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새틴, 나는 능력 있는 기사야. 뒤쫓고 사로잡는 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지. 이 숨바꼭질에서 누가 이길지 내기해도 좋아.’
그는 자신감을 내보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루블리에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는 여유가 있었다.
한발 물러서서 ‘잘 자 새틴’ 하고 인사를 던질 만큼.
도리어 초조한 쪽은 새틴이었다. 무의식중에도 ‘이제’와 ‘어떻게’를 필두로 한 의문이 내내 떠돌아다녔다.
더불어 루블리에의 검푸른 눈동자가 기억에 새겨져서, 아프도록 깨문 입술을 조심스럽게 훑어 놓아주던 손가락이 자꾸만 떠올라서 새틴은 그가 집에 머무는 동안 불면의 밤을 보냈다.
아직은 답을 아무것도 찾지 못했는데, 건국기념일 행사에 나갈 날도 걱정일뿐더러 그 자리에는 파혼한 약혼자가 있고, 심지어 함께 참석할 사람이 루블리에다.
지금으로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답이 없는 숙제는 우선 유예하고 당장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을 찾아보자.
일단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 익숙해져야 했다. 한동안 사람들을 피했더니 어떤 화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눴는지, 지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방법이 뭐였는지 가물가물했다.
어차피 나가야만 하는 공식 석상이라면 예행연습을 해 두는 편이 나았다. 새틴은 그간의 칩거를 깨고 쉬잔 부인의 살롱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 * *
오랜만에 찾아온 새틴을 마주한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를 터뜨렸다.
“새틴님! 아, 이제 부인이라고 불러드려야 하지요?”
“지금은 새틴으로도 충분해요.”
나중에 이혼해야 하는데 새틴 부인이라는 이름이 너무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버리면 곤란했다.
지금 저도 그 문제로 고민하는 중이다. 새틴은 의심을 사지 않도록 얼른 덧붙였다.
“저도 아직 익숙해지는 과정이어서요.”
“신성 기사단이 자리를 오래 비웠다고 했었지요. 내내 새틴님 혼자 지내셨을 테니 결혼 생활이 어색하실 만도 해요.”
“이해해요. 저도 결혼하고 나서 하룻밤 딱 자고 일어났는데, ‘이 남자가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그런데 몇 달도 안 지나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침대에 저 혼자 있으면 허전하더라고요.”
에클레 부인을 비롯한 지인들이 새틴에게 맞장구를 쳤다. 여러 반응을 예측하고 오긴 했으나, 저를 향한 반가움이 예상보다 훨씬 컸다.
새틴은 그 이유를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됐다.
“새틴님, 결혼식이요!”
“네?”
“새틴님의 결혼식이 제가 본 결혼식 중에 단연 최고였어요!”
누군가 터뜨린 물꼬에 봇물 터지듯 탄성이 쏟아졌다.
“반전에 반전이었어요. 입장 성가를 그 여자가 불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는데, 새틴님께서 파혼을 선언하시고 이 사건이 대체 어떻게 끝나는 건가 싶어서 굉장히 걱정했거든요.”
“한 치 앞도 모르게 일이 진행되는데, 하객석에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저는 결혼식장이 마치 연극 무대 같더라구요. 정말로 멋지고 놀라운 반전이 숨겨진 연극 무대요.”
“마음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새틴님.”
“그래도 노력이 헛되지 않으셨어요. 팔라딘께서 굉장히 멋있으세요. 그 자리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고 청혼하실 줄이야.”
루블리에가 무릎을 꿇고 청혼했던 그 순간. 그때부터 진행된 모든 과정은 연극이 맞긴 했다.
당사자들만 알고 남들은 모르는 연극. 그날의 새틴은 신부를 연기한 배우였다.
루블리에의 임기응변이 아니었으면 제 어설픈 연기는 진작에 탄로 났을 것이다.
새틴은 억지로 웃는 척을 했다. 소식에 어두웠던 새틴에게, 살롱의 지인들이 지지배배 밀린 소문을 물어다 줬다.
“아세요? 셀 위오 가문 내에서 기요른님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대요.”
“에클레 부인, 새틴 님께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새틴님께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텐데, 그리고 더 좋은 분과 결혼해서 잘 사시는 분께 말이에요.”
“어머나…….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죄송해요.”
에클레 부인이 사과했다. 기요른의 이름에 본능적으로 설핏 굳었던 새틴은 이성을 챙겼다. 기요른은 불쾌하다고 해서 마냥 피할 이름이 아니라, 근래의 소식을 알아야만 하는 이름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집에서만 지내서 요즘 아는 이야기가 별로 없어요. 궁금하네요. 셀 위오 가문 내에서 말이 좀 많았나 봐요?”
“아무래도 그랬죠. 새틴님은 정인을 정리하고 가문의 약속에 따르려고 노력하셨는데 기요른님은 정부를 결혼식장까지 데려오시고…….”
새틴은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을 참았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루블리에의 임기응변이 엄청나게 잘 먹혀들긴 했다. 어쨌든 궁금했던 소식은 기요른 쪽이라 새틴은 침묵으로 동조했다.
“저희도 황당했는데 팔라딘께서는 얼마나 기가 막히셨겠어요. 결국 기요른님이 두 분 좋은 일만 하신 거죠. 셀 위오 가문에서는 새틴님을 대신할 다른 신붓감을 찾고 있지만 신분이 마음에 들면 그쪽에선 이미 정부가 있는 남자와는 혼인을 못 하겠다고 하고, 정부를 감당하겠다는 여자는 셀 위오 가에서 성에 안 차고요. 정부를 정리하라는 강압도 있었나 본데 기요른님이 거부하신대요.”
