었다. 어느덧 세 번째였다.

“아마 늦게 돌아오시려나 봐요. 저도 얘기만 들은 건데 격벽이 무너져 사람들이 깔리는 사고도 있었나 보더라고요. 집이 망가진 정도는 예사고요. 작은 마차들도 바람에 넘어가서 야단이래요. 여기저기서 신성 기사단을 찾으니 계속 바쁘실 거예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먼저 주무실래요? 불을 꺼드릴까요?”

“사람들이 다쳤대?”

밖의 상황이 그만큼 안 좋은지 몰랐다. 주변에 민가도 거의 없고, 시가지에서도 멀어 눈과 귀가 어두워진 탓이다. 라리가 정리해 주는 잠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새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천둥 번개가 자꾸 치니까 시끄럽고 무서워서 잠 못 자겠어. 라리, 나 응접실로 따뜻한 차 한 잔만 갖다 줘. 책 좀 더 읽다가 잘래.”

“네, 그렇게 할게요. 안락의자에 담요를 깔아드릴 테니까 편하게 계세요.”

새틴은 읽던 책장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서 책을 끌어안았다. 무거운 밤이었다.

터엉. 터어엉. 창이 거세게 흔들렸다. 빗소리라곤 믿기지 않을 수준의 소음이 두꺼운 커튼을 뚫었다.

책을 읽어도 그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읽은 부분을 또 읽고, 또 읽었지만 새틴은 책장을 한 장도 넘기지 못했다.

루블리에는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문이 열리면서 거센 빗소리가 들이쳤다. 소리로 루블리에의 귀환을 알아차린 새틴은 안락의자에 반쯤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시 소란이 일더니 수건을 든 사용인들이 뛰어나갔다.

“새틴은?”

루블리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리가 답했다.

“응접실에 계세요.”

“이 시간까지?”

수건을 손에 든 루블리에가 곧장 응접실로 들어왔다. 빗물에 푹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늘어진 채였다.

젖은 수건을 보면 대강 닦아낸 듯한데 하나도 티가 안 났다. 머리에서부터 연신 흘러내린 빗물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옷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젖지 않은 곳을 단 한 군데도 찾을 수가 없었다.

“새틴, 깨어 있었어?”

차림새에 고단한 하루를 보낸 흔적이 역력해서 새틴은 말문이 막혔다.

“이 폭우를 다 맞고 돌아다닌 거예요?”

“사람을 구조하면서 우산을 쓰고 다닐 순 없잖아.”

루블리에는 자못 태연하게 수건을 들고 머리의 물기를 마저 털어냈다. 서툴고 험한 손동작에 빗물이 새틴에게까지 튀었다.

“이런.”

“……괜찮아요.”

사용인들이 마른 수건을 잔뜩 준비해 와 루블리에를 도왔다.

물 냄새, 비 냄새, 땀 냄새가 뒤섞여서 풍겼다.

루블리에가 들어오는 모습만 확인하고 살짝 침실로 돌아가 잠들 작정이었으나 새벽까지 고생한 루블리에의 모습을 보니 차마 냉정하게 돌아서기가 뭣했다.

새틴은 머뭇머뭇 망설였다.

“비가 빨리 그쳐야겠네요.”

고생했다는 말도, 내일도 고생하겠다는 말도 쉽지 않아 새틴은 말을 에둘렀다.

이 저택은 대귀족이 소유하고 있는 집이라 튼튼하고 안전하게 지어져 폭우에도 끄떡없지만, 사용인들의 말마따나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은 수해로 험난한 낮과 밤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새틴.”

새틴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네.”

“나는 내일도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해.”

한숨이 나올 일정이었다.

엉망이 된 몸을 추스르고 잠들기까지도 한참 시간이 걸릴 텐데, 새벽에 들어온 사람이 아침 일찍 나가야 한다니.

두세 시간이나 자긴 할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퇴근도 마찬가지로 늦을 것이다.

“몇 시에요?”

무심코 묻고서, 새틴은 조악하게 부연했다.

“시중을 들 사람들이 출근 시간에 맞춰 준비를 도와야 하니까요.”

“새벽 여섯 시. 그때 일어날 수 있겠어?”

새벽 여섯 시 전에 나간다면서 일어날 수 있냐고?

새틴은 눈만 깜빡였다. 속뜻이 의아했다. 루블리에와 거리를 두기 위해서, 한 번도 그의 출근을 배웅한 적이 없는 저였다.

“아.”

루블리에가 짧게 침음했다.

“원래는 라리를 통해 용건을 전달하려고 했는데, 결론이 먼저 나왔군. 새틴, 건국기념일까지 델 마레 본가로 들어가서 지내는 게 어때? 내일 새벽 법황청으로 출근하는 길에 델 마레까지 데려다주고 가지.”

예상 밖의 제안에 새틴은 얼떨떨해졌다.

“델 마레 본가요?”

“기념일이 지척인데 호우로 입은 수해 피해가 커서 다들 법황청에서 무슨 소식이 들려오지는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양이야. 문제는 이 집이 아무래도 법황청에서 거리가 멀어. 소식을 바로 전해 듣기에는 델 마레의 본가가 낫겠더군. 나도 카 딜론 가로 퇴근하는 편이 시간이 절약되고, 법황청에서 잠깐 들르기에도 여기보다는 델 마레 쪽이 빠르지. 카 딜론 가로 와도 상관은 없지만 너에게는 델 마레가 편하지 않아?”

당연하다. 나고 자란 델 마레 본가가 훨씬 마음 편했다. 편의를 위해서도, 편안을 위해서도 선택하라면 델 마레였다.

법황청도 가깝고 온갖 소문이 쏟아지는 쉬잔 부인의 살롱과도 가까웠다. 게다가 루블리에도 카 딜론 가에 머물면 출퇴근이 쉬워지니 여러 가지로 이득이었다.

무엇보다 루블리에와 한집에 있으면 마음이 심란했다. 단 이틀이라도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갖는 편이 좋을 터였다.

기간이 짧아 짐을 쌀 필요도 없었다. 새틴이 남겨두고 온 드레스가 상당수 본가에 남아 있었다.

집을 관리할 극소수의 인원만 남기고서 델 마레에서 온 사용인들은 델 마레로, 카 딜론에서 온 사용인들은 카 딜론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다. 새틴은 선선히 동의했다.

“그렇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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