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5. 전 애인과의 재회에 대처하는 방법
사흘의 휴가는 더 이상의 소동 없이 지나갔다. 루블리에는 기사단에 출근하면서 출근 보고를 위해 법황청에 들렀다.
연로한 법황 대신 직무 대리를 맡고 있는 키리온이 루블리에를 반겼다.
“잘 지냈나, 루브? 어땠어? 부인과의 즐거운 시간은.”
은근히 깊은 의미가 담긴 질문에 루블리에는 일순 멈칫했다. 키리온은 그의 학창 시절을 잘 아는 친우였다.
새틴은 휴가 동안 저와 숨바꼭질을 했다. 그나마 마지막에 새틴의 침실로 찾아가서야 제대로 대면했으나, 겁을 먹은 기색이 역력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루블리에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별일 없었어. 별일이 있기에 사흘은 너무 짧지.”
적당히 에두른다고 에둘렀어도 연애에 관한 한 키리온의 감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키리온이 대놓고 실망했다.
“열두 살 꼬마도 아니면서 여태 소꿉장난만 하는 거야? 나잇값을 너무 못하는 거 아닌가? 난 자네 나이보다 훨씬 어릴 때에도 안 그랬다고.”
루블리에는 문뜩 열네 살의 키리온을 떠올렸다. 자신보다 두 살 많은 그는 그 무렵에도 염문설을 몰고 다녔다.
권위가 있고 명예가 있고 명성이 있는 키리온은 여학생들의 선망을 받는 존재였다. 그는 자신을 향한 동경과 경외를 즐겼다.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도 이에 한몫했다. 여기에 법황의 혈통이라는 배경까지 합쳐졌으니 키리온에겐 두려울 것이 전혀 없었다.
“하여튼 자네나 자네 부인이나 겉만 컸지 속은 덜 영글었어. 내가 자네를 너무 과대평가했군그래. 나는 사흘이면 늘 충분했거든. 게다가 하필이면 자네가 출장을 다녀오면서 묘한 보고를 하는 바람에, 그 일만 아니었다면 일주일까지는 힘써 봤을 텐데.”
루블리에가 가져온 ‘악령의 소행’이 휴가를 줄인 범인이었다. 루블리에는 출장 보고를 마친 순간 표정이 이상해지던 키리온을 기억했다.
키리온이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령이니 뭐니 하는 보고를 했다면 난 그 자리에서 웃어넘겼을 거야. 아니면 헛소리 말라고 화를 냈든가. 한데 하필 소식을 가져온 사람이 자네란 말이지. 거기다 시기 또한 공교롭지 않나. 하필 건국기념일을 앞두고 들은 소식이라 그런지 은근히 신경이 쓰이더군.”
“농담이면 좋겠지만 정말 농담이 아냐. 나도 기사단을 오래 비우기에는 걱정이 되어서, 보내준다고 해도 못 쉬었겠지.”
루블리에는 키리온이 권하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키리온이 검토하고 있던 서류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였다.
언뜻 봐도 한꺼번에 보고 있는 안건이 십수 개에 달했다.
일할 땐 일하고 쉴 때는 쉬자 주의던 키리온이었으나 최근 들어 법황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직무 대리의 책임 대부분이 넘어온 탓에 강제 일 중독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키리온. 열심히 일하는 거야 좋지만 나라의 책무를 너무 혼자 다 질 필요는 없어.”
“알아. 그래도 딱히 믿고 맡길 사람이 없는 걸 어쩌겠나. 내 주변에서 완전히 터놓고 믿을 사람이라곤 자네뿐인데 자네도 몸으로 뛰면 뛰었지 서류 체질은 아니잖아. 참, 루브. 요즘 기요른 셀 위오와는 어때?”
느닷없이 기요른의 이름이 등장했다. 루블리에는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기요른? 고맙지.”
내용과는 확연히 다른 조소였다.
“새틴을 놓아줬으니까.”
표면적으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결혼식에 들인 비용을 정산한 후로 루블리에는 셀 위오 가에 연락을 취한 일이 없었다.
다만 완전히 갈라섰다고 하기에는 셀 위오 쪽에서 결혼식의 마무리를 두고 루블리에의 도움을 입었으니 애매했다.
당장은 서로 거리를 두고 신중하게 대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친구 사이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당연히 되돌릴 마음도 없다.
이대로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멀어져 있겠지 싶었다. 어차피 서로 행동반경이 달라 마주칠 일이 많지 않기도 했다.
기요른과 진짜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은 새틴이었다.
한창 진행 중이던 결혼식을 뒤엎을 정도로 새틴은 기요른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로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루블리에는 기요른에게 삼보일배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었으나 새틴에게는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
“갑자기 기요른은 왜?”
루블리에의 물음에 키리온이 서류를 가리켜 보였다.
“건국기념일 행사에 각 가문으로 초청장이 나갔잖아. 모든 파수꾼 가문 사람들이 초대됐어. 자네를 비롯해 자네 부인, 기요른 셀 위오까지 전부 말이야. 법황청에서 주최하는 행사인 만큼 거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 내 개인의 사감은 제쳐 두고, 법황청은 다섯 파수꾼 가문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만 해. 결혼식이 한바탕 난리법석이었던 만큼 아무래도 예전과 같은 관계는 아닐 테니 이건 친구로서 내 염려 정도라고 해 두지.”