“게다가 그 프리마 돈나도요. 여전히 극장에서 인기는 좋다지만요, 남의 결혼식을 망칠 뻔했으니 어디 뒤에서 좋은 소리 듣겠나요. 보통 결혼식도 아니고 파수꾼 가문끼리 결합하는 결혼식이었는데요. 그래서 이번 건국기념일 행사 때에는 국내의 내로라하는 가수며 배우들이 다 공연을 해 달라고 초청을 받았는데 명단에서 혼자 제외됐다네요.”
가수? 배우? 공연?
물론 기념식에는 예술가들의 공헌이 따른다. 그들은 건국을 칭송하는 작품을 만들어 헌상하고 시가행진의 행렬을 따르며 곡을 연주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법황청의 엄정함을 위배하지 않는 수준에서 그쳤다.
극단의 배우들은 대극장의 무대를 빌려 오르고 살롱의 모임에서 연기를 펼칠지언정 법황청 안에서 진행되는 공적인 행사에는 초청을 받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그 관습이 이번에 깨졌다. 금시초문의 소식에 새틴이 반문했다.
“가수와 배우들이 무대에 서나요?”
“네, 올해 행사부터는 키리온 대주교 예하께서 맡아 주관하셔서요. 기존의 엄숙한 기념식 대신 부담 없이 즐길 사교 모임처럼 분위기를 바꿔보시려는가 봐요. 젊은 분이셔서 그런지 사고의 전환이 빠르세요.”
“벌써부터 기념식에 초대된 배우와 가수들의 몸값이 들썩인다고 해요. 기념식 전후로 대극장의 공연들이 개편될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가장 유명한 프리마 돈나가 제외됐으니 그 속이 어떻겠어요. 그래도 억울하단 소린 할 수 없겠죠. 여타 고위 귀족들이면 모를까 법황청이 간접 제재한걸요. 그 여자, 오래 못 갈 거예요. 아무리 예쁘고 노래를 잘 해봤자 평민이니까요.”
기요른의 혼사는 어려워졌고 딜라일라는 제 아래의 배우와 가수들에게 밀려났다. 예상했던 소식과 아닌 소식이 섞여 있었으나 어쨌든 새틴에게 있어선 위로가 되는 소식이었다.
적절히 근황을 나누고 나자 대화는 최근의 유행으로 넘어갔다. 어느 정도 귀동냥으로 참여하던 새틴은 음료가 든 글라스 하나를 손에 들고 눈치껏 빠져나왔다.
사람들과 한꺼번에 어울리는 자리가 오랜만이라 다소 피로했던 탓이었다.
“새틴님.”
그런데 새틴을 내내 흘끔거리던 에클레 부인이 혼잡을 틈타 다가왔다. 새틴은 그녀를 기웃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에클레 부인.”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괜찮으세요?”
“그럼요. 무슨 이야긴데요?”
새틴은 여상스럽게 대화를 받았다. 하지만 에클레 부인은 쉽게 서두를 꺼내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듣는 사람이 있을까 심히 염려하는 기색이었다.
“잠시 자리를 옮겨도 좋을까요?”
에클레 부인이 재차 요청했다. 이번에는 새틴도 의례적으로 띠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그녀는 예전에도 기요른이 오페라 대극장에 꽃을 들고 찾아갔다는 소식을 전해 준 바가 있었다.
새틴과의 데이트로 오해했지만, 실상은 딜라일라를 만나러 갔던 목격담이었다.
새틴은 두 번 묻지 않고 앞장서서 근처의 커튼 하나를 열었다.
안은 텅 비어있었다. 두세 사람쯤 모여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일부러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기도 했다.
“한참 행복한 신혼을 보내고 계실 새틴님께 다들 즐거운 이야기만 해야 한다고들 말해서 말씀드릴까 말까 망설였지만요…….”
에클레 부인의 화두가 길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녀가 부담 없이 용건을 꺼낼 수 있게끔 새틴은 거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클레 부인은 약간 더 망설였다.
“새틴님은 이제 그쪽과 상관없으신 분인데 제가 괜히 입방정을 떠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뉘앙스가 묘했다. 새틴은 에클레 부인이 꺼낸 대목 중 추측할 만한 여지를 찾아냈다. 이제 자신과 상관없어진 사람이라면 한때는 상관있었던 사람에 관한 화제일 터였다.
그렇다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기요른.
새틴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셀 위오 가와 관련된 이야기예요?”
그제야 에클레 부인이 머리를 주억였다.
“제가 좀 꺼림칙한 소문을 들은 게 있어서요. 어찌 보면 별것 아니기도 하겠지만요.”
기요른에 관련된 일을 남보다 못하게 된 제가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새틴은 내심 갈등했다.
그러나 그의 약혼녀로 지냈던 지난 스물한 해가 결국 화제를 외면하지 못하게 했다.
별것 아니라니까 정말 별것 아니겠지. 듣고 치워버리면 그만일 거야.
새틴은 결정했다.
“무슨 소문인데요?”
“새틴님. 그…… 유명한 오페라 가수 말이에요. 지금 기요른님 곁에 있는.”
“딜라일라 양 말이에요?”
“네, 그 여자요.”
새틴은 얼굴을 찡그렸다. 에클레 부인에게 화나서가 아니라, 그리 반갑지 않은 이름을 들은 까닭이었다.
“딜라일라 양이 왜요?”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에클레 부인이 멈칫 사과했다.
“아녜요.”
새틴은 무언으로 재촉했다.
“……그 여자가 외출했다가 바깥에서 후원자하고 우연히 마주쳤었나 봐요.”
후원자?
제 후원자가 누구인지 딜라일라는 자기 입으로 밝히지 않았었다. 새틴의 의문을 살핀 에클레 부인이 재빠르게 부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