“벌써 초청까지 다 끝났나?”
“물론이지. 이번에는 규모를 크게 늘리면서 공연할 배우들도 여럿 불렀어. 드디어 그간 소문 자자하던 프리마 돈나를 공식적으로 감상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지.”
루블리에가 언뜻 얼굴을 찌푸렸다. 키리온은 전에도 프리마 돈나에게 사적인 관심을 내비친 바가 있었다.
루블리에의 태도를 살핀 키리온이 으쓱하며 넘겼다.
“……만 자네 면을 봐서 뺐네. 정말로 나는 그 프리마 돈나와 영 인연이 없는 모양이야. 자네는 기요른만 신경 쓰면 돼. 어때?”
기요른.
루블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안이 집안인 만큼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도리어 세 달 만의 해후엔 늦은 감도 있었다.
건국기념일 행사를 시작으로 앞으로는 더욱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그거 재미있겠군.”
루블리에의 여유에 키리온은 안도감을 내비쳤다.
“좋아. 그럼 그날 보지. 드디어 소문의 자네 부인을 만나게 되겠어.”
* * *
새틴은 건국기념일의 초대장을 받고 좌절했다.
가고 싶지 않다.
어지간하면 가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심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법황청은 다섯 파수꾼 가문을 비롯해 국내의 여러 귀족, 세력가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결혼한 사람들은 배우자와 함께, 아직 미혼인 사람들은 파트너를 데려와도 좋다는 문구를 넣어서.
가뜩이나 경직된 장소였다. 주최자가 법황이고 주관처가 법황청이며 손님들이 모조리 귀족인데 딱딱하고 엄숙한 행사임이 당연했다.
다만 칼데브란카는 다섯 조각의 성물이 증거하는 건국 전설과 함께 태어난 나라였고, 건국기념일은 그 전설을 되새기는 자리였기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념이 강요되었다.
하여 새틴은 매해 건국기념일 행사에 강제로 끌려갔다.
칼데브란카의 위대한 시작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자리에 칼데브란카의 기둥 된 가문의 일원으로서 불참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결혼식에 왔던 하객들 대부분이 그날 한자리에 모여 있으리라는 의미였다.
물론 기요른도 올 테다.
“……이혼하면 당분간 시골 말고 외국으로 나가야 되나.”
루블리에와 저, 기요른 셋이 한꺼번에 모여 있으면 사람들은 당연히 화제의 결혼식부터 떠올리겠지.
어쩌면 꺼져가던 스캔들에 다시 불씨를 활활 지피는 행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양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사양이 안 됐다.
그래도 루블리에와의 결혼에서 결과적으로 아주 큰 도움을 받긴 했다.
표면적으로 카 딜론과 연합한 입장이 된 새틴을 셀 위오가 대놓고 견제하지도 못하게 됐을뿐더러, 셋이 있으면 아무래도 혼자인 기요른 쪽이 기분상으로도 더 난처할 테다.
부부가 된 학창 시절의 친구와 옛 약혼녀를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초대장을 받고서 죽상이 되어 있을 기요른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오랜 친구였기에 예측이 쉬웠다. 한쪽은 신혼부부, 한쪽은 그 부인의 전 약혼자라면 당연히 겉모양만으로는 새틴의 압승이다.
“하지만 겉보기만 좋으면 뭐해.”
뒷이야기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매한가지로 엉망진창인 것을. 어떻게 보면 저쪽 형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저 둘은 신혼부부의 생활을 연기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기요른이나 딜라일라나, 상대를 좋아하는 감정만큼은 진실이리라.
그러나 새틴은 달랐다.
딜라일라처럼 어느 한 배역을 맡아 연기해본 적이 없는 새틴에게는 무대에 오른 것이나 다름없는 현재의 제 처지 자체가 부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해 볼 생각이 있는데. 그것도 아주 많이.’
“악!”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연달아 튀어나온 기억에 새틴이 비명을 질렀다.
“마님, 무슨 일이세요?”
라리가 후다닥 달려왔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
아무것도 아니긴. 그럴 리가 있나.
몇 마디조차 되지 않는 간격을 남기고 다가왔던 루블리에의 얼굴이 여전히 생생한데 말이다.
얼굴을 가볍게 잡아 그를 바라보게 했을 뿐, 힘으로 억누르지 않았는데도 새틴은 옴짝달싹하지 못했었다.
남자의 눈에, 기세에, 분위기에 압도당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난생처음 겪었다. 기요른과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기류였다.
루블리에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던가.
꼬맹이라 놀리고, 밉상으로 구는 남자라고만 여겼었는데.
‘너에게 닿고 싶고 만지고 싶어. 남편이 부인을 바라는 게, 내가 내 부인을 원하는 게 이상한 건가? 나쁘다고 생각해?’
새틴은 무심결에 입술로 엄지를 가져갔다.
긴장감에 휩쓸려 입술을 깨물어 상처를 내고 있자, 그는 손을 대서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이 사실을 한참 후에야 거울을 보고서 깨달았다. 제 아랫입술에는 핏기가 약하게 번져 있었다.